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계상은 예상 밖이다. 낯 가리지 않는 서글함, 툭하면 눈썹을 씰룩거리는 요상한 표정, 말을 거르지 않는 솔직한 태도. 하긴 영화들도 그랬다. 희망이 엇나간 청춘의 <발레교습소>, 오랜 연애의 구질함들이 들춰지는 <6년째 연애중>, 바닥까지 한심한 호스트 인생 <비스티 보이즈>. 단순하고 밝은 삶은 그 주위에 없었다. 직선적인 영웅물보다 흐트러진 사람 이야기가 좋다는 올해 만 서른의 늦깎이 연기자. 그렇지만 충무로의 신선한 얼굴. 그리고 범상찮은 연기력의 동갑내기 배우 곁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힘. 2006년 군 제대 뒤 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온 그는, 단연 주목할 만한 젊은 배우 중 하나다.
-기자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다고 했는데, 어땠나.
=영화로선 괜찮았고, 배우로선 좀 섭섭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는데 편집된 부분들이 있어서. 지원(윤진서)과의 이야기들이 많이 잘렸더라. 그래서 승우가 왜 지원에게 집착을 보이는지 납득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승우는 왜 지원에게 집착하는 건가. 영화에서 사라진 이야기는 어떤 건가.
=지금껏 잘 살아오던 녀석이 호스트 일을 하게 됐는데, 자기는 남들과 똑같은 놈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 그런 약점을 건드리니까 승우가 지원에 대해 꼭지가 돌게 되는데, 지금은 오로지 칫솔 얘기밖에 없으니까. (웃음)
-뉘 집에 칫솔이 이렇게 많냐며 흐느끼는 장면. 그 장면은 진짜 웃겼다.
=나도 찍으면서 웃겼다. (웃음)
-이 영화는 처음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나는, 사람 이야기가 너무 좋다. 정말 확확 변할 수 있는 게 인간인 거 같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정의감에 불타서 난 이런 사람이야! 하며 멋있게 직진하는 영화보다는 이유도 없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인물이 있는 게 연기를 시작하면서 너무 좋아졌다. 그리고 그런 게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 찰나에 시나리오를 받았다. 처음엔 뭐 이런 미친놈, 했는데 그 감정이 납득이 되니까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 보고 감독이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싶었지만 만나보니 보통 인간은 아니더라.
-어떤 점에서 그랬나.
=젊다. 나보다 한살 어리잖나. 근데 타협이 없다. 나도 배우로서 승우의 감정에 대해 이건 이러지 않을까요? 라고 얘길 하다보면 어느 선에서 (버럭)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웃음) 확실히 말한다. (웃음) 이 확실한 감정을 당신은 어떻게 표현할 거예요라고 이야기하지, 자기가 잡은 인물의 감정에 대해선 절대적인 게 있다. 그만큼 뭐가 나오긴 나오니까. 믿음이 갔다.
-데뷔작인 <발레교습소>, 두 번째 영화 <6년째 연애중>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표정이 정말 다양한 게 보인다. 단적인 예로 가만히 있을 때와 웃을 때, 찡그릴 때의 인상이 굉장히 크게 변해서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어 보이는 얼굴이랄까.
=(무슨 말인지 벌써 알겠다는 듯) 허허허허….
-그중에 멋있고 근사한 표정이 있는가 하면, 바보 같고 좀 없어 보이는 표정들도 있다. 시쳇말로 확 깨는. 그런데 3편 모두 후자의 얼굴이 자주 나오는 것 같단 느낌이다. 윤계상이란 배우가 멋있다 싶을 때보다 확 깬다 싶을 때. 보면서 걱정이 될 정도로.
