[전영객잔]
[전영객잔] 삶이라는 영원한 미궁으로의 초대장
2008-03-2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통념에 걸리지 않는 삶의 요소로 가득한 홍상수의 <밤과 낮>

다른 사람도 아닌 허문영이 홍상수의 <밤과 낮>에 관해 썼는데 누군가가 또 써야 하는가. 나도 당신처럼 똑같이 물었다. 혹은 이리저리 여러 차례 환기된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과 <세상의 근원>에 대한 일화를 또 꺼내야 하는가. 그러니까 홍상수도 성남도 <돌깨는 사람들>을 보기를 염원하였으나 결국은 그것이 그 자리에 없는 이유로 <세상의 근원>을 보게 된 사연을 또다시 말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밤과 낮>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이해가 아니라 동행이다. 동행하며 불현듯 등장했다 사라지고 비슷하지만 다른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건 그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허문영의 생각을 따라 만약 이 동행하는 여행 속에서 노동과 성애라는 것 외에도 되돌아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첨언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돌깨는 사람들>이 가난한 두 노동자의 형상을 그리고 있고 <세상의 근원>이 고결함의 위장을 질타하는 성애의 형상이며 <밤과 낮>이 노동과 성애의 서로 번져가는 진전의 시간이라는 지적을 새삼 다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로서는 그 그림들의 내용을 벗어나 생각해볼 때 <밤과 낮>의 또 다른 면모에 관해 첨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지금 어떤 내용의 그림이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거기에 없고 하지만 다른 그림이 그 자리에 있는 상태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돌깨는 사람들>과 <세상의 근원>의 자리바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혹은 그 일화가 <밤과 낮>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이유. 무엇인가 있고 없다는 이 단순해 보이는 사실이 실은 <밤과 낮>에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세상의 일면이며 요령부득의 진실이다.

밤이 있는 시간에 낮은 없고 낮이 있는 시간에 밤은 없다. 같은 곳에서의 시간의 흐름일 때 이 자연의 순차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홍상수가 밝힌 이 영화의 연출 동기는 누군가 밤에 속해 있는 시간에 누군가는 낮에 속해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서로 먼 곳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건 연결되어 있을 때, 문득 이곳이 밤일 때 저곳은 낮이라는, 즉 밤 다음에 낮이 아니라 밤이 존재할 때 어딘가에는 낮도 존재하는 혹은 반대의 방식으로 부재를 말할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은 일상의 순차적 섭리를 의심케 한다. 아니 사실은 또 다른 섭리를 깨닫게 된다. 먼 곳에 나가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쉽게 하게 된다. 그 경험을 통해 이 세계를 공존으로 파악하거나 차이로 파악하는 것은 한달음에 결정될 문제가 아닐지라도 여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끼어 있다. 홍상수는 차이를 더 민감하게 직감한다.

나열의 구조 속에서 더 선연하게 빛나는 대구의 출몰

밤과 낮, 그건 경이로운 자연이 선사하는 대구의 산물이다. 그러니 언뜻 제목의 뉘앙스로만 예감하자면 <밤과 낮>은 이전 홍상수의 영화 형식처럼 밤과 낮이라는 큰 대구를 버팀목으로 설정해놓고 반복으로 왕래하면서 그 안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발견해나가는 구조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홍상수는 이 영화를 그렇게 찍지 않았다. 1장과 2장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다. 성남이 파리에 머무르는 이야기와 집으로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지만 그걸 이 영화를 지탱하는 큰 대구의 틀로 보기에는 서로의 질량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난데없는 꿈이 있다.

