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감동선사’보다는 ‘분노유발’
2008-03-27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우정과 속죄를 빙자한 ‘친미-꼴보수’ 프로파간다, <연을 쫓는 아이>

<연을 쫓는 아이>는 미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배경의 할리우드영화이다. 영화는 전미비평가협회 선정 2007년 최고의 영화 톱10에 들고, 2008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와 2008년 아카데미 작곡상 후보에 오를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아프가니스탄 배경에 원작이 베스트셀러였고 거기에 음악까지 좋다니 감동은 따놓은 당상일 터!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감동은커녕 분노만 치민다.

<연을 쫓는 아이>가 아프간 현대사에 소년의 성장을 담았다는 이유로, 걸작 <천상의 소녀>를 떠올리진 말기 바란다. 이 영화와 비견될 만한 텍스트는 따로 있다. 거시적 관점의 서사의 보자면 ‘전쟁이 나자 동네에서 가장 나쁜 놈이었던 자가 붉은 완장 차고 설치더라’ 하는 6·25 특집드라마가 떠오르고, 미시적 관점의 서사를 보자면, ‘출생의 비밀’을 키워드로 삼아 혈연적 봉합을 추구하는 홈드라마가 연상된다. 서사의 저급함은 일단 소설 탓이지만, 각색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설마 미국의 장기 베스트셀러요, 전세계에 800만부나 팔린 소설이 그리 싸구려일 리 있냐고? 글쎄… 대(對)중동전 시기에 ‘친미-반공-반탈레반-보수적 가족로망스’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연하고, 전미 베스트셀러라는 프리미엄으로 여러 나라에서 별다른 비판없이 읽힌 것도 당연한 일 아닐까?

친미-반공-반탈레반-보수우파 가족로망스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간 출신인’이 쓴 첫 영문소설이다. 1965년 아프간에서 태어나 소련 침공 직후인 1980년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한 호세이니가 2003년 출간한 <연을 쫓는 아이>는 2004년도 미국도서관협회의 ‘청소년이 읽을 만한 성인도서’로 선정되고, 2005년 전미 베스트셀러 3위를 기록하였다. 소설은 전반부에 1975년을 전후한 아프간에서의 유년생활과 1980년 소련군 침공 직후의 탈출과정,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의 이민 생활을 담고 있다. 후반부엔 2000년 주인공이 아프간으로 가서 탈레반 치하의 소년을 구출하는 과정과 9·11 직전인 2001년 8월 미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담겨 있고, 2002년 3월까지의 후일담이 덧붙는다. 소설이 출간된 2003년은 이라크전이 일어난 해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정권 붕괴 뒤 과도정부가 수립된 때였다. 이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미국인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이고, 탈레반은 누구인지 알고픈 욕구가 일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아프간에서 온 사람이 소련 침공 이전부터 최근 정황까지 풀어 쓴 ‘따끈따끈한’ 책은 수요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소설은 ‘속죄’ 같은 고상한 주제를 갖는데다, 560페이지에 달하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힐 만큼 문체도 좋다.

미국이 공습을 퍼부은 나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는 비판의식을 갖추기 위함이거나, ‘타자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기에 선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책은 ‘정치적 올바름’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아프간에서 내전을 겪고 미군의 폭격을 맞은 아프간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산혁명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자히르 샤 왕정과 다우드 공화정에서 누리던 기득권에 향수를 느끼는 아프간 이민자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들은 결코 현지의 아프간인들을 대변할 수 없다. 6·25 때 월남한 북한 주민들이 극심한 반공주의자들이었고, 재미한인사회가 한국사회보다 훨씬 보수적인 정치의식을 지니는 것처럼, 미국의 아프간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여느 미국인들과 같이, 아니 그보다 더) 친미, 반공, 반탈레반의 성향을 띠는 건 당연하다. 한국어판 역자는 이 책이 “아프가니스탄에 더이상 상처를 가하지 말라는 한권의 탄원서”처럼 보인다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미국의 아프간 이민자들은 친미, 반공, 반탈레반 주의자들이니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거나 반목하지 말아달라는 탄원서’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연을 쫓는 아이>의 어떤 점이 그토록 ‘친미-반공-반탈레반-보수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지니는지 면면을 살펴보자.

1. 미국에 오기 전부터 미국 시민 : 아버지는 율법학자를 비웃고, 술도 마시는 반이슬람주의자이고, 1978년 이전부터 공산주의를 비판하던 반공주의자이다. 그는 ‘하자라’족 하인 아들을 아들의 친구로 삼을 만큼 신분과 종족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그의 ‘관용’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하산에 대한 배려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은 ‘리버럴리스트’로서의 자의식의 발로이다). 그는 엄청난 부자이고, 소유관념을 가장 중시할 만큼(“세상의 모든 죄는 도둑질의 변형”) 부르주아이며, 이슬람 문화권에선 금기시되는 독신을 고수한다. 반이슬람, 반봉건, 반종족,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리버럴리스트’라니, 이런 서구적 가치를 내면화한 부르주아가 당시 아프간에 1%나 있었을까? 70년대 아프간 사회는 20년대와 60년대 사회개혁이 모두 실패하여 여전히 이슬람, 봉건질서, 종족의식 등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고, 이를 척결하려는 반봉건개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소수엘리트 집단이 존재하였다. 그 와중에 특이하게도 반이슬람, 반봉건, 반종족, 반공주의자인 그는 필경 미국으로 올 수밖에 없는 ‘내추럴 본 미국인’이었다(소설에는 그가 미국, 영국, 이스라엘 남자의 용맹함을 높이 샀다고 나온다). 영화는 그에게 최대한의 긍정성을 부여하며(특히 소련군을 막아서는 장면에선 ‘간지가 작렬’한다) 존경스러운 아버지로 묘사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지지를 드러낸다.

