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영화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의 예고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하게도 노래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스타 감독에 스타 캐스팅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이 영화를 뮤지컬로 팔거나 음악과 가사를 썼던 천재 스티븐 손드하임의 이름으로 광고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손드하임은 <폴리즈> <어 리틀 나이트 뮤직> 같은 작품들을 통해 기존의 장르를 지적인 방식으로 요리하는 것으로 뮤지컬계에서도 높은 평판을 누려왔다.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한창 대중적인 오락으로 잘나가던 때에 경력을 시작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의 가사를 썼고, <포럼에 가는 길에 생긴 재미있는 일>(1961)의 음악과 가사를 썼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팝 음악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자 손드하임은 좀더 고급 관객에게 인기를 누리게 된다.
요즘은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기 위해 뮤지컬영화들이 만화에 음악을 곁들이거나(<라이온 킹>처럼), 복고적인 캠프 분위기를 살리거나(<헤어스프레이>처럼), 쇼비즈니스 세계에 기초한 영화를 만들거나(<드림걸즈>), 또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블록버스터급 뮤지컬들을 영화화(<오페라의 유령>)한다. 그런데도 <오페라의 유령>의 박스오피스 성적은 미국보다 일본이나 유럽에서 더 높았다.
대화, 음악, 가사가 하나의 장르로 섞인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항상 인위적인 예술 형식이었으나 40, 50년대의 황금기에는 일반 관객에게도 너무나 인기가 좋아서 많은 수가 영화로 만들어졌다(<오클라호마!> <남태평양> <마이 페어 레이디> <사운드 오브 뮤직> 등). 그러나 예술계에 시작된 리얼리즘의 영향에 강타당한 현대의 서구 관객은 갑자기 노래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주인공들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말과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오락 장르는 2천년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희비극 전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복합 예술은 20세기 중반까지 대중적인 예술 형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최근 서구의 문화는 드라마, 음악과 춤 사이에 인공적인 벽을 세워버렸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중요한 감정적 손실이다.
몇주 전 파리에서 나는 슈테판 카잔드장이 감독한 <모던 러브>를 보았다. 카잔드장은 <아메리칸 파이>류의 청춘 섹스코미디 <섹시 보이즈>를 만들었다. 매력적이고 전형적인 프랑스 애정영화 <모던 러브>는 주인공 중 한명이 감독한 뮤지컬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들은 정통 뮤지컬이라기보다 전통적인 뮤지컬에 대한 헌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고한 자크 드미가 만든 <쉘부르의 우산>이나 <로슈포트의 아가씨들> 같은 프랑스 뮤지컬영화들이 무척이나 인기있었던 것이 불과 40년 전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마틴 왈즈가 감독한 <봄의 멜로디>라는 독일 신작은 전형적인 베를린 애정영화지만 주인공들이 지나간 70년대 독일 대중가요의 대목들을 짧게 부르는 장면들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아이로니컬하고 포스트모던적이지만 완전히 새롭게 작곡된 곡들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뮤지컬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오래된 뮤지컬의 전통은 음악, 춤과 드라마가 과장된 감정과 화려한 의상들과 어우러지는 발리우드영화에 아직 살아 있다. 이 전통은 인도의 관객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구 관객은 발리우드영화를 오직 캠프적인 오락거리로만 받아들인다. 다시 한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문화비평가들은 문화의 ‘전 지구화’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하지만, 사실 지역문화들은 천천히 서로 멀어져가고 있다. 특히 아시아와 서구문화 사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