<밤과 낮>은 성남의 날과 아내의 날을 대비하는 데 장면을 할애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파리라는 장소의 밤과 낮의 불균질한 물리적 교차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파리의 밤은 연일 늦게까지 백야가 이어진다. 성남이 밤에 속하는지 낮에 속하는지 우리는 때때로 잘 알지 못할뿐더러 밤인데도 낮같이 밝은 장면들을 보면 그가 빛의 시간이나 어둠의 시간에 속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파리에 오래 살았을 하숙집 주인은 낯설어하는 성남에게 그 점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밤과 낮, 혹은 밤과 낮의 존재와 부재, 그러니까 되돌아 생각할 때 <세상의 근원>과 <돌깨는 사람들>이라는 존재와 부재라는 일종의 대구에 속하는 문제들이 암암리에 이 영화를 이루고 있지만 결코 그건 형식적인 큰 구조로 나서지는 않는다. <밤과 낮>은 홍상수의 8편의 영화 중에서 그가 “상투적인 것을 버리고 나머지 것들로 일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해낸 대구라는 틀 밖으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다.

<밤과 낮>에서 제외한 것처럼 보이는 대구의 형식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반복과 함께 통념을 깨는 가장 두드러지고 유용한 틀이었다. 쿠르베가 가림없는 여성의 질의 묘사로 세상의 위장을 질타했다면 홍상수는 대구를 기초로 세상의 통념을 벗겨냈다. 그 구조에 빚지고 무언가 바라보았을 때 세상의 불규칙함과 애매모호함이 발견되는 흥미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밤과 낮>은 전에 없이 나열의 구조다. 심지어 이 영화가 일기체 형식으로 완성된 이유가 성남의 감정 기록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넘어, 성남을 따라서만 이행되는 나열의 구조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홍상수 스스로가 부여한 영화적 한계 구조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짐작하고 있다. 날일의 기록이라는 일기체 안에 성남이 있는 것이지, 그 일기를 지금 성남이 쓰는 것인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이한 점은 있다. 이 나열의 상태에서도 정작 그동안 대구의 구조를 통해 발견되어온 차이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밤과 낮>은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된 차이의 인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홍상수가 반영하려는 세상의 미궁이 훨씬 더 깊고 묘연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점. 우리가 사라졌다고 말한 대구는 <밤과 낮>에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출몰하고 사라졌다가 맥락을 바꾸어 또 출몰한다. 나열의 시간 속에서 불쑥불쑥 되돌아오는 대응적 ‘성질’로서의 대구. <밤과 낮>에서 되돌아오는 것이 있다면 어떤 특정한 내용이 아니라 하염없이 불규칙한 시기에 등장하는 바로 이 변형 가능한 대구의 성질들이다. 그로 인해 차이의 감각이 발생하며 그 감각이 이끄는 기이한 변질의 깨달음이 있으며 그 깨달음은 기묘한 감정을 낳는다. 노동의 자리에 성애가 끼어들어 균열을 일으킬 때 그건 이 영화의 귀환하는 대구의 성질들 중 한짝인 것처럼 보인다.

성남이 다섯명의 여인을 만나며 적어가는 나열적 일기

<극장전>과 <해변의 여인>에서 우리는 홍상수 영화의 ‘구조로서의 대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그건 또다시 언젠가는 귀환 가능하다). 홍상수의 영화적 궤적에서 어딘가 분기점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극장전>과 <해변의 여인>은 <밤과 낮>의 나열의 구조에 이르기까지의 최근의 과정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극장전>과 <해변의 여인>은 어떻게든 지탱하던 거대한 틀을 점차 헐어내어온 과정이다.

