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에 정재혁 기자가 쓴 글을 보다 눈물이 날 뻔했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소개한 그의 기사는 지금 이 땅에서 야생동물들이 처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황윤의 다큐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과연 보는 게 좋을지 걱정도 됐다. 야생동물들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는 로드킬의 참상을 전하며 “목장갑이나 대걸레 조각이 야생동물 시체로 착각하기에 가장 쉬울 정도로 야생동물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쓴 문장을 보니 비록 동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과연 화면으로 그걸 확인할 용기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동물원의 실상을 전하는 <작별>의 경우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꺼림칙했다. 영화를 보고나면 동물원에서 맘 놓고 누리던 즐거움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다. 분명한 것은 내가 피한다고 현실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두편의 다큐가 일깨우는 불편한 진실은 오히려 그런 외면 때문에 여태 그대로일 것이다.
황윤 감독의 다큐 작업에 영감을 줬다는 <동물원의 탄생>에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서구에서 동물원에 전시할 동물을 모으기 위해 어떤 짓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묘사가 나온다. “사자의 경우 예외없이 어미를 먼저 죽인 다음 새끼들만 포획한다. 호랑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들 동물을 덫이나 함정 같은 것을 이용하여 잡을 경우, 이들이 너무 힘이 세고 길들이기 어려우며, 대체로 저항하는 도중에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동물보호단체가 열성적인 활동을 벌이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불과 100년 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몇 마리 새끼를 포획하기 위해 수십 마리의 어미를 죽였다. 그나마 유럽까지 가는 배나 기차에서 스트레스로 죽는 동물이 많았고 동물원에서도 오래 살지 못했다. 학살이 더이상 상상할 수 없는 과거사가 됐다 해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원에 감금된 동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당시 동물을 포획하던 이들이 가졌던 생각이다. “동물 포획은 한때 인간이 동물과 마주칠 때 가졌던 의식적인 경건함은 더이상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관리와 수송 같은 실용적인 이유만을 따져서, 포획자는 대개 어른 코끼리들을 먼저 간단히 없애버리고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새끼들을 붙잡는 데 힘을 쏟았다.” 가장 손쉽게 포획하기 위해 어미를 먼저 죽인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실용적인 생각이었다. 동물의 아픔 따위에 눈돌리지 않고 인간의 이익과 편리만을 생각하는 것이 실용의 함정임을 당시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은 아직 로드킬에 무관심한 나라다.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능히 짐작이 가는 얘기다.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길이라며 인간도 가축 몰듯 쫓아내는 나라에서 동물을 염려하며 길을 뚫었을 리 만무하다. 개발의 한길로 매진한 지난 역사가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이제 실용을 강조하는 정부가 들어섰으니 더욱이 동물보호 같은 작은 권리가 목소리를 높일 여지는 없어 보인다. 정말 대운하 공사라도 시작하면 인간은 그렇다치고 야생동물들은 어떻게 될까. 실용은 그 말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힘없는 사람들을 내모는 일이 실용의 깃발 아래 숨어 있는 게 아닌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인간의 실용을 위해 함부로 길을 뚫어 생명을 잃은 동물이 부지기수라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