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김혜리가 만난 사람] 코미디언 김미화
2008-05-16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코미디는, 그리고 세상은

초인종처럼, 오후 6시 시보가 울렸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주파수를 맞췄다. 5분 뉴스가 끝나자 행진곡풍 시그널이 흐르고 김미화가 오늘의 가장 인상적인 뉴스를 브리핑하며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1부를 연다. 낱말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천천히. 아마도 그녀가 정한 오프닝의 철칙인가보다. “신기하죠? 방송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뭐에 혹하는지 다 아는 모양이에요. 이 프로그램 오래 하는 걸 보면.” 간간이 혀를 차며 경청하던 아저씨가 신통해한다. 2003년 첫 전파를 탄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이른 출근 시간대의 <손석희의 시선 집중>과 더불어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양쪽 날개다. 두 프로그램의 결은 판이하고 상호 보완적이다. <손석희의 시선 집중>을 들으면 찬물로 머리 감듯 정신이 번쩍 난다. ‘시사(時事)의 신’ 앞에 뉴스들이 줄을 서서 품평(?)을 받는 광경이 떠오른다. 인터뷰 대상의 정파를 막론한 손석희의 공평한 ‘쌀쌀맞음’은, 밥벌이 전장으로 나서는 아침 청취자에게 적당한 긴장을 선사한다. 반면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하루치의 노동과 실망을 감당하느라 피곤해진 해질녘의 귀에 살갑게 달라붙는다. 황당무계한 뉴스의 자초지종을 헤아리고 싶지만 생각할 기운조차 달리는 시간, 그래도 피해를 입은 이웃이 우선 안타까운 우리 대신 김미화는 전문가들에게 재우쳐 묻는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대요?”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드문 김미화의 최근 히트작은 그녀가 최초로 기획안을 만든 <개그 콘서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스탠딩 코미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 된 이 작품은 물론 재미있기도 했지만 “웃겨야 산다”는 젊은 코미디언들의 절절함과 열정이 중독성을 발휘하는 코미디였다. 코미디언들이 얼마나 다재다능하고 지적이며 치열한 대중예술인들인가를 시청자는 폭소 속에서 재발견할 수 있었다. MC 김미화는 25년차 코미디언 김미화와 절연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세상만사를 시시콜콜 궁금해하는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김미화 옆에는 셋방살이하면서도 집주인에게 결코 기죽지 않았던 새댁 순악질(‘쓰리랑 부부’), 스타 아니라 스타 할아버지도 화장실은 간다는 사실에 착안해 대중의 호기심을 대신 풀어주던 방송사 미화원 삼순이 아줌마(‘삼순이 블루스’)가 붙어 앉아 있다. 토크쇼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김미화는 끊임없이 웃기고 싶어한다. 아니, 웃음을 구한다. 느닷없이 구성지게 <새타령>을 부르는 정도는 보통이고, 아이를 얻은 기자에게 오늘의 경제지표를 확인하기 전에 아내한테 인사 한마디 하라고 재촉하기도 한다(그러면 또 한다는!). 이제 패널들도 그녀의 흥에 전염된 눈치다. “물 왜 안 드세요?” “기자들은 물먹는 거 싫어합니다” 같은 대화가 예사다. 그러나 김미화의 진행에서 유머는 개그맨의 프리미엄을 살리는 특별부록이 아니라 본령이다. 그녀의 화법은 우리가 뉴스에 귀기울이고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근원적 이유를 환기시킨다. 요컨대 우리는 눈앞에 있는 타인을 걱정하고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때 온기를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쇼에 출연한 ‘클론’의 강원래에게 “그 눈높이에서 보는 세상은 어때요?”라고 물을 때 아무도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더불어 미소지을 수 있는 진행자가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수십개 비정부 시민운동단체에 참여하는 김미화의 활동을 꾸준히 지켜보았다면, 그 질과 양이 당위와 책임감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모르는 분야라면 배워서라도 돕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경지다. 지난 2003년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처음 기획, 연출한 정찬형 MBC 글로벌 사업본부장은 그가 파악한 김미화의 능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본을 외건 원고를 읽건 진행자 본인의 마음과 생각에 맞닿아 있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요즘 청취자는 예민해서 맘에 없는 소리를 하면 금방 눈치를 챈다. 사안에 따라 1인시위도 꺼리지 않는 김미화씨의 활동을 보면서 때로는 뜻을 위해서 손해도 감수할 수 있는 연예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야기를 던져놓으면 살아 뛰게 만드는 진행자다.” 김미화는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변화한 인물로도 간주되지만 달리 보면 코미디부터 NGO 참여까지 그녀의 모든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한 가지 소망이 계속 외연을 불려온 결과다. 매니저 없이 수첩을 손수 채워가며 일하는 그녀는 인터뷰 도중 몇번이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모든 통화를 “감사합니다”로 맺었다. 그러고는 놓았던 대화의 실마리를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정확히 멈추었던 그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인터뷰하실 때면 대개 기자를 학교나 방송사로 부르시는 모양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매니저 없이 활동해온 것은 아니죠?
=<쇼 비디오자키>(1986)의 ‘쓰리랑 부부’를 할 무렵에는 매니저가 있었죠. 돈 벌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쓰리랑 부부’가 그런 시기의 정점이었는데 그러다 제가 뱃속의 아기를 잃었어요. 제 일 욕심이 돈에 관한 욕심인지 성취감을 위한 건지 다시 생각했죠. 돈에만 연관된 일이라면 진짜 성취와는 상관없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랬는데! 그렇게 결심하니까 돈이 쫓아오더라고요. (웃음)

