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은 <즐거운 인생>이 개봉하자마자 다음 영화인 <님은 먼곳에> 촬영에 들어갔다. 방금 막 개봉한 영화의 흥행을 살펴볼 여유도 없이 다음 이야기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셈이다. 그는 <왕의 남자>의 1천만 관객 돌파 이후 매해 한편씩 영화를 찍어 세상에 공개했고, 세상이 그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다음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승률은 높아 <황산벌> 이후 찍은 세편의 영화 중 두편이 흥행에 성공했고, 나머지 한편 <즐거운 인생>도 크지 않은 손실을 남겼다. 세상의 소리에 무감각한 남자, 자신의 심지가 굳은 남자. 이준익 감독은 트렌드를 모른다. 아니, 모르려 한다. 애써 관객의 마음을 읽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한물간 록스타의 이야기, 광대들의 애절한 사연, 사투리로 조롱하는 삼국시대의 권력관계. 이게 어디 21세기 상업영화의 감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세상의 뒤통수를 때리듯 흥행에 성공했다. <황산벌>의 충격, <왕의 남자>의 의외의 폭발, <라디오 스타>의 저력. <즐거운 인생>의 실패가 있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트렌디하지 못하다. <님은 먼곳에>는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순이란 이름의 한 여자가 전쟁터로 징병된 남편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촌스런 이름부터 남자를 찾아 전쟁통에 들어가는 여자 캐릭터까지, 정말 올드하다. 하지만 어쩌나. 그게 이준익인걸. 이준익 영화의 뒤통수는 트렌디하지 못함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님은 먼곳에> 후반작업 막바지에 있는 이준익 감독을 영화사 아침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또 다음 영화를 궁리하고 있었다.
-후반작업은 얼마나 진행됐나.
=거의 다 끝났다. 어제 수애가 노래하는 거 녹음했다. 2시간5분 나왔다.
-이번에도 제작비를 남겼다는 뉴스가 떴더라. 70억원 예상에서 3천만원 모자란 69억7천만원으로 마쳤다고.
=제작비를 남기려고 남긴 게 아니다. 계획한 대로 맞추면서 찍으니 남았다. 나는 늘 시나리오 쓴 대로 하니까. 지금까지 만든 다섯 작품 다 제작비를 남겼다. 시나리오 외의 추가장면을 찍어본 적이 없다. 물론 과도한 점프가 있을 땐 브리지신을 현장에서 추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타이 로케이션이 많았는데 56회차에 모든 촬영을 끝내다니 놀랍다.
=빨리 찍으니까. 내가 서두른다. 스탭들이랑 손발도 잘 맞고. 그냥 나는 콜 시간 정해놓고 하자, 그만하자고만 말한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없었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그걸 시행 안 한다. 또 치밀하게 예상을 하지도 않아. 정교하고 치밀하게 해서 잘하는 경우보다 잘 못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준비를 대충대충한다. 현장에 가면 얼기설기 준비가 돼 있어. 그 선상에서 정교하게 찍는 거지. 그러니까 56회차가 나올 수 있는 거다.
-베트남이 무대지만 타이에서 찍었다. 타이가 로케이션이 용이한 편인가.
=베트남은 촬영 허가 받기가 힘드니까. 타이는 모든 게 굉장히 편하다. 칸차나부리라고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곳에서 찍었는데 거기에 군부대가 많다. 그리고 협조가 좋다. 왜 할리우드에서 베트남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대부분 타이나 필리핀에서 찍었지 않나. 그래서 타이 스탭들이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반면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중심이 되어 움직일 수 있어서 좋고.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면 우린 마이너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모든 걸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영화 보면 알겠지만 영화에 동원된 물량, 인력의 규모가 70억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정도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베트남전쟁 외에도 당시 연예사업에 대한 디테일이 잘 살아 있더라(주인공 순이는 위문부대의 가수로 베트남에 건너간다).
=최석환 작가와 사전에 당시 베트남전에 위문 공연을 갔던 가수, 밴드, 악단을 찾아뵙고 인터뷰했다. 시작은 최석환 작가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 한장이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전쟁 때라고 해도 그 안에 낭만이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나.
=일단 소재에 대한 매력. 20세기에 인류가 저지른 가장 추악한 행실이 전쟁인데 베트남전은 서양이 만들어놓은 동서 이데올로기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이다. 우리 군인도 30만명 정도 참여했고. 물론 이미 할리우드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을 반성한답시고 미국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진정한 반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도 그 영화를 보면서 미국 사람 죽는 것에 아파하고 베트콩 죽는 것엔 안 아파하지 않았나. 같은 아시아인임에도. 우리는 미국 문화사대주의에 오염되어 있는데 그걸 잘 인식하지 못한다. 베트남전쟁을 아시아인의 시선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 하나는 순이라는 여자가 남자들의 전쟁터를 관통하는, 드라마틱하고 서정적이며 서사적인 설정이다. 영화란 역시 감성적인 상품이니까. 이 두 가지라면 70억원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님은 먼곳에>란 노래가 중요했나. <님은 먼곳에>는 <라디오 스타> 때 <빗속의 여인>과 함께 두고 무엇을 쓸지 고민했던 최종 후보곡이라고 했다.