<극장전>에는 겹침의 순간, 교차의 순간이 있었다. 1장에서의 영실이라는 영화 속 인물, 그 바깥으로 나온 2장에서의 여배우 최영실을 통해서였다. 동수가 극장을 나오던 바로 그때 다름 아니라 1인2역의 이 여인을 만나게 된 사연은 지금에 와서 더 중요해진 것인데, <극장전>에서 영실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좇아다니던 동수는 영화배우 영실에게서 마침내 “이제 그만 뚝”이라는 호통을 듣는다. 나의 헛된 이미지를 좇지 말고 너의 현실로 돌아가라는 호통이다. 영실의 호통을 이해한 것은 그런데 동수가 아니라 그 다음 영화 <해변의 여인>의 중래다. 동수는 이미지에 매혹된 인물일 뿐 이미지가 자기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중래가 이미 이미지의 거짓에 훨씬 더 민감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줄곧 두명의 여인의 모습으로 존재하던 여인들은, 그리고 <극장전>에서 이미 1인2역의 한몸으로 뭉쳐졌던 여인은 <해변의 여인>에서도 나타나는데 둘은 기어이 서로 만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인들은 흔히 두명이었는데 그 이유는 둘이라는 숫자 놀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은연중에 지시하거나 환기시키는 의도치 않은 자연적 모사, 구조적 대구의 형상물로서 등장해온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보경과 민재가 만나지만 그건 드라마적인 순간일 뿐 이미지의 마주침이 아니었고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과 선희의 만남이 그런 것이었다. 두 여인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중래를 따돌리고 만나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건 그때 중래가 고심하던 시나리오의 실마리를 풀기 때문이다. 중래가 좇던 이미지들(문숙과 선희)이 서로를 만나 어처구니없이 위로하고 경주하면서 자기가 바로 이미지가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고 중래가 믿는 진짜 세상의 형상은 나라고 주장하고, 그러다가 서로 합심하여 중래의 욕망을 밀어내고자 할 때, 거기에서 따돌림당한 중래는 생산의 결과물로서 세장의 시놉시스를 완성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 뒤로 그는 문숙을 두고 도망치듯 신두리를 빠져나온다.

<밤과 낮>에 오면 여인들은 둘이 아니라 다섯이며 민선이고, 유정이고, 현주이고, 지혜이고, 아내다. 그들이 서로 스치고 만나고 혹은 서로에 의해 지시된다. 성남은 과거의 여인이지만 실은 유정의 미래라고 불러야 적합할 민선을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고, 그 민선을 만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유정이 지나가고, 하숙집 주인이 소개해준 유학생 현주를 다시 만나러 갔을 때 그 자리에 유정이 있다. 성남에게 관심이 있는 민선과 현주는 유정이 갖지 못한 부분을 집요하게 성남 앞에서 욕하며, 유정이 그림 실력으로 질투했을 법한 지혜는 어느 날 성남 앞에 나타난다. 그 지혜는 성남과 아무 관계가 없는 여인이지만 집에 돌아와 꾸는 꿈속에 등장하고 그 꿈을 그는 아내의 품 안에서 꾼다. <밤과 낮>에서 성남은 여인들을 통해 나열의 방식으로 나아가지만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단속적으로 끊겼다 나아가고, 멀리 나아갔다가 조금 나아가고, 또 조금 앞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멀리 나아간다. <밤과 낮>은 성남의 일기가 아니라 그런 성남이 그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일기‘체’의 기록이다. 일기체의 형식을 따라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진행되는 그 불균질함 때문에 실제로 <밤과 낮>은 전체적으로는 느슨해 보이는 영화다. 신두리를 빠져 나온 중래가 파리로 이행하는 성남의 모습으로 이어져 있을 때 홍상수의 남자주인공은 구조-대구의 신두리를 벗어나 구조-나열의 파리 생활로 접어든다.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라는 두 대구 사이에 걸쳐진 진실과 거짓말

그런데 나열이라고 해서 홍상수가 되돌아올 것을 그만 오도록 막고 새로운 것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말한 대로 익숙한 것들이 돌아온다. “그 책이 아마 제가 아는 어떤 분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일 거예요.” <생활의 발견>에서 선영은 난데없이 경수가 들고 있던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보고 그렇게 말했는데 <밤과 낮>의 초반에 성남이 파리의 민박집에서 할 일 없이 성경책을 들고 뒤적일 때 한 남자는 다가와 대뜸 “교회 다니시나봐요? 이 책 때문에 제가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거든요”라고 말한다. <극장전>에서부터 홍상수가 종종 시도해오고 있는 자기 영화에 대한 지시적 발언을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앞선 영화의 대사를 감안한 이 농담의 대구는 하나의 일례가 될 수 있다. 성남이 신자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민선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성경책을 들고 마치 그것이 자기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인 양 한 구절을 인용한다.