-운전이라도 다른 분이 도와주시면, 이동 중에 자료라도 읽을 수 있을 텐데요.
=혼자 있는 차 안 공간을 아주 소중히 생각해요. 전 음악도 혼자 듣고 시장도 혼자 가고, 낙지볶음이나 추어탕 같은 음식도 혼자 식당 가서 사먹어요. 방송사 근처 식당 아주머니들은 으레 “아, 김미화씨 오셨네?” 하고 알아서 차려주세요. 일하는 동안 항상 스탭들과 있으니 나머지 시간은 혼자 있으려고 해요. 누가 운전해주면 불편해서 뒷좌석에서 온전히 다리 뻗고 쉬질 못하는 성격이에요.

-2003년부터 MBC 라디오에서 진행해온 시사 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흔히 연예인에겐 시간이 돈이라고 하잖아요. 인기 높을 때는 ‘행사'를 뛰면 시간당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당시 인기가 높은 상태에서 황금시간대에 매일 2시간 생방송을 결심한 건 단지 한 프로그램을 하느냐 마느냐 이상의 결단이었을 듯합니다. 장기적으로 인생에서 뭘 얻고 뭘 버릴까의 결단이랄까.
=정찬형 프로듀서(현 MBC 글로벌 사업본부장)가 찾아와 제안을 했을 때 “게스트로 일주일에 한번은 할 수 있다”며 선수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마흔이 넘으면서 사회적 책임을 나눠야 하지 않겠냐”며 약점을 찌르시더라고요. 이미 여러 시민단체를 돕고 있는데 굳이 라디오에 시간이 묶여서 일할 필요까지 있을까 했더니, 발로 뛰어 기여할 수도 있지만 방송으로 더 큰일을 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군요. 또 MBC 라디오에서 일하는 건 연예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해요. 라디오는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매체예요. 텔레비전은 감정을 표정과 눈빛으로 속일 수 있지만 라디오는 절대 가짜로 할 수 없어요. 목소리의 떨림이 먼저 진실을 전하거든요. 신기하죠?

-정찬형 본부장님이 설득할 때 시사 프로그램 2년 하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값하는 내공이 생긴다고 하셨다면서요. 배우는 걸 좋아해 그 대목에 넘어가신 것 아닌지. (웃음) 사실 공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한국의 시사 프로그램만한 학교가 없을 거예요. 오늘 뭐 하나 알아두면 내일 또 다른 분야에서 일이 터지니까요. 그런데 처음에는 광고주들이 회의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광고야 PD가 걱정할 문제고 저야 잘 안 되면 잘리는 것이고 잘되면 오래가는 것이고. (웃음) 다만 MBC가 인내를 갖고 기다려주는 면이 있죠. 방송을 20년 했는데 설마 떨까 했는데 막상 그 큰 라디오부스에 혼자 앉아 있으니 누구든 떨리겠더라고요. 시그널 음악이 나오자 마음은 안 떠는데 몸이 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날 방송 들은 분들은 “저래서 시사 프로 하겠어?” 했을걸요. 방송 끝나고 문 열린 화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우리 PD가 소변을 보며 벽에 머리를 찧고 있더라고요. (좌중 폭소) 아마 내가 저 여자를 왜 데려왔나 싶었겠죠. 무척 미안했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오더니 제 앞에선 막 칭찬하면서 격려를 해주더라고요.

