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줄스 다신] 범죄를 가장 먼저 재구성한 남자
2008-04-09
글 : 주성철
3월31일, <네이키드 시티> <리피피>의 감독 줄스 다신 97살의 일기로 눈감아

2001년 베를린영화제,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 기자회견장에서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법에 대한 질문과 찬사가 쏟아지던 가운데, 한 기자가 “그런 건 이미 당신 선배들이 다 했던 것 아니냐”고 비꼬았다. 그러자 소더버그는 “줄스 다신의 <네이키드 시티>를 말하는 거죠?”라고 웃으며 답한 뒤, 그는 가장 존경하는 감독 중 하나가 줄스 다신이라며 그의 또 다른 작품 <리피피>에 오마주를 바치는 가벼운 강탈 영화도 하나 만들 것이라 했다. 그 강탈 영화가 바로 <오션스 일레븐>(2001)이었다. 주도면밀한 강탈 현장을 세심하게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리피피>는 <오션스 일레븐>은 물론 저 멀리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1)부터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2004)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영화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오리지널이 드문 시대, 그렇게 또 하나의 ‘원본’ 감독이 사라졌다.

지난 3월31일 줄스 다신 감독이 향년 97살을 일기로 아내의 고향이자 말년의 정착지였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누아르영화 <리피피>(1955), 코미디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1960) 등으로 유명한 그는 4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르는 미국사회의 격변기 속에서 현실감 넘치는 묘사와 지적인 필름누아르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이후 존 카사베츠 등의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할리우드가 ‘매카시 열풍’에 신음하던 1952년, 할리우드의 공산당 분자로 지목돼 블랙리스트에 올라 미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감독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정치적 격동기와 맞물리지 않았다면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 못지않은 이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지금 필모그래피만으로도 충분히 재평가받아야 할 이름 중 하나다.

1911년 미국 코네티컷 미들타운에서 태어난 줄스 다신은 30년대에 뉴욕에 있는 극장과 라디오에서 극본을 쓰며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유대교 사회주의 연극인 모임의 일원이었던 그는 40년대에 할리우드로 가서 RKO영화사에서 근무했고, 8개월 뒤에는 MGM영화사로 옮겨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연출부로 일했다. 데뷔 초기에는 멜로영화와 코미디영화를 주로 만들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찰스 로튼이 주연을 맡은 오스카 와일드 원작 판타지코미디 <칸타빌레 고스트>(1944)를 시작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나갔다.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40년대 말부터였다. 이전 필모그래피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 같았던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브루트 포스>(1947)는 감옥을 무대로 한 스릴러영화였다. 이듬해 만든 <네이키드 시티>(1948)는 <리피피>와 더불어 줄스 다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뉴욕 경찰청의 형사 댄(배리 피츠제럴드)은 한 여자의 의문사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특별한 동기없이 단순한 스릴을 위해 그 여자를 살해한 두 용의자를 찾아낸다. <네이키드 시티>는 당시 뉴욕시의 차가운 풍경과 더불어 마치 뉴스릴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실제 범죄현장을 재현한 것 같은 충격을 줬다.

하지만 줄스 다신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7년 10월 ‘영화계의 좌파 침투에 대한 조사’를 명목으로 매카시즘의 테러가 할리우드를 잠식해가기 시작했고, 그는 안타깝게도 <밤 그리고 도시>(1950)를 만든 뒤 할리우드를 등져야만 했다. 프랑스로 이주한 그가 5년여의 공백 뒤 고몽영화사에서 만든 영화가 바로 <리피피>다. 토니(장 세르베)는 파리 중심가의 보석상을 털기 위해 보석상의 경보 시스템을 그대로 세트로 만들어서는, 동료들과 함께 스톱워치로 시간도 철저히 계산하면서 모의강도훈련을 한다. 쥐죽은 듯 고요하게 진행되는 강탈신 자체만 30분 넘게 이어지는데 이처럼 <리피피>는 강탈장면을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다룬 기념비적 영화로, 일찌감치 소더버그에 앞서 프랑수아 트뤼포가 ‘지금껏 내가 본 최고의 필름누아르영화’라고 찬사를 바친 바 있다. 게다가 그 세트를 완성한 이가 바로 마르셀 카르네는 물론 루이스 브뉘엘과도 함께 작업했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알렉상드르 트로네였다. <리피피>는 지난 2000년에 재개봉되기도 했는데 당시 이례적으로 뉴욕비평가협회 특별상을 받기도 했고,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에는 30분 가까운 줄스 다신과의 인터뷰가 수록돼 있다.

비록 미국을 떠나긴 했지만, 이 시기 그의 영화들은 마치 브뉘엘의 멕시코 시절과 같은 독특한 매력을 보여줬다. 이때 만난 그리스 출신 배우 멜리나 메르쿠니를 주인공으로 <일요일은 참으세요>(1960), <페드라>(1962)를 만들어 좋은 평가를 얻었다. 멜리나 메르쿠니는 이들 영화를 통해 ‘그리스의 여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두 사람은 1966년 결혼에 이르렀다. 더구나 줄스 다신은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감독상 외 여러 부문 후보로도 올라 다시 미국과 조우하기도 했다. 늘 ‘미국이 그립다’고 말하던 그였기에 무척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을 떠나 프랑스를 거쳐 그리스에 이르게 된 그는 이후에도 <2개의 써클>(1980)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다국적 자본으로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그보다 앞서 1994년 뉴욕에서 암으로 세상을 뜬 멜리나 메르쿠니는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사별 뒤 줄스 다신은 최근까지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엘긴 마블스)을 아테네로 송환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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