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고통과도 같은 구원, <라라 선샤인>
2008-05-05

정신적으로 받은 큰 충격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때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부른다. <라라 선샤인>은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했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는 작가 수진이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구원을 찾아가는 영화다.

새 작품을 준비하던 수진은 미술관에서 어느 화가가 한 여자를 마구 때리고 성폭행하다 죽은 사건에 흥미를 느낀다. 사건은 정당방위로 밝혀져 여자에게 무죄를 선언하였으나, 수진은 이 사건이 정당방위를 가장한 계획된 살인사건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 그녀는 사건의 피해여성이 어린 시절 화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피해여성을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만들어 낸 허구의 작품을 통해 대리적인 구원을 받으려는 수진은, 그러나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수록 자신의 가설이 거짓된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허구의 작품으로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그녀의 상처가 무엇인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린 시절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처는 성폭행을 당한 이후 스스로 입은 오른손의 상처이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성폭행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오른손의 상처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결국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줄기 빛(선샤인)과도 같은 구원을 고통스럽더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라라 선샤인>에서 돋보이는 것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결국엔 그 경계를 지워나가는 연출력이다. 수진이 겪고 있는 일상의 모습들이 현실이라면, 새로운 작품에 대한 그녀의 상상은 허구다. 수진은 자신의 상상의 작품 속에서 스스로를 ‘라라’라고 부른다. 현실 속 수진이 새 작품을 위해 살인사건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허구 속 라라는 자신이 재구성한 살인사건을 바라본다. 수진이 사건의 실제 당사자인 미라를 만나는 것은 영화 속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수진과 라라의 명확한 경계는 수진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갈수록 누가 수진이고 누가 라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점점 흐릿해져서 결국엔 그 경계마저 사라지게 된다.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함은 자칫 난해함을 낳을 수 있으나 감독은 세련되고 절제된 편집으로 난해함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복수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는 자연스레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라라 선샤인> 역시 무척이나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글 장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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