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보다는 은인이다. 간호사, 선교사 출신의 선량하며 매력적인 그녀는 지독히도 폐쇄적이던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누군가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해도 비명을 질러대던 그는 걸음마를 떼듯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나른했던 시골 마을은 새로운 이웃을 맞이하며 모처럼의 활기로 가득 찬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바로 그녀가 피와 살이 아닌 실리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는 ‘리얼 돌’(Real doll: 실제 사람 크기의 인형)과 연인이 된 남자, 라스의 이야기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그칠 법한 설정을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동화로 완성한 것은 수줍고 예의바른 미소로 믿음을 전염시키는 라스. 아마도 <노트북>의 애절한 순정남으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그 얼굴, 바로 라이언 고슬링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고슬링은 열세살이던 1993년 디즈니의 어린이 버라이어티쇼 <미키 마우스 클럽> 공개 오디션에 발탁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하이틴 스타의 등용문으로 통했던 이 프로그램에는 당시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함께 출연했고, 이들이 노래와 춤 재주를 실컷 뽐내는 동안 딱히 내세울 만한 장기가 없던 고슬링은 드문드문 쇼에 출연해 연기를 했다. 실상 “일보다는 디즈니랜드 무료 입장권으로 롤러코스터 타는 것”에 더 관심을 쏟던 고슬링은 언제나 제작진의 골칫거리였고, 심지어 “섹스 이야기로 동료 출연진들을 오염시켰다”는 이유로 엄중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나를 앞에 놓고, ‘너는 디즈니에 맞지 않는다(You are not Disney Material). 한번만 더 아이들에게 섹스 이야기를 했다가는 쇼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십대 남자아이의 머릿속에 달리 뭐가 들어 있었겠는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친구들을 오염시켰다.”
확실히 고슬링은 디즈니의 틀에 들어맞을 재목은 아니었다. 2000년 <리멤버 타이탄>의 작은 역할로 첫 테이프를 끊은 뒤, 2001년 <빌리버>의 주연 자리를 곧장 꿰찬 고슬링은 신나치주의에 빠져드는 유대인 청년을 연기하며 비평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키 마우스 클럽> 에피소드 200편 정도에 지겹도록 출연하며 훈련은 충분히 했다. 하지만 <빌리버>는 돈을 안 받고도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해줬다.” 머리를 빡빡 밀고 관객을 위협적으로 노려보던 청년은 이듬해 <머더 바이 넘버>의 10대 사이코패스로 다시 한번 서늘한 살의를 품었다. 그리고 2004년, “날 로맨스영화에 쓸 생각을 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출연한 <노트북>은 그의 경력에 결정적인 탄력을 제공했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해 1년 동안 365통의 편지를 쓰는 고슬링은 로맨스소설을 한장 한장 베껴놓은 듯한 신파를 가슴을 후벼파는 애절한 멜로로 가공해놓았고, 관객은 가파른 스타덤에 그를 올리는 것으로 보답했다. 자연히 엇비슷한 로맨스영화들이 앞다투어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고슬링이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50만달러짜리 저예산영화 <하프 넬슨>.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인권운동의 정신을 설파하면서도 화장실에 숨어들어 마약을 흡입하는 중학교 교사를 고슬링은 고결함과 천박함이 뒤엉킨 혼란 그 자체로 그려냈고, 27살의 나이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뉴욕타임스>가 “동세대 최고의 배우”(best actor of his generation)로 치켜세울 정도로 평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라이언 고슬링의 필모그래피는 결코 길지 않다. 또 <노트북>을 제외한다면 흡족한 수익을 올린 영화를 꼽기 힘들 정도다. “정말 많은 시나리오를 읽지만, 진심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작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그는 작품 선택에 까다로운 배우로 악명이 높다. 대신 한 작품, 한 작품이 필모의 덩치를 불리는 대신 배우로서 고슬링의 가치를 깊게 만든다. “엄청나게 흥행하는 영화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3년 정도가 지나면, 사람들은 그게 뭐였는지 기억도 못한다. 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영화를 하고 싶다.” 그의 차기작은 다큐멘터리 <프리드먼가 사람들 따라잡기>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앤드루 재러키 감독의 인디영화 <All Good Things>이다. “그럴싸한 근육이나 뽐내는 마티니 아이돌은 질색”이라는 고슬링다운 선택. 나이 스물아홉, 한때 디즈니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소년은 이제 그 고집만큼이나 근사한 30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