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결코 시작되거나 끝나길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차이들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머리없이, 꼬리없이 나타난다. 그것의 (무)유한성은 완전성에 관한 모든 개념을 전복하고 그것의 틀은 총체화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것이 가져오는 차이들은 구조들의 유희, 표면들의 활동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음색과 침묵 속에도 있다.”-트린 T. 민하, <여성, 원주민, 타자>(Woman, Native, Other) 중에서
베트남 태생 여성인 트린 T. 민하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세네갈을 거쳐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독립영화감독이자 작가, 이론가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드는 그녀의 작품들은 완결된 서사와 매끄러운 편집, 균질적인 사운드를 거부한다. 그녀가 보기에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서사나 규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내레이션, 서사의 틈을 메워주는 음악은 서구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부산물이다. 다시 말해 트린 T. 민하의 실험적이고 비관습적인 형식은 식민주의를 경험한 제3세계 여성의 정체성에 근거한 것으로 이 복합적인 정체성을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에 의존하여 재현하려는 기존의 시선에 대한 저항의 태도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이야기로 요약하거나 시작과 끝을 찾아 매듭지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며 대상에 대한 일관되고 이해하기 쉬운 기록은 애초 불가능하다. 이번 다큐플러스 인 나다의 아시아 여성 다큐 시리즈에서는 이미 몇 차례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트린 T. 민하의 초기작부터 2000년대 이후 작품들까지를 다섯번에 걸쳐 선보일 예정이다.
<재집합>(1982)은 세네갈의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인데,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서구 기록영화에 대한 비평이다. 트린 T. 민하는 여기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다큐멘터리 전통에 의문을 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류의 수많은 다큐들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온 이국적 풍경에 대한 매혹과 소비로부터 의도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서구의 인류학적 시선을 해체시켜 트린 T. 민하식으로 재조립한 결과물이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세네갈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규정하던 기존의 틀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에 가깝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동일한 장면의 반복, 파편화된 편집, 해석되지 않는 언어와 행동, 이질적인 음악을 뒤섞으며 타자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시선이나 호기심으로 층층이 쌓아올려지는 대신 납작하게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느낌을 준다. 한편, 트린 T. 민하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1989)은 베트남 여성들의 정체성, 기억, 문화 등에 대한 기록이자 그러한 기록의 형식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영화다. 식민지와 오랜 전쟁을 경험한 베트남 여성들의 저항의 역사는 재연출된 인터뷰들을 통해 어색한 영어로 들린다. 하지만 이 영화의 관심은 그녀들이 고백한 내용을 부각하며 그녀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백의 언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베트남의 전통 무용, 음악과 시적인 대사, 영상이 어우러지며 베트남 여성의 역사‘들’에 대한 독창적이고도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기록을 완성한다.
<사랑의 동화>(1996)는 ‘키유 이야기’(the Tale of Kieu)라는 베트남의 신화를 현대 미국의 삶 속으로 끌어와 재해석한 영화다. 미국과 베트남이라는 두개의 문화, 경제적인 필요성과 내적인 욕망 사이에서 끈질기게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여자의 이야기는 비전문적인 배우들의 연기, 강렬하고 공격적으로 이야기에 침입하는 음악, 현실과 상상의 과감한 교차 등을 통해 사랑 이야기의 진부한 틀을 벗어나 여성의 정체성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밖에도 전통과 근대, 과거와 현재가 혼종 된 현대 일본의 시간을 다양한 기법으로 탐색한 <4차원>이나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에 바치는 꿈결 같은 디지털 환상 여행, <밤의 여로>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