=그렇다. <라디오 스타> 때 김양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로 시나리오에 <님은 먼곳에>를 써놨었다. 그런데 자꾸 <빗속의 여인>이 더 끌리더라. 그래서 촬영 하루, 이틀 전에 스탭들 불러서 얘기하고 동의 구해서 바꿨다. 이번에야 드디어 <님은 먼곳에>를 쓴 거다. 수애가 두번 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 좋더라.
-어떤 느낌이 좋은 건가.
=님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좋다. 가치있는 존재에 대한 지칭이지 않나. 남자 입장에선 사랑하는 여자가 님일 수 있고, 여자 입장에선 반대로 남자일 수 있고. 또 효도하지 못한 아들에겐 어머니가 님일 수도 있고. 님은 항상 먼 곳에 있다. 님이라는 개념이 그런 거다. 가까이 있으면 님이 아니라 놈이지. (웃음) 개인적으론 그렇다. 멀리 있는 존재에 대한 느낌. 영화에서도 순이는 남편과 가깝지 못하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맏며느리가 갖는 전통적인 위치란 게 그런 거 아닌가. 한자리에 누워 있어도 남편과 멀게 느껴지는. 그러다 순이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남편과 떨어진다.
-순이가 남편을 만나러 베트남에 간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있던 건가.
=그렇다. 처음부터 있었다. 왜 요즘 한국영화들이 시추에이션 의존적이라고 하지 않나. 문학에서도 대체 서사는 어디 갔냐고 하고. 나는 좀더 서사적인 걸 하고 싶었다. 영화 100년사를 봐도 머나먼 여행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왔다. 방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노래방이다, PC방이다 하며 좀처럼 방을 떠나지 않지만. <님은 먼곳에>를 통해서라도 먼 길을 가보라고 하고 싶었다. 나에게 서사는 관객을 향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다.
-처음으로 여자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여자 캐릭터가 빈약하다는 비판에 항상 여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었는데, 이제 여자를 알 수 있게 된 건가.
=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스크린> 편집장 결혼식에 갔는데 배창호 감독님이 주례를 보셨다. 감독님이 하는 말씀이 결혼 전에는 자기 눈으로만 세상을 봤다면 결혼 이후엔 눈이 두개 더 생겼다더라. 그 대목이 마음에 꽂혔다. 아내를 통해 보는 눈이 생겼다고. 놀라웠다. 나는 이번 영화를 통해 순이란 여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 것 같다. 그동안 남자 영화만 계속 찍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남성들의 고백을 많이 하게 됐는데 순이의 눈을 통하니 그들의 옹졸함이 보였다. 자신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쉽게 용서되진 않는 것. 여성관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남자들의 그런 옹졸함이 구원까지 받을 순 있을진 모르겠지만 용서까지는 갈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
-<황산벌> <왕의 남자>가 주류에 대한 조롱의 측면이 강했다면 이후의 두 작품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은 소수에 대한 연민이 더 강한 작품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님은 먼곳에>는 다시 <황산벌> <왕의 남자>쪽으로 선회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진 않다. <님은 먼곳에>는 네 작품을 다 짬뽕한 거다. <황산벌>의 전쟁, <왕의 남자>의 서사성,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의 공연. <님은 먼곳에>도 순이가 가수로 위문단에 들어가니까. 나는 한 여성이 동년배 남성들 앞에서 비키니 같은 걸 입고 노래를 부른다는 데에는 수치심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줍지 않은 사랑도, 스펙터클한 전쟁도 이 영화에서 기대해선 안 된다. <님은 먼곳에>는 한 여성을 통해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쫓아간 영화다. 남자는 세상의 일부일 수 있지만 그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건 여성성밖에 없다. 페미니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이 영화는 남성성, 마초성의 폐해를 통해 여성성을 고찰한 영화다. 여성중심적 시선에서 보여지는 남성의 세계가 궁금했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점점 더 힘을 키우는 남성들의 비겁함을 보고 싶었다. 그 비겁함이 한 여자 앞에서 무너질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진실함이 나온다. 그 라스트를 위해 전쟁도 하고, 비행기도 타고, 뭐 다 했던 거지.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과 함께 이번 영화를 음악 3부작이라고 부른다. 의도가 있었던 건가.
=그렇지 않다. 내가 인터뷰를 토킹머신처럼 하다보니까 그냥 그런 말이 나온 거지. 그냥 던져놓고 달려간 거다.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하고 보니 밴드가 두번 나오네, 그런데 <님은 먼곳에>도 음악이 나오고. 그래서 3부작이 되어버린 거다. 사실 <님은 먼곳에>는 <즐거운 인생>보다 먼저 기획했다. 준비기간이 1년 걸린다고 해서 그 사이에 <즐거운 인생>을 한 거고. 놀면 뭐하나. 농부가 밖에 나와야지. 계획을 잘 세우는 타입도 아니고 계획대로 잘 되지도 않는다. 라이프 이즈 서든리(Life is Suddenly). 인생은 느닷없는 거다.