-방송을 듣다보면 상대를 좋게좋게 감싸면서 대화해야 본인도 마음이 편한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협의 중입니다”, “A를 하면서도 B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같은 관료적인 두루뭉술한 답변이 나오면 “그래도, 저기, 대략 언제쯤 윤곽이 나올까요?” 하며 꿋꿋이 물고 늘어지시더군요.
=역시 정치인들과의 인터뷰가 가장 힘들어요. 가끔 호통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면 그냥 받는 거죠. 거기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고요. 진심은 제가 아니라 청취자가 느끼거든요. 저 정치인이 가는 길이 맞구나, 아니야 저 사람 말은 가짜구나라고 듣는 분들이 느껴요.

-사실 저는 라디오 전화연결 인터뷰가 듣기 부담스러워요. 질문자와 답하는 사람의 의중이 확실히 어긋날 때 저걸 어찌 마무리짓나 조바심이 나서요. 더구나 1분에 몇회 웃어야 한다 계산하며 연기해온 코미디언으로서 대화가 초점없이 흘러갈 때 초조하지 않으세요?
=다행히 제가 아나운서들과 교양 프로그램 MC를 많이 해봤어요. 아나운서들이 처음에는 딱딱하게 진행하는데 어느 순간 제가 유도하는 쪽으로 빠져들다보면 상당히 실력이 향상된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방향으로 게스트들이 빗나갈 때 쓰윽 끌어오는 개그맨만의 능력이 있나봐요. 저희 프로그램에서 뉴스 브리핑을 하는 기자들도 처음에 제가 툭툭 애드리브를 던지면 “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하고 짜증냈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 비 오는 날 넌지시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하는 노래 한 소절 해보시라고 부추겨 생방송 중 어쩔 수 없이 기자가 노래를 한 거죠. 막 부끄러워했는데 막상 방송 끝나고 친구들이 전화해서 재밌었다고 칭찬을 해주면, 다음부터는 제가 뭔가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애드리브 하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내요. (웃음)

-확실히 김미화씨가 긴장을 풀고 진행하니 패널들도 화법이 달라지는 걸 느껴요. 청취자 눈높이에 맞춰서 기본적인 개념도 되묻고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큰 강점입니다. 하지만 이제 김미화씨도 5년쯤 진행을 하다보니 식견이 쌓였잖아요? “이런 견해도 있던데요”라는 인용 대신 ‘나’를 주어로 반론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가끔 생기지 않습니까?
=어느 부분에서는 의견을 밝히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해서 패널의 대응을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게 더 좋은 방송이라고 생각해요. 또 오늘 우리 프로를 처음 듣는 청취자도 있을 테니, 제가 아는 부분을 모두들 안다고 치고 이야기하면 무례라고 생각해요.

명랑한 성격이 인자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본래 밝은 성격이죠?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내성적인 시기가 있었다고도 들었습니다만.
=명랑한 성격이 인자 속에 있는 것 같긴 해요. 아버지가 폐를 앓아 누워계실 때에도 어른들 앞에서 이미자씨 노래 흉내내고 1원씩 5원씩 받아 군것질하는 재미에 나돌아다녔어요. 수유리 천지촌 부근 반지하방에 살았어요. 창문 위로 사람들 발이 지나다니는. 엄마는 보따리 옷장사를 하느라 시골을 다니다 한달,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오시니 제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만날 논둑 밭둑 뛰어다니며 노래하고 삐라 줍고 자연을 즐기고…. (웃음) 환자 입이 계속 마르는데 주전자에 거즈를 담가 아버지 입가에 연결해놓고 나가 놀았어요. 어디서 그런 잔머리가 나왔는지! 그러다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해장국집 하느라 날 돌볼 정신이 없었죠. 한 친구가 “아빠도 없는 게”라고 놀려서 걔를 때렸는데 선생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제게 의자를 들려 벌을 세웠어요. 반항심에 학교를 안 가고 길음시장에서 살다시피했죠. 결국 선생님이 집에 연락을 했고 엄마가 일수 찍는 치부책에 칸을 그려서 학교 갈 때마다 선생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사인이 너무 쉬운 거예요. (웃음) 며칠 학교 다니다 그냥 사인을 제가 흉내내고 한동안 또 안 갔죠. 그제야 엄마가 상황을 알고 전학을 시켜줬어요. 새 학교 친구들은 제가 아빠 없는 아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때 “아, 나를 놀린 그 애한테 내가 아빠 없는 아이 표시를 낸 게 화근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까불고 명랑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약간의 성격 개조였다고나 할까?

