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의 도시’ 뉴욕에서는 365일 온갖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칸이나 선댄스처럼 월드프리미어나 필름마켓이 왕성하진 않지만 어떤 영화를 틀어도 반드시 관객은 찾아온다. 최근 IFC센터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글래스>(Glass: A portrait of Philip in Twelve Parts)도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반복적인 음악적 구조 때문에 클래식의 미니멀리스트로 불렸으나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음악가나 종교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필립 글래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난 1월 71살을 맞은 글래스는 수년간 자신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해 보여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기획해왔다. 마침내 영화 <샤인>의 감독 스콧 힉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제작비용이나 확실한 작품구조가 결정될 때까지 일단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했다. 개봉 당시 IFC센터를 직접 찾은 힉스 감독은 “초창기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다가 제작비용이 마련된 뒤 제대로 스탭을 갖춰 필름 촬영을 하려니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필립의 모습이 어느덧 대중에게 알려진 아이콘으로 바뀌어 있더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디지털카메라로 완성된 이 작품은 평론가들에게는 글래스의 작품세계를 겉핥기식으로 끝내는 진부하고 무미건조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단관 개봉인 탓에 박스오피스 기록도 저조하다.
하지만 <글래스>는 필립 글래스를 잘 알지 못했던 관객에게 한 예술가의 인간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2편의 단편 형식으로 각각 주제별로 나뉘어진 이 영화는 오페라 작곡과 영화음악 작곡 등 한꺼번에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글래스의 작업방식은 물론 그의 일상적인 생활에도 카메라를 들이댄다. 글래스가 어지럽힌 작업실을 조심조심 치워가는 4번째 부인 홀리의 조용한 불평, 2명의 어린 아들과 산책을 즐기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운동과 명상을 매일 꾸준히 하는 글래스의 모습 등 그의 일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꽤 흥미롭다. 40대 남자도 따르기 힘든 지구력으로 작품활동에 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관객은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서 힉스 감독을 쳐다보며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작품이든 처음에는 그저 암담한 생각만 든다”는 그의 푸념을 들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