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신한솔] “토속 에로사극은 족보 있는 장르다”
2008-05-08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가루지기>의 신한솔 감독

<싸움의 기술>을 연출했던 신한솔 감독이 변강쇠를 환생시켰다. 영화 <가루지기>는 그가 장편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구상했던 프로젝트다. <변강쇠> 시리즈와 <가루지기> 등의 토속 에로사극들을 보고 자란 영화광 청년에게는 한번쯤 상상했을 법한 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한솔 감독은 단지 오락적인 패러디를 위해서 변강쇠를 가져온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영화들은 B급영화로서 나름 놀라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 영화를 만든 분들에게 오마주를 바치면서 더 멋진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변강쇠란 인물을 다시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변강쇠> 시리즈를 연출한 엄종선 감독에게 관심이 많았다. 고우영 선생이 연출한 <가루지기>도 정말 좋아했고. 예전에 영상자료원에서 근무할 당시 밤에 혼자 프린트를 걸어놓고 본 적이 있다. <가루지기>는 <변강쇠>보다도 더 걸작이다. (웃음) 캐릭터나 해학, 그리고 고우영 선생이 가진 만화적 스타일이 정말 세게 묘사돼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고우영 선생에게 이걸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전화를 한번 드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촬영감독이 마음대로 만든 거라 아쉬움이 많다고 하시더라.

-엄종선 감독의 영화들은 어떻게 봤나.
=당시에는 향토영화들이 많았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감독들이 문예물이란 장르에서 나름의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만들었던 거지. 하지만 엄종선 감독은 변강쇠를 사람들이 모를 때, 제일 먼저 가져와서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판타지를 구현했다. 특히 <변강쇠2>가 아주 걸작이다. 변강쇠랑 옹녀랑 정사를 하는데, 남극에서 얼음이 갈리고… 이런 장면들은 정말 B급이지만, 당시만 해도 다른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였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한번쯤은 엄종선 영화제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웃음)

-막상 <가루지기>를 만들어야겠다고 했을 때 구상한 영화는 어떤 모습이었나.
=<변강쇠>의 에피소드를 오마주하면서도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신명을 넣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강쇠라는 마초적인 캐릭터가 중심이 아니라 그를 갖고 노는 여자들의 생명력을 부각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치 누나들이 막내동생 데리고 노는 것 같은 풍경을 상상했다. 옛날 <변강쇠> 시리즈에서는 여자가 당하면서 소리지르지 않나. 그런 게 아니라 성에 대해서 노골적이고 담대한, 그리고 성을 즐기는 여인들이 나왔으면 했다.

-달갱이란 캐릭터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정윤희가 연기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더라.
=맞다. 연못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은 그 영화에 대한 오마주다. 사람들이 이 영화에 있는 오마주를 발견하는 모습이 나로서는 재밌을 것 같다. 나 역시 즐기면서 만들었으니까.

-변강쇠가 절구질을 할 때 아낙네들이 난타로 화답하거나, 싱크로나이즈가 등장하는 건 어떻게 구상한 건가.
=판타지스러운 장면들은 <누들누드>를 그린 양영순 작가에 대한 오마주다. 그가 상상한 독특한 성적판타지는 엄종선 감독도 못했던 것이다.

-그 밖에 오마주를 바친 사람들은 없나.
=사실 엔딩 크레딧 밑에 뿌리가 되신 분들이라고 적어놓은 이름들이 있다. 그중에는 엄연순, 서거정 같은 이름이 있는데, 이분들이 조선시대의 음란서생들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 야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도 출판돼 있다. <변강쇠> 시리즈부터 <고금소총>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도 다 거기서 나온 거다. 그만큼 이 장르가 족보가 있는 거지. (웃음)

-아낙네들의 캐릭터가 세지면서 상대적으로 변강쇠의 매력은 줄어든 것 같다.
=변강쇠의 매력은 과거 이대근 선생님이 너무 잘 보여주지 않았나. 그걸 또 보여주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좀더 새롭게 묘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배우가 봉태규다. 이대근의 변강쇠만큼이 더 재밌는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봉태규가 기존과는 다른 연기를 해보고 싶어했다. 나도 그게 이 영화랑 맞다고 생각했고.

-중반까지는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지지만 강쇠의 감동적인 희생극으로 흘러가면서 기운이 빠진다.
=음… 뭐, 끝까지 흥겨로울 수 있겠나. 나는 영화에서 아낙네들이 벌이는 기우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군무와 떼창을 통해 아낙네들의 신명이 터지는 것이니까. 그걸 준비하는 드라마적 과정이 조금 늘어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필요했다. 배급사에서도 조금은 덜어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정서적으로는 쌓이는 게 없을 것 같더라.

-엄종선 감독은 <가루지기>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 같은가.
=마침 내일 시사회에 오신다. 평소에도 자주 뵙는다. 아마 <가루지기>를 못 만든 영화로 보신다면 나를 아주 싫어하실 것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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