-시장 골목이 중요한 추억의 장소겠네요.
=정말 그래요. 지금도 친아버지 사진이 한장도 없어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데 그때 시장에 뻥튀기 파는 아저씨가 돌아가신 아버지랑 너무 닮아 종일 쫓아다닌 적이 있어요. 혹시 우리 아버지가 살아서 왔나 하는 어린 마음에.

-김미화씨는 지금도 맏딸 기질이 강해 보여요. 뭔가 사달라고 조르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알고 나아가 여차하면 엄마를 내가 보호하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딸 있잖아요. 어머니는 맏딸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나요?
=지금 생각하면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죠. 너무 일찍 혼자가 된 엄마는 심한 고생을 했어요. 동네 개들에게 쫓기며 보따리 행상을 할 때는 “옷 사세요” 소리칠 용기가 안 나 10원짜리 크림빵 대신 막걸리 10원어치를 마시고 기운과 용기를 내서 호객을 했대요. 손님들이 모두 간 뒤, 자식 붙들고 그런 눈물어린 하소연을 하실 때면 엄마한테 정말 잘해야지 가슴이 무너졌어요. 저는 정말 속을 안 썩였어요. 3km 등하굣길을 걸어다니며 차비 100원을 모아 천원, 만원 만들어 갖다드렸죠. 일찍 일어나 시장에 가서 배추 시래기를 마대에 얻어서는 갈래 머리 위에 이고 엄마 해장국집 재료로 갖다드리고 등교했고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공사판에서 하던 함바집에 라면을 끓여 날라준 다음 남은 라면을 먹었어요. 엄마는 지금도 제 말이라면 서방님 말보다 더 솔깃하고 다투다가도 한마디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요. 그런데 엄마가 가여우면서도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컸죠.

-어쩌면 그래서, 첫 결혼을 일찍 스물셋에 한 걸 수도 있겠네요. 어서 내 가정을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 잘해보고 싶어서요.
=나중에 엄마를 원망한 적도 있죠. 엄마한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하면서요.

-어렵게 유년을 보내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인터뷰에서 “당시엔 집이 어려우면 고아원에 보내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고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 걸 보고 실감했습니다.
=사실 저를 외국에 입양 보내려 한 적이 있대요. 주인집 할머니가 색시 너무 고생한다며 입 하나 덜라고 소개를 해준 거죠. 외국인 군인 두명이 집에 왔는데 팔뚝의 노란 털이 선명히 기억나요. 근데 엄마가 마음을 바꾸셨죠. 커서 왜 그때 미국 안 보냈냐고 따지기도 했어요. “갔으면 오프라 윈프리 저리 가라였을 텐데” 하면서. 하하.

-포옹하는 걸 좋아하시죠? 웬만한 남자연예인하고 나란히 서면 겨드랑이 밑으로 쏙 들어가요.
=그래서 만든 아이디어가 서세원씨와 했던 KBS <코미디 세상만사>의 ‘밤이면 밤마다’였어요. SBS 전속기간을 끝내고 프리랜서 선언하면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죠. 잠옷을 입고 날마다 남편을 바꾸는 스토리라 공영방송에서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덤덤한 반응이더라고요. (웃음) 예쁜 연예인이 했다면 너무 선정적이라고 했을 텐데. 나중에 세어보니 제가 이백몇십명 남편을 바꿔가며 안아보고 누워보고 했어요. 출연자들에게 부인이 뭐라 안 하더냐 물었는데 “김미화씨랑 하는 거라면 전혀 상관없다”고 했대요. 기분 나쁘죠. (웃음)