진짜를 둘러싸고 되돌아와 불현듯 짝을 이루는 가짜의 대구가 훨씬 더 중요하며 복잡다단하다. <밤과 낮>에는 지속적으로 진짜에 대한 가짜의 대응이 있다. 이를테면 유정은 어떤 여자인가. 길가의 걸인에게 스스럼없이 먹을거리를 사주는 유정의 모습이 진짜인가 혹은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기도 싫어하는 모습이 진짜인가. 이건 한 사람의 복합적인 성격이라 치더라도 유정은 가짜 대학생이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의 대구는 진품과 모작이라는 또 다른 대구의 양상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유정은 같은 대학에 다니던 지혜라는 여학생의 그림을 표절하고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작품 세계인 양 성남을 앞에 두고 늠름하게 설명하고 또 거기에 대한 칭찬까지 얻어낸다. 그리고 성남은 결국 그 작품이 유정의 작품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성남의 태도는 예상과 다른데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유정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가짜를 그린 유정의 태도에 성남은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 마음은 진짜인 것 같다. 성남에게 진품과 모작이라는 문제는 유정이라는 사람을 진짜와 가짜로 판단하는 데 있어 결코 잣대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밤과 낮>의 대구의 성질들은 늘 예상과는 다른 결과로 변질 또는 변형된다. 사랑한다는 유정을 남겨놓고 성남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와 아내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구름 그림은 물론 성남의 것이겠지만, 성남이 자기의 값진 노동으로 자연을 모사한 것이라 칭할 만한 그의 그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불온하고도 으스스한 죽은 모사가 되어 그 방의 분위기를 바꾸어버린다.

성남의 감정을 정작 흔들어놓은 것은 임신과 아이다. 성남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세상에서 네가 제일 아름답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쓰다듬는다. 그런데 성남에게는 아이가 없는 것 같고, 그를 조여오는 것은 아이 이전에 있어야 할 도처에 널린 임신이다. 민선은 성남의 아이를 여섯번 지웠다고 하고, 아내는 거짓 임신으로 그를 불러들이고, 그때 유정은 임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성남이 새를 구하고 그렇게 기뻐했던 것은 그것이 어린 새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남에게 임신은 공포와 죄에 해당하지만 아이는 한없는 깨끗함과 희망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백옥 같은 도자기와 그 도자기의 깨짐. 혹은 대마초와 임신 모두에 연관되어 있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처벌에 대응하는 자기 과장이라는 양상은 성남이 북한 유학생을 처음 만났을 때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다음 자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미안한 듯 팔씨름으로 무마하려는 백치 같은 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국 성남을 불러들인 것은 진짜와 가짜의 또 다른 변형인 아내의 거짓말이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파리로 도피한 성남이 아내에게 전화를 할 때 그는 밤에 속하지만 그 전화를 받는 아내는 낮에 속해 있다. 성남은 아내에게 많은 걸 의지하고 아내만이 현실적으로 그의 조력자다. 그런데 성남은 아내에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아내는 그걸 알지 못한다. 성남의 파리에서의 여행은 아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했다. 그들은 공존하는 자들이기보다 차이의 시간 안에 있는 자들이며 서로의 일부를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무지가 결국 성남을 구제한다. 성남의 거짓말을 모르는 아내의 단 한번의 거짓말이 성남을 불러들인다. 성남은 귀가한다. 아내의 거짓말은 선하지만 역시 거짓말이고 그것은 성남이 두려워하거나 숭고하게 여긴 임신과 아이, 죄의식과 희망을 걸고 벌인 그녀만의 내기인 것이다. 성남의 거짓말에 대한 그녀의 거짓말이다.

