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수평적이며 비혈연적인 유대의 힘
2008-04-10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아오야마 신지의 ‘양부(養父) 3부작’ 중 가장 불균질한 영화 <새드 배케이션>
<새드 배케이션>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죽는다. 아이들은 버려져 삶의 지옥을 목격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멈춘다. 말하기를 멈추었으므로 그들에게 선택은 두 가지다. 세상을 폭파하거나 자신을 폭파하거나. 이건 장르영화가 사랑하는 길이다. 현실을 사는 우리 대부분은 그럴 용기가 없다. 아오야마 신지는 <헬프리스>(1996)와 <유레카>(2000)에서, 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세상의 변방 혹은 황야를 떠도는 아이들의 침묵을 찍었다. 특히 <유레카>에서, 말해질 수 없는 상실과 상처를 흐느끼듯 사무치게 찍었다.

그들이 떠도는 황무지는 불친절하지만 세상과 달리 그들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떠나온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서부극의 낭만적인 황무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는 소멸한 지 오래이고, 황무지는 문명의 피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명에 갇혀 있다. 문명의 포위망은 더욱 확장될 것이고 황무지는 점점 왜소해질 것이다. 여정의 끝에서,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이 소진하면 그들에겐 오직 초라한 죽음이 기다릴 것이다.

<유레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와이(야쿠쇼 고지)는 소녀 코즈에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사와이의 말과 달리 카메라는 그들의 귀로가 아니라 아직 그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산과 들판을 비추며 창공을 비상한다. 점점 작아지는 그들은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소멸해버릴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이 돌아갈 곳이 있을까. 그들이 떠나기 직전 의심 많은 형사의 “당신, 돌아올 거지?”라는 물음에 사와이는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반문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 유레카? 그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사와이의 마지막 대사가 인용된 원전인 <수색자>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시대착오적인 영웅 이산 에드워즈였다. 그는 자신이 더이상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데려가려 하는 조카 데비는 가족의 죽음의 목격과 가족 살해자와의 강제된 결혼이라는 악몽의 시간을 넘어 이제 젊은 영웅 마틴이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유레카>의 인물들이 속한 세상은 다르다. 사와이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고, 코즈에는 마지막 혈육이자 분신과 같은 오빠 나오키마저 형무소로 떠나 보냈다. 그들은 어디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오야마 신지는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혹은 사와이의 마지막 대사를 책임지겠다는 듯이 <새드 베케이션>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어딘가에 모여들고, 그곳엔 그들이 그리워하던 혹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부모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떠돌다가 우연히 그곳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그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화해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혹은 다시 떠날 것인가.

‘양부 3부작’에서 지속적으로 회피되는 친부-친자의 관계

잘 알려져 있듯이 <새드 베케이션>은 <헬프리스>와 <유레카>의 후일담이다. <헬프리스>에서 겐지는 여섯명을 죽이고 자살한 친구 야스오의 장애자 여동생 유리를 떠맡았다. <유레카>에서 끔찍한 살인현장에 있었고 곧 부모로부터 버려진 코즈에는 오빠마저 잃은 채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새드 베케이션>으로 돌아온다. 나중엔 겐지의 왕따 친구(<헬프리스>)이자 코즈에의 사촌오빠(<유레카>) 아키히코도 그곳을 방문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미야 운송회사이며, 겐지의 집나간 어머니 치요코, 그리고 치요코의 현 남편 마미야, 그리고 그들의 보살핌을 받는 또 다른 버림받은 이들(어른/아이)이 있다.

비유적인 의미지만, <유레카>의 사와이도 돌아와 있다. 사장 마미야에게 사와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들과 같은 혹은 그보다 깊은 고통을 체험하고, 비로소 아이들의 침묵을 이해하는, 그래서 그들을 보살피는 어른. 겐지도 이미 사와이 혹은 마미야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헬프리스>에서 버림받은 장애자 소녀 유리를 떠맡았고, <새드 배케이션>에선 밀항 중에 아버지를 잃은 중국인 소년 아춘을 목숨을 걸고 빼돌려 키운다. 버려진 아이들이 돌아오는 곳은 결국 양아버지의 품이다.