-지금이야 스탠딩 코미디나 버라이어티가 주류가 되면서 연기 도중 코미디언 자신이 웃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김미화씨는 <쇼 비디오자키> 때부터 웃음이 많으셨어요.
=웃음이 많아서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한 컨셉이에요. 당시 여자 코미디언은 꽃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맞장구만 치는 예쁜 여자들을 보면서 왜 저럴까 고민했어요. 그 이면엔 제가 꽃이 될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 꽃으로서는 결코 선택될 수 없다는 점도 있었죠. 그럼 내가 살길은 뭘까, 성 구별없이 함께 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된다고 느꼈어요. KBS 2기 개그맨으로 김한국, 이봉원, 이경애, 조금산, 임미숙 등이 있었는데 그중 대장인 김한국씨와 제가 아이디어 놓고 많이 싸웠죠. 뭘 하더라도 김한국하고는 절대 안 한다고 이를 갈았는데 ‘쓰리랑 부부’ 콤비가 됐어요. (웃음) 싸우면서도 저 사람은 프로다 느낀 거죠. 그 무렵에는 연기하다 웃으면 NG였어요. 연기자가 웃으면 방청객과 시청자는 어디서 웃으라는 거냐며 혼났죠.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했어요. 편집할 때 코미디 프로그램에 가짜 웃음을 깔잖아요. 따라 웃게 하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부적절한 강도로 들어가면 설거지하다가도 굉장히 귀에 거슬려요. 그래서 전 아예 틀을 깨고 그냥 내가 웃자고 생각한 거예요.

-1999년 출범한 <개그 콘서트>의 산파 역을 하셨죠? 선후배가 새로운 양식 안에서 같이 연기하는 건 놀랍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후배를 더 돋보이게 하는 연기를 기꺼이 선배가 하는 태도가 신선했습니다.
=산파가 아니고 제가 낳았다고 할까. (웃음)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연극식으로 관객을 모으면 재밌겠다 싶었고 백재현씨는 그런 연극을 이미 하고 있었어요. PD가 관객이 안 오면 어쩌나 겁을 내서, 첫회는 컬투 삼총사가 나온다는 걸 부각하고 신인개그맨도 함께한다는 내용을 뒤에 붙였죠. 컬투가 대학로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 그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다면 방청객에게 메리트가 생기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 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 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장면을 수십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켜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저는 모든 사회 부문이 여러 개의 탄탄한 층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요즘은 자칫 잘못하면 선배만 있고 후배는 없거나, 선배는 없고 후배만 있는 코미디가 될까봐 걱정이 돼요. 그맘때 저는 서세원씨와 방송사에서 7년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시청률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언니는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지만 너무 어른들을 위한 코미디만 하는 거 아냐? 고루해 보여”하는 거예요.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

제가 정해놓은 묘비명이 “웃기고 자빠졌네”예요

-김미화씨는 여러 문제를 그런 식으로 확장해서 사고하시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개그 콘서트>는 맞아떨어졌어요. 그러나 약간의 오산이 있었죠. <개그 콘서트>를 기획했을 때 저는 <젊음의 행진>의 ‘짝궁들’처럼 1, 2, 3, 4기를 배출하고 그중에 스타를 만들어 다른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형태를 생각했어요. 그때 KBS 코미디 프로그램이 세개였는데 예컨대 심현섭, 김영철이 개콘 1기의 스타로 배출된다면 그들을 선배 프로그램으로 보내 기운을 불어넣고 개콘은 2기를 뽑는 거죠. 그러면 세 프로그램이 다 살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방송은 제 생각보다 더 상업적이었어요. 개콘이 잘되니 출연자들에게 다른 프로를 못하게 했고 오히려 다른 프로그램이 폐지된 거예요. 개콘이 제작비 대비 효과가 컸으니까요. 신인은 출연료가 저렴한데다 원래 제가 요구한 컨셉이 빈 무대에 조명만 때리는 거라서 세트도 없었거든요.

-동세대 코미디언들에게는 어쩌면 김미화씨가 원망을 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요. 미안한 부분이에요. 전 그저 가수 팬클럽이 찾아와 “누구 짱” 하듯 개그맨도 환호받는 풍경을 보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어요. 발전적 방향으로 간 건 맞는데 기성 코미디언 설 자리가 없어진 건 실수였다 싶어요.

