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오는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열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서른다섯 번째는 고 김학성 촬영감독의 차남 김충남씨가 기증한 영화자료와 유품입니다.
1913년 수원에서 태어난 김학성은 한성중학교 시절 조선 플라이급 대표선수가 되었을 정도로 복싱에 매료된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이인 영화배우 김연실을 따라 경성촬영소에 갔다가 조선 영화기술의 개척자 이필우를 만나면서 촬영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연실의 지원으로 도쿄 유학 중 1936년 가나이 세이치(金井成一)라는 이름으로 신코 키네마 도쿄 스튜디오에서 촬영 일을 했고, 1939년에 돌아와 <성황당>으로 데뷔했다. 김학성 촬영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1941년작 <집없는 천사>는 당시 조선영화의 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영화로 일본에 배급되어 처음으로 조선영화의 존재를 알렸다. 1958년에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생명>을, 1961년에는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는 <오발탄>을 촬영했다.
전쟁기에는 기록영화 촬영 중 수류탄 파편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고 누이 김연실마저 잃는다. 김학성 촬영감독의 유품 중 총알이 스친 자국이 선연한 코닥 레티나 카메라와 국방부 완장과 철모 등은 종군 카메라맨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엄격하고 정확했던 평소의 성격을 반영하듯 김학성의 소장품은 촬영을 맡았던 <집없는 천사>(1941), <거경전>(1944), <밤의 태양>(1948), <애정파도>(1956), <생명>(1958), <임꺽정>(1961), <성웅 이순신>(1962) 등의 홍보물은 물론 김연실이 출연했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 전단지 등을 망라한다. 김학성으로부터 3년간의 도제수업을 받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은 1957년 데뷔 당시 김학성 감독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해주었던 것이 영화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