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여명, 진혜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2008-04-10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연의 황후>의 배우, 여명과 진혜림

지난 3월 말. <무간도>의 여의사와 <첨밀밀>의 순박한 청년이 한국을 방문했다. 진혜림과 여명. 둘은 가수와 배우로 활동한 기간이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홍콩의 대중스타. 진혜림에게는 <친니친니> <냉정과 열정 사이>, 여명에게는 <타락천사> <유리의 성> 등 대표작으로 떠올릴 만한 영화도 꽤 많다. 그럼에도 <무간도>와 <첨밀밀>이라는 인장은 쉽게 거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신하고 차가운 여성미와 순수하고 우직한 일편단심. 춘추전국시대 여인의 몸으로 천하를 통치하게 된 연비아와 암살단에 공격받는 그녀를 거두는 의사 난천이라는 조합과는 잘 연결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연의 황후> 속 두 사람은 꽤 귀여운 한쌍이다. 황후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말괄량이 공주와 자연을 벗삼아 전쟁을 멀리하는 망국의 무사 혹은 사랑을 위해 속세를 뒤로하는 뜨거운 여인과 그 여인이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는 연인. 그간의 이미지와 여기 더해진 또 다른 한겹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다.

<연의 황후>는 무술감독으로 유명한 정소동의 연출작이다. 시대극과는 아예 인연이 없었던 진혜림이며, 액션 특히 무협과는 그리 궁합이 좋지 않았던 여명이 택할 만한 쉬운 패는 아닐 거라 여겼다. “홍콩영화의 선배세대로서 지금까지 꾸준히 경력을 쌓고 계신 분이다.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연의 황후>의 제작사와 나는 <첨밀밀> <유리의 성> <쓰리> 등을 함께했다. 진혜림 역시 <친니친니>를 이 회사에서 찍었다.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도 우리와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영화를 만드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앞세운 여명이 현실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군사훈련에 임하는 공주의 독한 면모를 위해 촬영 전 “3개월 동안 칼, 검술, 궁술, 말타기, 검투, 레슬링 등 격투기 훈련을 받았”다는 진혜림의 솔직한 속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천녀유혼> <동방불패> 등 정소동 감독님은 여배우를 굉장히 예쁘게 찍어주시지 않았나. (웃음)” 그리고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기구를 띄워 하늘을 나는 난천은 연비아보다도 액션이 덜한 캐릭터다. 정통파 액션을 구사하는 견자단이 연비아를 호위하는 무사로서 테스토스테론을 발산하는 동안, 여명은 이와 대조되는 방식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덕분에 영화에서 단 한번 합을 겨루는 여명과 견자단은 촬영기간 내내 계속 엇갈렸다. “촬영을 위해 외딴곳에 자리한 호텔에 묵게 됐을 때, 견자단이 나에게 ‘어이, 여기 모기가 너무 많잖아, 딴 데 가자’고 말을 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살충제를 전해주곤 했다”는 여명의 장난스러운 회고처럼 둘은 꽤나 가까운 사이. “그는 근육질의 액션배우라서 매일 적당량의 단백질 섭취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촬영 중인 곳은 너무 외져 고기를 먹으려면 세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도시까지 나가야 했다. 내가 멜로장면을 찍을 때 그는 잠을 줄여서라도 고기를 먹으러 가곤 했는데, 한번은 홍콩의 지인이 나에게 전화해서는 ‘견자단이 너랑 영화 찍는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어떻게 지금 그가 여기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하. 그 정도로 그가 노력했기 때문에 <연의 황후> 마지막에 그렇게 멋진 액션이 가능했던 거다.” 액션스타의 힘겨움을 담은 에피소드를 농담삼아 전하고는 친구의 공을 밝히는 걸 잊지 않는 세심함까지. 이 남자, 본디 터프함과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어 인사 몇 가지는 언제든 가능해 보이는 진혜림과 여명, 두 사람은 모두 한국과 인연이 깊다. <대장금> 주제가를 중국어로 불렀고, 가수로서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진혜림은 방한 일정 내내 “떡볶이 너무 맛있어요”를 반복했고, 스케줄이 맞지 않아 무산됐지만 지난해에는 박희준 감독(<천사몽>)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전달받아 출연을 검토한 적도 있다. 한국어를 배운 적 있는 여명은 한국에서의 3일간을 정우성과 함께해 화제가 됐다. 오래전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정우성에 대해 여명이 말한다. “좋은 친구는 하늘이 주는 것 같은데, 정우성이 그렇다. 중국의 여러 도시를 비롯해서 일본, 미국 등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식사를 함께했다.” 우리 모두 그들의 친구가 된 느낌으로, 각기 30대의 한가운데와 40대를 지나고 있는 둘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가수와 배우 활동을 완벽하게 병행했던 과거에는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제는 두 분야의 스케줄을 명확하게 분리했기 때문에 균형이 맞춰져 있다.” 이미 10년 전에 홍콩 최고가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진혜림의 무대와 스크린을 누비는 이중생활은 당분간 견고할 듯 보인다. 여명의 진짜 매력은 멜로 연기에 있다고 믿는 팬들은, 아쉽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최근 10년간 멜로영화를 못한 건 사실이지만 기회를 보고 있다. 연애처럼 영화 역시 기다림이 필요하다.”

“(손가락 한 마디를 보이며) 쪼끔, 쪼끔, 쪼끔, (두손으로 원을 그리며) 많이.” 정우성과 어떤 말로 이야기하느냐는 질문에 “영어, 한국어, 광둥어, 베이징어, 보디랭귀지도 있다”고 답한 여명이 또렷한 한국어로 덧붙인 말이다. 하늘에 빛나는 별의 광채가 아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스타라니. 봄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서울 하늘을 나직하게 뒤덮은 그날 오후. 우리와 그들의 ‘많은’ 인연 역시, 또다시 ‘쪼끔’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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