-그런 오차도 경험했으니 본인 이름을 건 코미디 프로덕션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던 ‘쓰리랑 부부’ 시절 경험이 있어서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직 현장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정해놓은 묘비명이 “웃기고 자빠졌네”예요. (좌중 웃음) 저는 나이 들어도 방송사에 아이디어를 들고 갈 수 있고 후배들이 코미디를 잘하면 나 좀 키워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든 스며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호호 할머니 컨셉으로 젊은이들 버라이어티 쇼 나가서 막 나무라고 웃기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충분히!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시사 프로그램 진행은 궁극적으로 더 좋은 코미디언이 되기 위한 것이고, 방송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건 세상에 도움을 줄 힘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씀해오셨어요. 목표의 위계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 사실 계획없이 살아요. 저희는 영원히 비정규직이잖아요. 며칠 전에 저, 낮 프로그램(SBSTV <김미화의 U>) 잘렸어요. 한 2년6개월 했나봐요. 그렇게 계획없이 살지만 우주의 힘은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남편과 재혼하고 처음 싸웠는데 제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 원인이었어요. 낮밤으로 일일방송을 하니 새벽에 나가 별 보고 들어가잖아요. 하루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놓았는데 몸이 힘들어 내려가보지도 않은 거예요. 밥을 차렸는데 눈도 안 떠보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서 힘들다니까, 몸 아픈 건 당신 일 욕심 탓이지 내가 보필을 제대로 못해서냐고 반문하더라고요. 하하. 정색하고 일 줄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PD가 “프로그램 잘립니다” 하는 거예요. “아, 네에” 하고 돌아왔어요. (웃음) 그럴 때 서럽긴 해요. 이번엔 안 그랬지만 PD들은 프로그램 지장 생길까봐 MC에게 잘리는 날 알려주거든요. 비정규직의 설움이죠. 암튼 상심해서 “여보 내가 잘린대요” 했더니 경사났대요. 그래서 “서방님은 말대로 되니까 좀 말을 조심해주세요” 했죠. (웃음)

-사실 <김미화의 U>가 처음 출범했을 때 제가 받은 인상은 김미화씨가 그냥 인기있는 MC로 기용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김미화씨가 시민운동 참여와 후배 양성을 통해 축적한 네트워크와 정보를 추수하는 기획이라는 느낌마저 있었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겠죠. 저는 자극이 생기면 그걸 심연으로 끌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박차고 올라가는 기질이 있어요. 물론 팀원들과 프로덕션은 섭섭해하고 일거리 걱정도 되지만요.

-<김미화의 U>는 그런데 회를 거듭하면서 사회적 이슈보다 육아나 살림, 개인의 입지전쪽으로 소재가 흐르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약간은요. 그런 색깔은 CP에 따라 달라지는데 평상시에는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면서 가끔 큰 건을 하나씩 턱턱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셨고 수십개의 시민단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미화씨의 자세를 보면 연예인으로서 사회복지에 도움을 준다는 입장이 아니라, 사회복지사업 입장에서 거꾸로 연예인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있어요.
=워낙 오래해서 그런가봐요. 사회 참여는 누구한테 보여주거나 인기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기에 보탬이 된다고 봐요. 제가 이만큼 오래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봉사하는 모습을 통해 김미화가 하는 한마디는 진실일 것 같다는 한 자락 믿음을 대중의 마음 저변에 깔았기 때문 아닐까요? 어떤 토크쇼를 하건 코미디를 하건 남을 돕는 이의 연기를 보는 것과 돕지 않는 사람의 연기를 보는 건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인 시절에는 프로그램에서 잘리는 것이 큰 아픔이었지만 지금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굳이 특정 프로 안에서 저를 못 보여줘도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제가 원하는 대로 끌어갈 수 있는 중량감을 축적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이 드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그렇죠? 2002년 데뷔 20주년 기념 <김미화의 코미디 스쿨>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노래 실력도 뛰어나고 후배들과 어우러져서 보여주는 코너들이 다 훌륭했어요. 4개월 준비했다면서요.
=오래 준비한 쇼였는데 AD가 실수를 해서 방청객을 다른 날짜에 모집했어요. 관객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공연이어서 부득이 돈을 주고 방청객을 불렀죠. 녹화 보이콧을 하면 방송사의 피해도 컸고요. 진짜 많이 울고 무대에 올랐어요.