=나도 안다. (웃음) 가수 출신이니 내 얼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겠나. 항상 멋있어 보여야 되고, god 할 땐 그 부분에 늘 신경 썼다. 그리고 그걸 깨지 않으면 난 배우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화면에서 늘 멋있으면 안 되는 거라 생각하고, 찌질한 부분에서는 극단적으로 찌질해져야 사람들도 그걸 오히려 캐릭터로서 더 받아주는 것 같다. 그런 순간에 나는 그 다음 연기에 대한 욕심을 얻는다. 솔직히 말하면 (의도치 않게) 넋 놓고 한 적도 있다. 작품을 해오면서 나도 내 얼굴을 알게 된 거다. 이제 그걸 잘 요리해서 써먹어야 하는데 <비스티 보이즈> 땐 순전히 그걸 의식해서 썼고, 이전 작품들은 좀… 아닌 것도 있고(웃음) 하하하하….
-이번 영화와 전작에선 신체 노출이 있었고, 데뷔작에서는 극단적인 노출은 아니었지만 아주 많은 걸 드러낸 느낌을 남겼다. 노출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어도 배우들은 보통 몸을 사린다.
=그 부담을 버리고서 연기를 시작했다. 나는 몸이 잘 변하는 체질이라 <비스티 보이즈> 때도 촬영하면서 실제로 술을 많이 마셔서 오히려 쪘다. 그렇지만 나는 배우니까, 그 캐릭터에 관한 전체적인 모습이 보여졌을 때 그것이 관객에게 납득이 돼야지, 그래서 배가 좀 나와 있어도 그냥 갔다. 그런 상황에서 근육질이거나 선을 넘어서 멋있게만 보이면 배우 안 했다. 가수 계속 했지.
-하정우와는 어땠나. <두번째 사랑>을 같이 한 베라 파미가가 말하길 “기가 보통 센 배우가 아니다”라고 하더라. 남자끼리라 기싸움도 더 있지 않았을까 싶고.
=기가 센 건 정말 장난 아니다. 그걸 나도 의식적으로 많이 느꼈고, 시합은 아니지만 지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게도 큰 에너지가 됐다. 되게 좋은 배우다. 호흡을 무시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걸 끌어내는 배우. 상대 배우가 쉬지 않고 긴장하게끔 만든다. 영화 후반에 승우와 재현(하정우)이 싸우는 신은 정말 힘들었다. 100m 뛰어 쫓아가서 싸우고 때리고, 이 새끼 일어나! 소리 지르고. 둘 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진 장난 주고받다가 시작되는 순간 정말(웃음) 기싸움이…. 나는 뒷모습만 잡히는데도 더 열심히 했던 거 같다.
-변영주 감독과 가까운 사이라고.
=내 연기 스승이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 분. 항상 모니터해주시고, 조언을 많이 듣는다. 어제 기자시사 때도 오셨다. 쓴소리 많이 하시는데, 틀린 말은 안 하신다. 그분 말은 100% 신뢰한다. 이모다, 이모. 껄껄껄껄…. 그리고 신혜은 PD님. 그분들 아니었으면 연기 안 했을 거다.
-데뷔작 선택이 좋았다.
=그렇게 만들어주신 거다. 연기 하나도 안 배우고 들어갔는데, 66회차 찍는 동안 끊임없이 내게 요구하고, 버리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대중은 그걸 어떻게 보든 나에겐 너무 소중한 작품이다. 그 느낌을 계속 받으려고 연기를 계속 하는 것 같다.
-처음 연기 시작할 때 커리어의 생존이란 목표와 연기 자체에 대한 열정 중 어느 이유가 더 컸나.
=후자가 더 컸다. 다만 처음엔 정말 쉬울 줄 알았고, (거드름 흉내) 어우, 그걸 왜 못하는 거야? 어색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웃음) 그랬는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잘 모르긴 하지만.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의 꼬리표를 뗐다고 생각하나.
=나는 뗐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아직 멀었다. 여전히 나와 연기하는 배우들은 나를 보고 아이돌 가수 출신이 무슨 연기냐 생각한다.
-그런 얘길 대놓고 듣나.
=드라마 할 때 어느 여자 선배님, “어머, 내가 지금 아이돌하고 연기해야 되는 거야?” (웃음) 그게 농담도 있지만, 100% 농담만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잘 변하지 않는 것 같더라. 그래서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고, 남들이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해서 (목소리 점점 낮추며)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배우가 될 거다. 그게 유치하지만 나의 꿈이다. (뿌듯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