-마케팅까지 하면 총제작비가 100억원 정도 되겠다. 부담은 없나.
=제작비 너무 많이 썼어. (웃음) 근심이 크다. 조금이라도 이윤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다음 영화 찍지. 열심히 투자자 돈 남도록 챙기면서 성실히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내가 살길이다. 안 그럼 나 어디 가서 뭐 먹고살아. (웃음) 누가 정승을 시켜줘 뭐. 성실히 도둑질을 해야지.
-예전에 <매혹>을 준비하면서 그 영화는 스타일리시하게 찍을 거라 이야기했는데. <님은 먼곳에>에선 그런 욕심이 없었나.
=<매혹>? 그건 투자자한테 ‘빠꾸맞아서’ 할 수 없이 엎었지. (웃음) 난 한번 빠꾸맞으면 바로 엎는다. 다음에 준비하는 게 스타일리시한 거야. 가제가 <7번 국도에 사무치다>. 제목 멋지지 않아? 근데 <님은 먼곳에>는 (순제작비가) 70억원 이상이 될 이유가 없는 이야기다. 드라마의 사이즈가 버짓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이건 딱 70억원짜리다. 물론 돈 더 들여서 비주얼의 스펙터클을 키울 순 있겠지. 근데 전세계에서 비주얼 스펙터클 키우는 게 미국이랑 중국밖에 없다.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다른 나라 영화 다 봐도 비주얼 스케일 안 늘린다. 감독의 과도한 욕심이 돈으로 환원되지 못할 때, 그건 다른 영화 제작에 미치는 악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7번 국도에 사무치다>? 그건 어떤 영화인가.
=다음주에 사전 조사차 7번 국도에 간다. 주제는 가슴의 상처는 더 큰 상처로 덮는다랄까. 가슴의 상처는 내상이잖아. 그건 치유가 안 돼. 더 큰 상처로 잊는 수밖에 없어.
-<즐거운 인생>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동안 100%였던 흥행 감각에 대해 스스로 의심은 없었나.
=<즐거운 인생>은 조금 손해본 정도다. 그래도 100만은 넘었어. 나는 트렌드에 편승하지 않는다. <황산벌>도 그렇고 <왕의 남자>도 그렇고. <즐거운 인생>은 소재가 대중에 잘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 좀 있었던 것 같고, 40대 관객이 오피니언 리더가 아니라는 점도 안 좋은 요소였던 것 같다. 40대 일상을 다룬 영화를 누가 보고 싶겠어? 그래서 잔머리 써서 장근석 밀어넣은 건데. (웃음)
-장근석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항상 캐스팅은 정승혜 대표가 정해준다고 하면서 배우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활용한다는 느낌이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박중훈을 비롯해서.
=나는 연기 디렉션을 잘 안 한다. 내가 만날 날로 먹는다고 하는 게 그거야. 캐릭터를 배우에 맞추니까. 시나리오에도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별로 없어. 지문이 없잖아. 2시간짜리 영화에 신이 60개 남짓이니. 지문 있으면 내가 다 지워버려. 배우가 알아서 채울 걸 작가가 왜 쓰고 있어. 장근석은 나름대로 <즐거운 인생>을 통해 배우로서 전환점을 맞은 것 같고. 보람있다.
-아까 라이프 이즈 서든리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 갤러리를 개업하고 전시 <라이프 이즈 서든리>를 열었다.
=옛날에 내가 그린 작품이랑 다른 작가들 거 같이 전시한 거다. 갤러리는 1000에 40만원짜리. 6평, 코딱지만한 거다. (웃음) 내 그림도 3개 팔렸다. 요즘에 드는 생각이, 사람들이 돈 버는 걸 목적으로 생각하는데 참 이상한 것 같다. 돈을 벌면 집을 바꾸고, 차를 바꾸고, 골프를 친다. 더 벌면 또 집을 바꾸고 차를 바꾸고 골프를 친다. 그게 목적이다. 정말 이상하지 않나. 나는 가난한 예술가의 영혼에 물을 주는 거, 그게 돈을 버는 가장 훌륭한 목적 같다. 내가 갤러리를 하는 것도 재테크가 아니라 예술가의 혼을 사는 거다. 누구나 인간은 예술가로 태어나지만 살면서, 돈을 벌면서, 학교 다니면서 예술적 본능을 발휘할 기회를 빼앗긴다. 열심히 일하다보니 예술적인 부분들을 놓치는 거지. 나도 그동안 집단주의적으로 살아왔던 것 같고 좀 개인주의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런 거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랑 한주 차이로 개봉한다.
=대결은 좋은 거다. 선의의 경쟁이지. 관객의 마음을 서로 사겠다고 경쟁하는데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겠어? 관객은 즐거운 거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