-그때 무대 오프닝에서 “날 봐 비밀은 전혀 없어”라고 노래하셨죠. 지금은 헤어진 전남편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요. 오랫동안 힘든 결혼생활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 그 모습을 다시 보니 기분이 복잡해졌어요.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니, 때에 따라선 환경에 따라 아픔을 잊을 수도 있고 관계란 것이 꾸준히 나쁜 건 아니겠죠. 예전 남편이 다른 건 몰라도 제 활동에는 많은 지지를 보내준 편이었어요.

-힘들 때 운다고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2005년 초에 이혼으로 사생활에 큰 매듭을 지었는데 바로 그해에 많은 일에 뛰어드셨어요.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시작했고 <김미화의 U>도 그해 출발했죠.
=제가 일을 벌이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일은 줘야 하죠. 방송사 PD들에게 너무 고맙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이유가 그때 경험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연일 제 이혼을 대서특필하는 와중에 PD들이 저를 하차시키지 않고 외려 새 일거리들을 줬어요. <TV, 책을 말하다> PD도 방송사 뒷문으로 다니고 있는 저한테 와서 섭외를 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저 지금 복잡해요” 했더니 그거랑 상관없이 해달라고 하셨어요. <세계는 그리고 지금은> PD도 어쩔 거냐는 기자들 질문에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일은 일인데 김미화씨 일 잘하고 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느냐. 아무 계획없다”고 대답해줘서 저를 편견에서 꺼내줬어요. 그런 기사가 나가면 타 방송사의 생각도 영향을 받죠. 헛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이혼한 여자가 뭐 할 말이 있어 방송에 나오느냐”고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저 역시 그게 무서워서, 내 일을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져 아이들한테 불행한 엄마의 모습을 보일까봐 오랫동안 망설였던 거고요.

온 동네 도로포장을 뜯는 운동을 해볼까 해요

-모든 연예인이 그렇지만 속으로 우는 일이 익숙하실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예전 제 삶이 참 슬퍼요. 어느 날인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어,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이 퍼뜩 들었어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서 더 잃는다 한들 뭘 잃을까 하는 각성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요. 배추장사든 풀빵장사든 하자, 리어카 끌고 눈썹에 테이프 붙이고 ‘순악질 풀빵’, ‘일자눈썹 풀빵’이라고 팔면 사람들이 길에서 많이 사줄 거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좌중 눈물 글썽이다 폭소) 그날로 결심하고 PD에게 먼저 “이런 소송을 할 건데 저를 자르세요” 했죠. 음, 그래서 더 부담되어 못 잘랐나? (웃음) 재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여태 살아온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건데.

