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시사회를 보고 왔습니다. 처음 접한 귀여니 영화였는데, 저에겐 그냥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영화가 ‘멋진 남자주인공’으로 내세운 놈들이 다들 견딜 수 없는 막장들이었다는 거죠. 마조히즘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섭니다.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다 불쌍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딱했던 건 여자주인공을 맡은 차예련이었습니다. 전 몇년 동안 습관적으로 이 배우의 경력을 지켜봤죠. 이유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전 1편을 제외한 모든 <여고괴담> 시리즈의 졸업생들에게 습관적으로 관대해요. 그냥 다들 ‘우리 편’ 같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굉장히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어요. 전 <구타유발자들>의 시사회 때 기자들이 다 나가고 텅 빈 상영관 객석에서 동료 출연배우들과 함께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사람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충격을 먹은 적 있습니다. 딱 에드워드 고리가 그린 뱀파이어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 것 같았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아가씨에게 누가 좋은 뱀파이어 역 좀 하나 던져주지 않겠습니까?
패션모델이나 광고모델로 쌓은 경력을 무시하고 드라마와 영화만 본다면, 차예련의 성공작들은 모두 호러입니다. <여고괴담4: 목소리>와 <므이> 말이죠. 두 영화 모두 이 사람의 멸종 위기에 놓인 육식조류 같은 위협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타자의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들이었죠. 물론 아쉬움은 있습니다. <여고괴담4: 목소리>는 멋진 영화였지만 차예련의 캐릭터가 살아 숨쉴 수 있는 공간은 충분치 않았습니다. <므이>는 배우로서 훨씬 좋은 기회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토리와 설정이 꽝이었죠(영화 찍기 전에 누군가가 “뭐야? 이거 <령>과 스토리가 똑같잖아!”라고 말해주었어야 했습니다. 글쟁이들은 남들이 지적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같은 소리를 되풀이한다는 걸 몰라요). 고로 전 제발 이 배우가 앞으로 더 좋은 장르 영화를 만나서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더 무시무시한 역할을 맡길 바랍니다. 이런 이미지를 장르물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건 심각한 낭비입니다.
하지만 팬들의 입장과 당사자의 입장은 같지 않습니다. 사실 배우의 이미지와 자연인 배우도 달라요. 차예련은 21세기 한국에 뚝 떨어진 뱀파이어가 아닙니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이용한 것뿐이죠. 말하는 걸 들어보나, 차기작을 선택하는 걸 보나, 이 사람은 그냥 평범해요. 전 이 사람이 제가 은근슬쩍 기대하는 것처럼 한국판 바버라 스틸(이탈리아 호러영화인 마리오 바바의 <블랙 선데이>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지 고정을 막겠다면서 <도레미파솔라시도>나 <못된 사랑> 같은 작품에 좋아라 출연한 걸 봐도 그렇죠. 이 사람의 최종 목표는 장르 배우에서 벗어나 주류로 진입하는 것일 겁니다.
문제는 이런 평범한 소망은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 외모의 배우라면 그냥 기본 연기만 해도 되는 역에서도 차예련은 추가 에너지를 짜내어 자신의 이미지를 지워야 해요. 그런다고 남는 게 있느냐? 없단 말이죠. 아직 차예련에겐 그 텅 빈 상황에서 살아남을 만한 배우로서의 파워가 부족해요. 그렇다고 그런 경력이 캐스팅에 특별히 더 도움이 되느냐, 그 역시 아니란 말이에요.
앞으로 이 칼럼이 연재되는 동안 수없이 되풀이할 말이지만, 전 충고해야 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거고. 하지만 이 점은 말하고 싶어요. 지금 차예련을 꾸준히 지켜보고 그 사람을 배우로서 존중하고 차기작을 기다리는 열성팬들은 대부분 장르팬일 거라는 거죠. 차예련 자신이 원하는 미래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힘없는 무리들이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