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살던 안동에서 대구로 전학을 온 고등학교 시절, 내 유일한 즐거움은 대학가에서 불법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 1300원의 돈을 지불하면 따끈한 차 한잔과 개봉도 안 한, 커피보다 더 따끈한 영화 세편을 하루종일 볼 수 있었다. 남들보다 먼저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를, <지존무상>을, <첩혈가두>를(그것도 편집되지 않은 홍콩 개봉판을!), <굿바이 엠마뉴엘>을(삭제 안 된 원판을!) 한글 자막으로 볼 수 있었다(그 영화들을 유통시키고 번역하고 자막을 넣었던 알 길 없는 그대들에게 박수를!).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엔 언제나 대학가 주변을 얼쩡거리며 ‘스크린’이라 불리던 불법 영화카페의 상영작 목록을 체크하고 가장 볼 만한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서 종일 영화를 봤다. 수업이 없는 개교기념일도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 학교로 가는 척하고 아침 7시부터 상영작 간판을 내거는 10시까지 대학가 주변을 서성이며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으며 서성였다(도대체 도시락은 언제 어디서 까먹었던 걸까). 좁은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옷에 배는 담배냄새의 불안감(담배 피우는 게 들통날까봐)과 늘 막차였던 버스의 불편함은 남들보다 먼저 영화를 봤다는(그것도 매우 싼 가격에!) 포만감 앞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뭐 하나 변변하지 못했던 나에게 영화는 탈출구였다(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하지 않는다’라거나 ‘누구에게도 상처받을 걱정없이 타인의 인생을 훔쳐볼 수 있다’라고 자위했다.
영화를 보는 것과 함께 생기게 된 습관이 서점에서 <로드쇼>와 <스크린>을 보는 것이었다. 고3 무렵 (밤늦게 공부하는 척) 책상머리에 앉아 늘 <로드쇼>를 보곤 했다. <로드쇼>를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서울과 부산, 그리고 천안에서 열리는 시네마테크의 영화제들이었다. (불법) 비디오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대학가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사의 걸작(!)들이 상영작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영화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94년 대구에도 불법비디오영화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가장 먼저 한 것은 영화제를 개최하는 문화공간인 ‘열린공간-큐’에 1년 회원에 가입한 것이다. 매월 열리는 영화제를 다 볼 수 있다는 조건은 더할 나위 없는 호조건이었고 이후 영화제가 열리는 매월,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다. <시민케인> <전함 포템킨>, 히치콕의 영화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펠리니의 영화들, 그 시절 유행했던 각종 ‘컬트’영화들, 호러영화들….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것이었지만 대학가 ‘스크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영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정성에 대한 관심은 하늘을 찔러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로 악명높다는 영화들은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관심의 초점이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 할(!) 영화였다. 오시마의 <감각의 제국>, 마카베예프의 ,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나를 사로잡은 영화는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였다. 도발적인 클로즈업과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선정적인 영화를 기대한 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이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 사로잡혀버리게 된 것은(혹은 ‘내 인생의 영화’가 되어버린 것은) 단순히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서관 순회가 취미였던(오∼ 놀라워라) 어느날 대구중앙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앤서니 버제스의 원작소설(1980년대 학원사에서 출판된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마도) <오만과 편견>이었다)은 영화에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의미를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수감된 교도소에서 또 한번의 살인을 저지른 뒤 루드비히법에 의한 교정을 받게 되어 교도소를 나가된 알렉스에게 교도소장인 목사가 한 이야기는 이후 내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 단초가 되었다.
“그래,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 6655321. 하지만 나쁜 일일 수도 있단다. 아주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겠지? 나는 이 일 때문에 며칠 밤을 설칠 거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과연 무엇일까? 선을 원하시는 걸까, 아니면 선을 선택하기를 원하시는 걸까?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오히려 선을 강요당하는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들이야, 6655321.” (<오렌지 시계> 앤서니 버제스 저·문혜원 역, 나우북즈, 1997)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것, 혹은 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악이 존재하지 않은 곳의 선보다는 선악이 존재하는 곳의 악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큐브릭의 영화와 버제스의 소설을 통해 으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는 (혹은 의심해야만! 하는) 삶의 태도를 익혔다. ‘기존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내 20대(실은 아직도 20대다)를 지배한 삶의 태도였고, 당연하게도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던 모든 것들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통해 나의 콤플렉스를 조금은 덜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야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고, 뭐 지금은 콤플렉스 따위 별로 없다,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