세편의 영화를 양부(養父) 3부작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헬프리스>에서 출소한 야쿠자 야스오는 자신을 버린 두목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는 두목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두목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 옛 동료들을 계속 죽인다. 마침내 두목이 죽었음을 알게 되자 자살해버린다. 그에겐 두목이라는 사회적 아버지의 존재 혹은 그에 대한 적대감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였다. <헬프리스>의 겐지, <유레카>의 사와이, <새드 배케이션>의 마미야와 겐지는 불행한 아이들의 양부 되기를 자처한다.

이 3부작에서 이상한 점은 친부-친자의 관계가 계속 회피되거나 생략된다는 것이다. <헬프리스>에서 요양원에 있던 겐지의 친부는 자살해버리고, 야스오의 친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유레카>에서 사와이의 친부는 자전거를 고쳐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사와이를 내보내는 것이 그가 준 도움의 전부다. 코즈에와 나오키 남매의 부모는 짧게 등장했다 어머니는 떠나고 아버지는 죽는다. 사와이쪽이든 코즈에쪽이든 집단살인의 목격이라는 고통을 겪은 자식을 둔 부모의 선택으로는 매우 예외적이 것인데 별다른 설명이 없다.

앞선 두 작품에선 의식하지 못했지만 <새드 베케이션>에서 친부-친자 관계가 하나의 사건으로 다뤄지면서 비로소 그 관계가 뭔가 이상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미야는 사회적 자식들에겐 그토록 온화하지만 반항적인 아들 유스케의 비행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완고한 노인으로 변한다. 일반적인 가족영화에서라면 전형적인 부자간의 불화이겠지만, 3부작을 관류하는 거의 유일한 위안으로서의 양부-양자의 온기와 나란히 놓일 때 친부-친자의 관계는 무성의해 보일 만큼 왜소하거나 상투적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친부와 친자는 서로에게 깊이 각인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혹시 이 이야기의 창작가인 아오야마 신지의 두려움, 그러니까 친부-친자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의 반영일까.

적어도 겐지는 두려워하고 있다. 겐지는 마미야-치요코 부부의 친아들 유스케의 가출을 종용한다.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 치요코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목숨을 걸고 중국 소년 아춘의 양부 되기를 자처한 사람이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부(異父) 동생을 버림받게 만든다는 것. 이건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다. 코즈에는 이것을 정확히 말한다. “부모란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왜 복수하려고 해요?” 심지어 우발적이긴 하지만 겐지는 유스케를 죽인다. 그는 이렇게 복수를 완성한다.

하지만 겐지가 복수심이 아니라 공포 때문에 무서운 행위를 선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스케를 죽이기 전에 그는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유리가 입원한 요양원에 가서 담당 간호사의 임신한 배를 응시한다. 그는 친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혹은 친자를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유스케를 죽일 때, 그것은 친자라는 존재, 혹은 혈연공동체, 혹은 그것으로 환유되는 민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를 찍는 것은 나와 함께 살았던 전후 세대에 대한 추도, 애도 작업이다. ‘전후’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과연 ‘전후’는 끝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벼랑 끝이라는 느낌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전후’는 전쟁 이후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전쟁의 망령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대이다. 민족이라는 공허한 그러나 강력한 명명을 죽이지 않고 민족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의 망령을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1964년생인 아오야마는 그 시대를 망령의 명령으로부터 버림받은 혹은 가출한 아이로 자랐고, 그 쓰라린 방황을 양부-양자의 수평적이며 비혈연적인 유대를 통해 매듭짓고 싶었다.

