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미스코리아’형 헤어스타일에다 귀여움과 섹시함을 겸비한 구숙정은 ‘귀여운 글래머’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배우였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애정표현을 하기가 쑥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적나고양>(1992)과 유위강의 <강간>(1993) 시리즈 등 이른바 3급전영(미국으로 치자면 R등급의 성인영화)의 히로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적나고양>에서는 쓰레기 같은 남자들을 청소해 사회를 정화시키려는 프로 여성킬러로 나온다. 이야기 전개와는 무관하게 종종 란제리 패션으로 등장하거나 괜히 수영장에서 뒹굴며 뭇 남성 팬들을 즐겁게 했다. ‘에로영화’라는 관점에서 노출이나 묘사 수위가 아쉽지만 구숙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디오숍은 불이 났다. 온갖 성적 테크닉을 체득한 황후 역할의 <외전혜옥란>(1995)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3급전영이 아니라도 그는 늘 섹시했다. <시티헌터>(1992)에서 속옷 차림으로 벌이던 격투신, <추남자>(1993)에서 에어로빅복이 유난히 어울리던 임청하의 둘째 동생 역할도 기억에 남는다. 가끔 그 섹시함을 감추기 위해 뿔테 안경을 쓰고 나올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더 돋보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장만옥이나 왕조현 못지않은 나의 연인이었다.
1968년생으로 이제 마흔살이 넘은 구숙정은 과거 미스 홍콩대회 출신으로 맨 처음 왕정 감독에게 발탁됐다. <최가손우>(1988)를 시작으로 <정고전가>(1991), <의천도룡기>(1993), <홍콩무희>(1995) 등 그의 이력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왕정 감독인데, 한때 하고 많은 홍콩 영화인들 중에 하필이면 ‘돼지’ 왕정과의 열애설이 퍼지면서 남성 팬들의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현재 은퇴한 상태의 구숙정은 대부호의 사모님으로 딸 하나가 있다). 그래도 왕정은 구숙정이 홍콩 여배우들 중 빨간 립스틱과 의상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발견한 장본인이긴 하다. 당시 상대역은 주로 주성치와 이연걸이었다. <녹정기>(1992)에서 건녕공주로 나와서는 주성치의 거시기를 잡고 흔들기도 했고, 급기야 호랑이 붕알로 만든 수프를 만들어 유혹하기도 했다. 또 <의천도룡기>(1993)에서 장무기(이연걸)와 함께 도망다니던 붉은색 의상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속편을 예고하듯 끝난 이 영화는 결국 제작비 문제로 속편이 만들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3급전영에 출연할 때와 달리 대부분의 영화에서 구숙정이 지고지순한 순정파로 등장했다는 점은 재밌다. <여락>(1992)에서는 유덕화의 풋풋한 첫사랑으로 등장하고, <정고전가>에서는 남친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새 남자 주성치를 만나고, <산사초>(1997)에서는 유랑 인형극단의 어여쁜 수연낭자로 나왔다(여기서 갈민휘는 주성치의 꼬임에 빠져 구숙정과 키스하려다 결국 돼지 혓바닥을 쭉쭉 빨게 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귀여움과 섹시미를 떠나 장만옥처럼 진정한 연기파로 거듭나려던 순간 은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였던 1940년대 배경의 시대극 <향항탈환>(1995)과 난생처음 짧은 단발로 출연한 관금붕의 <쾌락과 타락>(1997)은 꿈결같은 작품들이다. 그렇게 구숙정은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