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봅시다]
[알고 봅시다] 스페인 격변의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하다
2008-04-03
글 : 최하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궁중화가로 명성을 떨친 고야의 시선을 빌린 <고야의 유령>

영화 <고야의 유령>은 신부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야심가와 종교재판의 광풍에 스러져간 여인의 이야기다. 밀로스 포먼이 탄생시킨 이 허구의 인물들을 지켜보는 관찰자는 바로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스페인의 궁중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불후의 예술가인 동시에 스페인 사회를 생생한 이미지로 기록한 역사의 증인이었다. 혁명의 열기와 전쟁의 포화가 휘몰아치던 격변의 시대를 고야의 눈을 통해 살펴보자.


<고야의 유령>

1. 무명의 견습생에서 궁중화가로

고야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시골 마을 후엔데토도스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금의 대가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대성당을 드나들던 그는 고향 선배였던 궁중화가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사라고사 성당 벽화인 <신의 이름을 찬미하는 천사들>(1772), <순교자들의 성모>(1780∼82) 등으로 상류층의 이목을 끈 뒤 주로 고관들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은 고야는 1788년 카를로스 4세의 등극과 함께 궁중화가의 자리에 오른다. 자연히 ‘어용화가’라는 비아냥거림이 뒤를 따라다녔지만, “예술의 자유는 경제적 자립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던 고야는 궁중의 녹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부패한 군주제를 비판하던 예술가들의 단체인 ‘일루스트라도스’ 일원으로 활동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1800) 왕궁 접견실 앞에 무리지어 있는 왕족들의 초상. 완성된 작품을 보고 카를로스 4세는 흡족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 평론가가 “복권에 당첨된 빵집 일가족 같다”고 표현했을 만큼 고야가 묘사한 왕족들의 모습은 기품과는 거리가 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고야가 그림에 교묘한 비아냥거림을 담았다고 해석했다.

2.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을 풍자하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점화되면서 유럽은 일대 파란에 휩싸였다. 전통적인 가톨릭 군주제를 고수하던 스페인의 귀족들은 혁명의 파고가 이베리아반도에 다다를까 전전긍긍했고, 권위에 대한 불안을 ‘이단’을 색출하는 종교재판으로 수습하려 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자유롭게 출입하던 고야는 궁중화가가 된 지 10년 만에 수석 궁중화가로 임명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왕궁의 울타리 밖에서는 축적한 자금을 이용해 날카로운 비판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80여점의 풍자판화로 이루어진 <변덕> 연작. 최상류층부터 밑바닥까지, 온갖 사회의 악행들을 우화적인 그림으로 풍자한 고야는 특히 귀족과 성직자를 당나귀와 원숭이, 염소 등으로 묘사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변덕> 연작 중 <Devota Profesion> ‘맹세를 바치다’라는 제목의 이 판화는 성직자들을 기괴한 괴물로 그리고 있다. 부의 축적과 권력 다툼, 종교재판에만 열을 올리던 교회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로, 공개된 지 이틀 만에 종교재판소의 명령으로 철수됐다. <변덕> 연작을 놓고 이후에 보들레르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는 기괴한 공포이며 너무나 탁월한 예술”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3.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다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자신의 동생(아들??)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좌에 앉히면서, 스페인 국민들은 독립을 외치며 봉기한다. 이어 6년 동안이나 이어진 전쟁. 스페인과 프랑스가 죽음과 기아를 양산하며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던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하는 동판화 연작 <전쟁의 참사>(1810~20)를 제작했고, 프랑스 군대가 마드리드의 저항군을 잔악하게 학살한 1808년 5월의 사건을 <1808년 5월2일>와 <1808년 5월3일>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더불어 이 두편의 작품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잔학함의 가장 통렬한 고발로 평가받고 있다.

<1808년 5월3일>(1814) 마드리드가 프랑스군 점령하에 놓이면서 저항군에 가담했던 시민들은 두손을 뒤로 묶인 채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고야는 일렬로 늘어선 프랑스 군인들이 무방비 상태인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화면 가운데 등불을 배치해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의 표정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고야의 작품으로,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과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인간의 어리석음에 절망한 말년

1813년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스페인은 주권을 되찾지만, 전쟁을 통해 불타오른 민족주의의 열기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왕정복고라는 결과를 향한다. 1814년 왕좌로 돌아온 페르디난드 7세는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정착을 꿈꿨고, 마드라드에 입성하는 동시에 의회를 해산해버린다. 청력을 거의 상실한 말년의 고야는 짙은 좌절감에 빠져들고, “귀머거리의 집”으로 알려진 전원주택을 구입해 그곳의 담벼락에 거대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른바 <검은 그림>으로 알려진 이 유화들은 끊이지 않는 악과 인간의 치유 불가능한 어리석음을 탄식하고 있다. 고야에 의해 명명되지 않은 채 남겨진 14점의 작품들은 그의 사후, 집을 사들인 델랑헤르 남작에 의해 보존됐고 이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작품을 사들이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검은 그림> 연작 중 <Saturno devorando a su hijo>(1819) 왕좌를 지키기 위해 친자식들을 삼켜버렸다는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 다만 고야는 사투르누스를 자식이 아닌 한 여자의 몸뚱이를 탐식하는 괴물로 그렸다. 이는 여성을 파괴하는 남자들의 탐욕에 대한 은유 혹은 끝내 파멸에 이르고야 마는 인간성에 대한 절망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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