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니치와.” 인터뷰 장소로 잡은 호텔로 들어가는 길. 회전문 앞에 서 있던 벨맨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난데없이 들린 일본어에 그녀의 큰 눈이 더 또렷한 동심원이 됐다. “우히힛, 제가 일본 사람처럼 보였나봐요.” 사건의 재구성. 평소 일본어를 비롯해 영어, 중국어 등등 몇 가지 외국어 인사말을 장전해놓았을 벨맨은 그곳에 서서 얼굴만 봐도 국적을 감별할 수 있는 감식안을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조그맣고, 눈은 크고, 드라마 <아일랜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썰어서 세 접시는 나올(만큼 두꺼운) 입술”을 가진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는 그녀가 누구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는 단박에 그녀의 국적을 일본이라고 판단했고 자신있게 인사했다. 오로지 일에 열중한 한 남자의 착각이다. 그런데 그의 착각에는 김민정도 책임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희한하게도 김민정은 언제나 숨은 배우다.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이 세상에 등장할 때야 비로소 ‘아, 김민정이 있었지’라고 생각한다. 마치 서랍 구석에서 한장의 옛 사진을 발견한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만난 그녀로부터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곤 했다. 드라마 <꽃피고 새울면>에서 새엄마인 김혜수를 무시하던 표정의 김민정, <고독의 문>에서 큰 눈을 애써 깜빡이지 않으며 시각장애인을 연기했던 김민정 혹은 수많은 아동속옷 케이스를 장식했던 김민정. “하하하, 아이고. 난 몰라. 그거 시즌별로 찍어서 진짜 많아요. 여름에는 모시메리 입고, 겨울에는 보온메리 입고 그랬는데. 우히힛.”
혜석이의 얼굴
드라마 <천국보다 낯선>을 끝낸 뒤 <뉴하트>까지 그녀에게는 약 1년간의 틈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갑자기 큰 파도가 몰아쳐” 그녀를 휩쓸고 갔다. 6년씩이나 함께했던 소속사를 옮긴 건 가장 큰 변화였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하나가 변하니까 갑자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졌어요.” 뒤이어 혜석이라는 또 다른 파도가 몰아쳤다. 혜석으로 분한 김민정은 뭔가를 작정한 듯 보였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그동안 드러냈던 다양한 표정을 한꺼번에 전시한다. <발레교습소> 수진처럼 선머슴 같기도 하고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노민정처럼 귀엽고 엉뚱하며, <패션70s>의 준희처럼 목표를 향해 부서지고 <라이벌>의 부잣집 딸 채연처럼 도도했다. <텔미>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에서 아역 시절의 그녀까지 떠올렸다면 억지일까. 하지만 그녀는 그처럼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혜석이 마뜩지 않았다. “사실 캐릭터를 보고는 안 하려고 했어요. 이전에 만났던 캐릭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부잣집 딸이고 도도하고 성깔있고. 오히려 저는 은성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이전보다 훨씬 더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은 건 ‘의사 가운’이었다. 머리는 질끈 묶고 화장도 거의 안 하고 눈 밑에 다크서클을 그리며 사는 의사. 그리고 그녀가 입은 지저분한 가운. 대부분의 전작들에서 어느 한 군데 어긋나지 않는 메이크업으로 등장했던 그녀는 혜석을 통해 그들과의 사이에서 금을 긋고자 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변화의 시점이었던 것이다.
20년, 배우의 얼굴
<뉴하트>가 종영한 지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요즘 그녀는 지난 몇달 동안 겪어온 격렬한 변화의 후유증 탓인지 미열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상하게 괜히 복잡해요. 드라마가 끝났다는 섭섭함도 아니고 차기작을 걱정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녀요. 이게 정말 쉽지 않은 직업이구나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어요.” 자신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하는 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아역 시절부터 연기를 해온 그녀는 분명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수만 가지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민정은 여섯살이었던 1988년 <미망인>이란 단막극을 통해 데뷔했다. 그러니 올해가 20년째다. 어린 시절부터 (본인도 인정할 정도로) 소문난 예쁜 아기였던 탓에 한 아동복 모델 콘테스트에서 1등을 했고 그게 CF로 이어지자 드라마로 연결되고 영화의 손짓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왔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그녀가 떠올리는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무도 없는 세트장 안에서 혼자 감정을 잡고 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촬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는 마냥 즐거웠어요. 일단 덜 들리고 덜 보이니까요. 어떤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죠. 그랬는데, 어느 순간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나와 어울려 보이더라고요. (웃음)”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들리고 더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냥 즐거웠던 아이는 종종 우울해지곤 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랜 경험에서 나온 연륜이 아니라 “나이도 어린 애가 아는 척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바보같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는 정말 힘들고, 그렇다고 안다고 이야기를 하려니 괜한 소리를 듣고. 그래서 저는 빨리 나이를 먹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보통의 아역배우들이 그러하듯 일부러 나이를 먹지 않았다. 아역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일부러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노출을 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의 성장속도에 캐릭터를 맞춰가며 살아왔다. “어차피 내 얼굴은 동안인데, 그렇게 해봤자 갑자기 저한테 여자 냄새가 날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 같아요.”
10년 뒤의 얼굴
이제 김민정은 또다시 잠시 틈을 가질 참이다. 차기작이 결정되면 지금처럼 “잡스러운 고민을 할 겨를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당기지 않는 작품을 서둘러 잡을 생각은 없다.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더 솔직한 것 같아요.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고 멋있게 말하면 좋겠지만, 이제 나이가 나이라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것 같고. (웃음)” 그녀는 “배우로서의 꿈이 점점 거창해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끝이 어딘지 몰라도 일단 가보고 싶을 뿐이란다. 그래서 앞으로 20년 뒤의 모습까지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저 막연하게 10년 정도 뒤에는 “주름도 있고, 원숙미도 있는 멋진 여배우”가 되었으면, 거기에 더해 “얼굴 안에 많은 게 담겨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저를 가장 기쁘게 하는 말이 있어요. 언뜻 보면 되게 세보이는데, 웃으니까 안 그런다. 혹은 그냥 귀여운 줄 알았는데, 묘한 느낌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날아갈 것 같아요.” 그녀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우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