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김아론│63분│한국│오후 2시│메가박스 6
“제가 원하는 것들이 현실로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릴 적, 성폭행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나리오 작가, 김수진(라라)은 이미 정당방위로 판결난 ‘박물관 살인사건’을 계획적인 복수극으로 가정하고 시나리오를 집필하려 한다. 그녀는 자료조사를 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복수를 ‘박물관 살인사건’을 통해 상상한다. 라라의 상상력이 창조해낸 허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과의 간극을 좁혀가고, 라라는 혼돈상태에 빠진다.
“화초를 키우면 언젠가 나비가 날아오지 않을까?” 망상의 목소리가 이야기하는 ‘나비’는 행복을 의미한다. 라라는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햇살을 막고 있는 창문 위 먼지를 제거해야 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과거의 기억. 너덜너덜한 신발마냥 너무 많이 쓰여 닳아버린 소재지만 그만큼 매혹적이다. ‘라라’라는 인물은 소재의 진부함을 없애고 그 매력은 배로 만드는 이 영화의 오아시스다. 세련되고 완벽해 보이는 그녀 속에 숨겨진 나약함과 도회적인 이미지 뒤에 숨겨진 팜므파탈적 욕망은 라라를 매력적이고 섹시하게 만든다. 도도한 그녀의 매력에서 침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즈음, 관객은 이미 라라의 망상에 동조하고 있을 것이다. 라라의 상상은 망상을 현실과 조우시킨다. 현실과 망상의 모호한 경계가 사라지고 이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되면서 라라의 복수는 실현된다. 현실과 망상이 공존하는 한 장면, 왼쪽 교회의자에 앉아 있던 수진(현실)이 프레임 밖으로 나가고 오른쪽에서 노란 머리의 라라(망상)가 프레임 안으로 등장할 때, 현실과 망상의 구분은 파괴되고 종교적 구원에 기대던 그녀는 살인자로서 과거에 직접 맞선다(드디어 그녀는 섹시함으로 온몸을 도배한 ‘중경삼림의 킬러’다). 복수를 이루고 나비가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 팜므파탈의 매혹적 영혼을 잃어버렸지만 따스한 햇살 속 순수한 천사로서 그 매력을 이어갈 것이다.
김아론 감독의 <라라 선샤인>은 일견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복수’라는 주제, 클래식 음악, 강렬한 색채, 생선 목을 내리치는 장면과 잘린 손가락을 보여주는 장면의 그로테스크함까지. 또한, 여백의 미와 피사체의 좌우대칭을 이용해 ‘세련된 영상은 이런 것’이라고 일갈한다. 냉철한 잔인함과 무자비한 폭력의 박찬욱 영화를 ‘남성적 느와르’라고 한다면, 라라의 상상으로 빚어낸 몽환적이고 미스테리한 김아론 영화는 ‘여성적 느와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