친모의 거대한 애매함과 양부의 한없는 허약함

그 소망은 <새드 배케이션>에서 더 확장돼, 겐지는 중국인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겐지가 역시 마미야의 사회적 자식인 고토(오다기리 조)와 함께 산에 오르는 장면은 잊기 힘들다. 고토는 이 땅이 하와이에서 뻗어나온 산호초 군락의 지류임을 알려준다. “일본은 그런 것들의 조합일 뿐”이라고 고토가 말할 때, 카메라는 언덕의 초원을 비춘다. 바람을 가볍게 품으며 일렁이는 풀들의 부드러운 반짝임. 세계의 수평성을 향해 열린 이 장면의 무구한 아름다움은 그러나 곧 중단된다. 민족이 자의로 폐기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이 돌아오자 곧 명백해진다. 일본인은 아이를 잘 키울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중국인 야쿠자들은 아춘을 빼앗아간다.

친부는 죽었거나 무기력하고, 양부는 허약하다. 겐지는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아춘을 빼앗기고 요양원의 간호사는 그에게 보호자의 능력이 없다고 판정한다. 마미야는 사회적 자식들을 외부세력(야쿠자)으로부터 보호할 힘이 없으며 이미 노쇠했다(<유레카>의 양부 사와이는 중병으로 신음했다). 그들의 양부-양자 공동체, 혹은 대안의 가족은 언제나 와해의 위기에 놓여 있고, 양자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겐지가 돌아와 확인한 것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양부의 허약함만은 아니다.

그 공동체의 가운데 겐지의 친모 치요코가 있다. 치요코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오즈 야스지로의 여인 하라 세쓰코를 즉각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에 새겨넣은 듯한 미소(그녀는 20여년 만에 아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웃고 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화사한 얼굴, 주문과도 같은 희망의 말들. 무엇보다 가장 일본적이라고 알려진 이미지. 그러나 그녀는 하라 세쓰코의 폐쇄적이고 안정적인 오즈의 소우주에 속해 있지 않으며, 폭력과 강간과 살인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고정된 미소는 아름답고 강인하다기보다 무섭다. 가장 무서운 장면. 또 다른 아들에 의해 살해된 아들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녀는 겐지의 태어날 아이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마미야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 그녀는 다시 웃는다.

하지만 그녀는 괴물이 아니다. 겐지도 마미야도 그녀를 모르고 있다. 실은 아오야마도 그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녀는 애매한 자리에 있다. 그녀는 친자에 대한 집착이 있지만(“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마미야의 양자들을 돌보고 유리를 입양한다. 그녀는 혈연공동체를 지키면서 수평적인 유사가족도 함께 이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녀의 애매함은 무서운 애매함이고 강력한 애매함이다. 그녀가 유스케의 장례를 치르고 수감된 겐지에게 면회 와서 겐지의 아버지가 외도로 유리를 낳았고 그 때문에 집을 나갔다고 말할 때 겐지는 고개를 떨군다.

서사 안에서도 겐지가 고개를 숙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가 복수하려 한 어머니의 가출은 실은 아버지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헬프리스>에서 그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에서 일본 군가가 아니라 <인터내셔널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헬프리스> 안에서라면 아버지는 좌절한 좌파 지식인이었으며 어쩌면 중국인 소년을 양자로 삼으려는 겐지와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 수평적 대안가족을 지키고 있는 건 그 친부를 버린 실은 친부에게 배신당한 친모이다. <유레카>에서 의무로 맺어진 수직적 혈연공동체의 공허와 연민으로 맺어진 수평적 양부공동체는 명확하게 대립했고, 혈연공동체는 민족의 은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버림받은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 앞에는 애매하되 조금도 흔들림없는 친모가 서 있다. 혈연공동체를 파괴하려 한 겐지의 잔혹한 시도는 헛발질이 되었고, 아오야마의 알레고리는 금이 간다. 혈연공동체 혹은 가족과 공허한 명명으로서의 민족의 은유적 연관성은 희미해진다. 치요코라는 여인/어머니의 절대적이고 애매한 존재가 알레고리의 균열을 일으켰고, 아오야마는 그것을 미화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다. 겐지가 친모 앞에 고개 숙일 때, 그것은 그 존재의 무섭고 거대한 애매함에 대한 아오야마의 수긍처럼 느껴진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결말도 그 수긍의 연장이다. 고토를 데리러 온 야쿠자들과 그들을 막아선 회사 식구들 위로 유리의 커다란 비눗방울이 터지며 비가 쏟아지고 그들 모두는 환호한다. 친모의 거대한 애매함 앞에서, 그리고 양부의 한없는 허약함 앞에서 아오야마는 사실적 결론을 미루고 결말을 명백한 판타지로 대체한다.