대구의 출현은 물론 멈추지 않는다. 성남이 도착한 서울의 집에서 그가 꿈을 꾼다. 그는 이미 파리에서 “하루 종일 여자 꿈만 꾸었던” 날에 꿈속에서 유정의 발가락을 빨고는 그 꿈을 깨자마자 곧장 유정을 현실에서 다시 찾아간 적이 있다. 꿈은 두 번째 반복되고 이제는 유정과 그녀의 뱃속에 남겨두고 왔을지 모를 태아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를 등장시켜 “첩”의 꿈(<극장전>의 영실의 대사. “내가 네 첩해줄까?”)으로 나타난다. 꿈은 해석 불가한 것이다. 하지만 꿈이 현실에 관한 불온하고 불확정한 모작이라는 점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아내는 “그냥 꿈이야”라고 말하는 성남에게 “그런 거 꿈 아니야” 라고 말하는데, 그러니 실은 <밤과 낮>은 이걸 뒤집어 말하고 싶은 유혹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영화다. “그냥 현실이야”, “그런 거 현실 아냐”.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라는 또 다른 대구 사이에 걸쳐진 <밤과 낮>.

불가능성과 불가해함을 인정하며 현실에서 사는 고단함

<밤과 낮>은 느슨하고 편평해 보이지만 불가해한 감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대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읽어내는 것이 <밤과 낮>의 뛰어남을 설명하는 방법의 다는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밤과 낮>은 부지불식간에 꼼꼼하게 얽혀 있는 대구의 여러 성질들의 불규칙한 나열과 그 속의 차이들을 강조하여 맥락을 생성시키는 영화다. 삶의 전모 즉 영원한 미궁으로 초대장이다. 예술작품이건 물체이건 사람이건 혹은 관점이건 그 모든 것이 앞선 것의 대응물로서 불현듯 어느 자리에 출현한다는 것은 영화 <밤과 낮>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밤과 낮>을 보고나면 고단하다. 자주 희극적이던 영화는 마지막을 헐벗고 지치게, 그리고 꽉 막힌 상태에서 끝낸다. 도피를 기회 삼아 충만해지고자 했던 자의 실패 혹은 호출을 받아 돌아온 자의 미련. 성남은 얼마나 많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내일을 부르짖고, 약속하고, 후회하며 자기의 결심을 말해왔던가. 그러나 그 실패와 미련은 성남의 탓이 아니다. 돌아오고 재출현하는 대구적인 성질들이 나열되는 세상에서 성남이 재출현하는 그것들의 차이를 경험하면서 서로 다른 결과들의 모호함을 겪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를 좇아 영화 내내 그 고단함을 함께 느끼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패의 고단함 속에서 만들어지는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성과, 즉 공포와 책임감을 동시에 자극한 거짓 임신 혹은 뜻밖의 구원 기제. 진짜 삶의 조각들이란 그런 복잡다단한 양상의 어울림이 아닐까. “밤과 낮으로 이루어지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익숙한 이념이나 형식의 틀에 잘 잡히지 않는 삶의 요소들로 채워넣고 싶었다”는 홍상수의 영화적 바람이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불가능성과 불가해함을 인정하면서 현실에서 살아가기.

성남의 꿈속에서 지혜가 탕 속에 앉아 울고 있을 때 창에 머리를 박던 돼지가 무엇인지, 지혜가 들고 가다 깨뜨린 도자기가 무엇인지는 실상 중요치 않을 것이다. 이제 더이상 꿈속에서는 도자기가 없고 혹은 그 꿈을 깨고 나면 성남의 집 안방에 도자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밤과 낮>에서 삶의 조각들은 의미를 상실하고 재차 돌아온다. 우리는 돌아옴의 운명 그 자체 때문에 고단하다. 물론 그런 삶도 고단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 이상한 삶을 노려보며 살아야지 또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것이 <밤과 낮>이 전하는 세계의 진실이며 성남의 고단함을 보고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고단함이다.

“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럼 나는 천사를 그릴 것이다.” 쿠르베는 그렇게 말했고 가장 강력한 구조로서의 대구를 선보였던 영화 <강원도의 힘>을 만들고 나서 홍상수는 “나는 보이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그 말에 다시 대구를 달아 <밤과 낮>의 다른 귀결의 여지를 얻고 싶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럼 나는 천사가 없음을 그릴 것이다.” 어딘지 <밤과 낮>을 보고 나면 그런 목소리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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