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래, 그녀보다 내가 더 겁쟁이일지도
2008-04-04
글 : 김현진 (칼럼니스트)
겁쟁이라서 보는 사람이 못 견딜 정도로 착한 <27번의 결혼 리허설>의 캐서린 헤이글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캐서린 헤이글은 나이 들수록 어딘가 애슐리 저드를 닮아가는 것 같다, 뭐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본 영화였지만 <27번의 결혼 리허설>은 좋은 로맨틱코미디였다. 사랑에 빠진, 능력 있고 착하지만 외모가 조금 수수하고 주눅 든 30대 여성을 그릴 때 흔히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써먹는 과장과 희화화를 비교적 적게 사용하고도 공감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작은 수확이다. 이 사단은 전작인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에서 귀엽고도 쓸쓸한 남자 버진을 그릴 때 해낸 솜씨를 이번에도 잘 발휘하였다. 전작의 주인공보다 <27번의…>의 여주인공은 나이도 젊고 직업도 훨씬 좋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뛰어났지만 그 남자나 이 여자나 참 착한 것만은 동일하다. 바로 그거였다.

보는 내내 내 속을 뒤집어지게 한 것, 그 착함, 너무너무 착함, 아 제발 제인 제인 제인, 그렇게 살지 마, 하고 애걸복걸하고 싶을 정도로 여주인공 제인은 착했다. 이 여자를 미워하면 악마다. 그 정도로 착하다. 친구 결혼식에 들러리만 서주는 것이 아니라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해주는 여자, 아무리 추악한 들러리 드레스를 안겨줘도 군소리 않고 활짝 웃어주는 여자 혹시 친구 하나라도 마음 상할까봐 들러리로 더블 부킹된 결혼식에서 택시를 전세 내서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완벽한 결혼식을 만들어주려고 노심초사하는 여자. 얼마나 착한지 그 착함을 철석같이 믿고 상사가 세탁물 심부름을 시킬 정도로 착한 여자. 옛날부터 찜했던 남자를 동생이 건드리거나 말거나 멍하니 앉아서 토마토 케첩이라도 팍 엎어 그거 방해할 수단조차 못 부리는 여자. 멀끔하게 생긴 기자 놈이, 심지어 같이 잠까지 잤는데, 허락도 안 받고 내 비참한 이야기를 다 써대는데도 결국 그것도 화 못 낸 여자.

열정과 냉정 중에 하나 고르라면 나는 1%의 오차도 없이 열정쪽인 여자다. 한번 열받아서 돌아서면 순식간에 냉정으로 돌아서지만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성질이 불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제인보다는 그녀의 살짝 맛간 단짝 친구 케이시라든가 사방팔방 나대기 좋아하는 동생 테스쪽에 가깝다. 오랫동안 좋아하는 남자를 상사로 모시면서 그의 사회적 아내처럼 행동하면서 온갖 시중을 다 들고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가슴 설렌다?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일주일 내에 결판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 채여도 상관없다. 일단 지르고 보는 거다. 쪽팔린 것보다 지루한 게 더 싫다. 내 동생이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걸 봤다면? 시뻘건 칵테일이라도 걔가 입은 반짝거리는 원피스에 뒤엎은 다음 화장실로 끌고 가서 가둬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내 동생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기도 전에 결국은 참지 못하고 애초에 다 불어버렸을 것이다. 당신이 좋다. 맘에 든다. 자고 싶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다. 딴 여자랑 자면 죽여버리겠어. 딴 여자보고 웃으면 죽여버리겠어. 그 좋지 못한 성질 덕에 내 남자를 누가 좋아하는 게 차라리 맘 편하지, 혹시 남의 남자를 좋아하게 될 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아찔하다. 그래도 대외적 페미니스트 체면이 있지 도둑고양이 짓 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좋아하게 되어버린다면 물불을 과연 가릴까. 절대 남의 거 보지 말아야지.

이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제인보고 아 너무 착해, 하고 짜증내는 이유는 사실 그녀와 나는 겁쟁이라는 면에서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겁쟁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처럼 한심하게 착하게 굴까봐 지레 못되게 구는 내가 더 겁쟁이다. 그의 세탁물 나부랭이 들고도 이딴 거 말고 너를 원한다고 말 못하는 제인도 겁쟁이지만 내가 이렇게 성질이 불같은 이유도 지레 누가 내 것 뺏어갈까봐 덜덜 떠는 겁쟁이이기 때문에. 한심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한심하기 때문에, 여자란, 연애란 모두 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는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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