아오야마 신지가 만들어가는 전후 일본세대의 정신사

<새드 배케이션>은 3부작 가운데 가장 불균질하고 느슨한 영화인데, 그것은 알레고리의 균열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내셔널시네마 작가로의 자의식은 여전하지만 곳곳에 영화광적 현시욕과 소년적 낭만주의가 출몰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의 초반부를 특히 혼란스럽게 촬영했다. 이야기는 명료하지만 카메라는 핸드헬드와 고정된 롱테이크를 수시로 오가고, 점프컷을 디졸브와 불규칙하게 뒤섞으며, 숏의 순서도 간혹 뒤바꾼다. 겐지와 유리, 중국인 아이 아춘이 처음 함께 모인 방장면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짧은 나눠찍기로 이어져 있다. 아오야마는 카메라가 피사체와의 감정을 겸손하게 공유하던 우아하고 과묵한 <유레카>의 방식을 의식적으로 뒤집고 있다. 아오야마가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인물들의 아득한 슬픔에 젖어들게 하던 전작의 정서적 감염력을 스스로 경계하려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새삼스런 영화광적 기교에 마음이 가진 않는다.

그러나 한 장면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중국인 아이를 빼돌렸다는 이유로 중국인 야쿠자에게 몰매를 맞고 강가에 버려진 겐지는 다음날 깨어나 강으로 걸어들어가 강물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떠내려간다. 이 장면은 장 르누아르의 <익사 직전에 구출된 부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연상시킨다. 부뒤도 자신을 구해준 부자의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탈출해 강물 위를 하염없이 떠내려간다. 하지만 두 장면은 카메라의 위치가 다르다. 부뒤는 프레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수평이동한다. 겐지는 프레임의 아래쪽(근거리)에서 위쪽(원거리)으로 수직이동한다. 부뒤는 부르주아의 억압적 세계에서 자기만의 자유로운 세계로 말 그대로 이동하고 있지만, 겐지는 점점 멀어지며 마치 서부 사나이가 그랬듯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다음에 겐지가 중국인 소년과 서 있는 장면이 나오므로 이 장면은 불필요하며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소망의 신에는 장르적 낭만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 깃들어 있다. 아오야마는 “내 무의식 속엔 서부극이, 아니 서부극 안에 내 무의식이 있다”고 말했는데, 서부극의 결말을 변주한 이 장면만큼 그 말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하기 힘들 것이다.

<새드 배케이션>이 3부작의 완결편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소년 나오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유레카>에서 사와이가 나오키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며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네가 꼭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꼭 죽지 말고 살아라.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그토록 공손하던 사와이는 “그런 애는 감옥에 있는 게 나을 거야”라고 말하는 아키히코를 내쫓으며 “나오키는 언젠가 돌아와 자신이 잃어버린 걸 찾으러 올 거야”라고 소리지른다. 그는 빌리 더 키드를 추모하는 팻 개릿의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빌리는 죽었고 나오키는 살아 있다. 무고한 다섯 여인을 살해한 소년이 돌아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그리고 겐지를 혼란에 빠트린 애매한 어머니와 마주보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하다. 지속될 수만 있다면 이 연작은 아마도 전후 일본세대의 정신사라고 불릴 만한 것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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