-<TV, 책을 말하다>를 함께 진행한 장정일 작가께 들었습니다. 때로는 게스트조차 불성실한 패널일 경우 정독을 안 하고 오는데 김미화씨는 바쁜 와중에도 한권은 반드시 완독하고 방송에 임해서 놀라웠다고 하시더군요.
=그 프로그램 하면서 간이 나빠졌어요. 밤중까지 일하고 다시 새벽까지 책을 봐야 하니까. 흥미있는 분야 책은 빨리 읽히는데 때로는 그 뭐냐 우주의 탄생에 관한 책도 읽어야 하니까, 쩝. 그래도 읽어보고 가는 것과 안 읽고 가는 건 달라요. 당시에는 한회에 네댓권씩 소화해야 했어요. 그런데 공짜로 책을 주는 게 너무나 기뻐서 “와 이거 좋은 프로그램이다” 신이 났죠. (웃음)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죠.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고 코미디가 발전해야 나중에 돌아갈 곳이 있을 거란 말도 하셨고요. 그런 말씀을 들으며 <친절한 지주님>이라는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소작인들에게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지주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돼요. 순진한 그녀는 자기를 대하는 모습만 보고 남편이 아주 선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만 믿다가 딸 하나를 남기고 숨졌어요. 엄마를 닮은 딸은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동네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운 이웃들을 “우리 아빠가 도와줄 거야”라며 집으로 데려오죠. 지주는 “이건 내가 아닌데” 하면서도 딸의 믿음대로 재산을 마을 곳곳에 퍼주고 결국 빈털터리로 죽습니다. 하지만 한푼 없이 남겨진 그의 딸을 이웃은 마을 전체의 아이로 소중하게 키웁니다. 마을 전체를 딸에게 남겨준 셈이 된 거죠. 장황해졌는데 내 가족의 부를 축적하기보다 나를 둘러싼 사람과 세상에 부조해서 나를 확장하고 내 가족을 확장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어요. 오래된 것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노인들이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두레가 살아 있고 유기농 음식을 먹던 외국의 한 시골 마을이 있었어요. 그러던 마을이 산업화되고 젊은 애들이 돈 벌러 외지로 나가면서 황폐해지죠. <친절한 지주님> 이야기처럼 동네 어른들이 아이를 키워주고 지혜롭게 해주는 것이 젊은 엄마들의 일을 크게 덜어주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모든 게 개인적이잖아요. 제가 지금 사는 시골로 이사한 이유도 그런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라서예요. 얼마 전 한 TV다큐멘터리를 보니 영국 한 마을에서 포장을 뜯어내고 있더라고요. 우리 동네도 도로가 비포장이라 집에 들어가면 진흙구덩이에요. 그런데 길섶에 풀이 돋아나고 내린 빗물이 땅 밑으로 빠져 자연이 순환하는 걸 보면서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삶이구나 절감해요. 지열이 괴면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잖아요. 지금은 이장님이 길을 깔아주신대도 사양하고, 도리어 온 동네 포장을 뜯는 운동을 해볼까 싶기도 해요. 한 마을에서 뜻을 모아 오래된 것으로 돌아가는 거죠.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들었지만 정부가 기본적인 예산 운영 방침을 얼마 전 발표했는데 사회복지예산을 최소화하고 개발연구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했더군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힘이 빠지지 않으셨나요?
=힘빠지죠. 사실 지금 책정된 복지예산도 많지 않고 골고루 돌아가지도 않아요. 사회가 정말 잘되려면 진심을 담아 복지를 해야 해요. 시민들이 당당히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등록금 걱정 없도록 나라에서 해주면 아이들이 나라를 위해 반드시 봉사하고 그 투자가 돌아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대출의 이율도 높고, 도와주는 듯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사람 입장에 입각해 돕는 정책은 매우 부족해요. 개인적으로는 복지예산을 늘리면서도 다른 분야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정치를 안 해봐서 모르고 거기도 나름 아픔이 있겠지만요. 건강보험 민영화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모양이라 다행이에요. 제가 배울 때도 그렇게 가면 안 된다고 배웠거든요. 그래서는 정말 안 되는데….

追伸 “방송에 달통한 그를 초심자가 파트너로 얻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김미화와 인터뷰를 나누는 동안 그녀와 <TV, 책을 말하다>를 나란히 진행했던 장정일 작가의 전언을 체감했다. “팰 데가 없는 게 아니라 빈틈이 없는 것이제!”라는 순악질 여사의 호언장담도 새삼 떠올랐다. 그녀가 노를 젓는 배에 무임승차한 기분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한 일이 없다는 자격지심에 곧이어 시작될 생방송 견학을 청했다. 방송 20분 전. 그녀는 대본에 띄어읽기를 표시하고 신문 더미에 고개를 묻었다. “쇠고기 협상은 전 정권의 설거지”라는 주장을 읽으면서는 “설거지를 하려면 깨끗이 해야 하는데”라는 네 아이의 엄마다운 혼잣말을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라디오국의 여러 동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포옹을 나누고 갔다. 생방송 스튜디오는 연날리기를 하는 현장과 비슷했다. 작가, 스탭, 패널, 프로듀서 모두 따로 조용히 움직이면서도 한결같이 연이 땅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목표로 팽팽히 긴장해 있었다. 조금 아까 자신을 비정규직이라고 표현했던 김미화에게 작가들은 노동절 생방송을 여는 말로 적절하게도, 닷새 황금연휴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비정규직/외국인 노동자들을 기억하자는 멘트를 써주었다.

라이브 공연까지 수용하는 큼직한 생방송 스튜디오 안에 홀로 앉은 자그마한 체격의 여인은 아주 외로워 보였다, 라고 취재수첩에 쓰는 순간 김미화는 ‘뒤통수퀴즈’ 코너의 효과음을 위해 자신의 뒤통수를 아낌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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