2. 혈연 중심의 보수적 가족주의: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의지한다. 의사 앞에서, 여자의 집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말한다. 늙고 병들어도 아버지의 권위는 실추되지 않는다. 심지어 죽고 나서도, 비밀을 알게 된 아들의 분노와 혼돈이 (책에는 조금 언급되지만) 영화에는 생략되어 있다. 하인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관대한 주인인 양 위선을 떨던 아버지의 “도둑질”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영화를 통해선 비판되지 않는다. 그 결과 주인공의 아프간행은 자신의 과오에 아버지의 과오까지 함께 속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복동생’이라는 말에 ‘핏줄이 끌려’ 나서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화는 마치 파쉬툰족 주인과 하자라족 하인간의 종족과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추구하는 듯 출발하지만, 조카를 입양함으로써 불완전한 가정을 완전하게 봉합하겠다는 정상가족담론으로 끝맺는다. ‘우정보다 혈연’을 추인함으로써 혈족의 확장개념인 종족의 가치는 오히려 강화된다(이 서사로 종족의 가치가 훼손되는 점이 있다면, ‘파쉬툰족이고 하자라족이고 알고 보면 뒷구멍으로 다 피가 섞였다네’ 정도의 균열이다. 이는 다시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순혈주의의 역풍을 맞게 된다). 영화의 종족적 가치에 대한 믿음은 충성스런 하산에 의해 더욱 보강된다. 그는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며 우정이라 믿는다. 그러나 믿음은 부정된다. 그는 주인의 배신에도 분노하지 않으며, 차라리 자학을 택한다. 주인을 떠나온 뒤에도 다시금 주인의 집을 지키느라 탈레반 손에 죽는데, 그의 이러한 충성심의 근원은 설명되지 않는다. 14년간의 사회주의 정권하에서도 봉건적인 충성심을 폐기하지 않고, 내전의 와중에서 20년간 연락도 없는 옛 주인에게 연서에 가까운 편지를 쓰는 그를 어찌 봐야 할 것인가? 하자라인은 노예근성에 찌든 ‘내추럴 본 하인’이라는 종족적 편견이 강화될 뿐이다.

3. 탈레반은 악마, 미국은 이민자들의 천국: 갈등의 핵심은 하산을 성폭행한 아세프가 탈레반이 되어 다시 하산의 아들을 성폭행하는 것이다. <천상의 소녀>에서 소녀의 고통은 여성에 대한 탈레반의 일관된 정책에 의한 것으로, 그 고통을 그리는 것은 탈레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된다. 그러나 탈레반과 소년 강간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탈레반이 아프간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94년 성폭행을 한 무자헤딘 장교를 처결한 사건이라는 점과 탈레반이 정책적으로 음악, 춤, 놀이를 금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소랍의 등장 장면은 어처구니가 없다. 탈레반이 나쁘다는 근거를 탈레반 내부의 논리로부터 도출하지 못하고, 선정적 소재인 ‘아동성폭행’을 끌어들여 우연적으로 결부시킬 때, 그것은 악성 프로파간다가 된다. 소련군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 묘사하기 위해 성폭행이 동원된다. 한편 미국은 일체의 악과 관련이 없는 평화의 나라로 묘사된다. 아프간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건너와 하급노동을 하며 살아도 자식을 훌륭히 교육시킬 수 있는 나라이고, 질 높은 의료해택도 받을 수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없으며, 본국에선 끊긴 전통문화(결혼식과 연날리기)를 이민자들끼리 계승하며 살 수 있다. 소설에선 미국의 아프간 공습에 대한 언급이 약간 들어 있지만, 영화는 9·11 이전인 2000년까지만 담기 때문에, 미국은 아프간의 적성국도 아니고, 그저 소련 침공과 탈레반을 피해 온 이민자들의 낙원이다. 소련침공 이후 미국이 무자헤딘군을 지원했으며, 98년 이전에는 탈레반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911후 ‘빈 라덴’을 내놓으라는 명분으로 불과 한달 만에 공습을 감행한 나라라는 사실조차 시치미를 뗀다.

<연을 쫓는 아이>는 우정과 속죄의 이야기로 마치 탈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을 지니는 듯 위장하고 있지만, 노골적인 친미, 반공, 반탈레반, 보수 가족주의를 표방한다. 전시 미국인이 이 텍스트를 통해 얻는 효용은 분명하다.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불편함 없이, 아프간 출신 인이 육성으로 고발하는 탈레반의 악행에 경악하며, 아프간 침공의 당위성을 가벼운 마음으로 추인케 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경탄하면서 소련침공이전의 ‘오래된 왕국-아프간’을 그리워하며 폐허가 된 아프간에 나무를 심자고 하거나, 어쩌다 마주친 ‘듣보잡’ 이민자들에게 ‘저 사람들도 자기네 나라에선 부호나 장군이었을까?’ 같은 몽롱한 생각으로 개무시의 시선을 조금 거둬들이는 정도의 ‘정치적 올바름’을 행사케 한다. <연을 쫓는 아이>가 미국에서 그토록 환대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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