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하소연의 숏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1]
2008-05-15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

이상하게도 나는 가와세 나오미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면 금방 소설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점점 그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게 된다. 그런 다음 이제 이게 비평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무아지경 속에서 결국 중얼거린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소설. 지금 나는 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을 오래전에 혹은 방금 전에 영화관에서 다시 보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쓰고 있으면 전기를 쓰기 위해서 번번이 도서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사료들로서의 영화. 혹은 고백을 기술하는 기록들. 가와세 나오미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면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사유하는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와 무언가 그녀에 관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영화를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헛된 시도이다. 하지만 그게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모험을 무릅쓰게 만든다. 유혹?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와세 나오미는 나를 꼬인다.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해, 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아니에요, 그건 너무 매정한 처사예요, 라고 그 누군가가 내 소매를 잡아 이끄는 것만 같다. 감싸 안고 싶은 알 수 없는 동정심. 물론 가와세 나오미가 만들어내는 하소연의 숏이 있다. 정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의 순간.

일본영화에서의 ‘문득’과 ‘불현듯’의 순간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녀의 첫 번째 영화) <수자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가와세에 대한 어떤 사실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상이 아니라 느낌. 그 부정확한 정감의 순간. 영화의 타하라 코조의 8mm영화가 아니라, 에이스케의 고모를 향한 수줍은 연정이 아니라, 그 에이스케를 향한 미치루의 막연한 호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와세 자신을 위한 숏이 등장할 때, 아아, 도대체 이건 무엇인가,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런 다음 가와세의 영화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기 시작했다. 두편의 다큐멘터리 <따뜻한 포옹>과 <달팽이>를 본 다음 이번에는 반대로 좀더 많이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왜 생겨난 것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부터 가와세가 만든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뒤죽박죽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가와세 자신이 그런 순서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가 갖는 물리적 길이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그걸 전달하는 경제적인 방법을 찾지도 않았다. 거의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는 동어반복을 하면서도 가끔씩 진행을 멈춰 세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과 마주 대하게 되는 극영화 <호타루>와(상영시간 2시간44분), 좀더 진행되었으면 하고 싶을 만큼 그냥 간결하게 사진작가 니시이 가즈오의 임종을 앞둔 마지막 여름을 담은 다큐멘터리 <벚꽃 편지>는(상영시간 1시간5분) 서로 이어져 있다. <사라소주>는 거의 수수께끼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냥 엉킨 실타래처럼 내버려둔 채 일상적 삶을 다루듯이 시각적 기호와 청각적 음향들의 순간들로 이어놓았다. 거의 끊어질 것처럼 진행되는 리듬. 그 아슬아슬한 경계. 가와세는 생활 안에서 사건의 지평을 본다. 그때 그녀가 무엇을 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려는 결심이 중요해진다. 그 순간 갑자기 이야기는 멈추고 동선의 블록이 깨지면서 인물들의 상태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무언가를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하소연의 숏을 만나게 되면 어떤 정교한 구조나 내밀한 이야기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느슨한 삶의 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 그 느슨함이야말로 일본영화가 발명한 틈이다.

종종 일본영화가 천재적이라고 느낄 때는 이야기의 리듬을 타고 흐르던 영화가 두개의 순간과 마주할 때이다. 하나는 문득, 이라는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불현듯, 의 순간이다. 문득과 불현듯, 이라는 두개의 개입. 시집을 가야 하는 딸은 마지막 여행에서 잠자리에 누워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다(<만춘>). 그때 영화는 아무 상관도 없는 텅 빈 화병을 ‘문득’ 보여준다. 그건 상징도 은유도 아니다. 그냥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한참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 말고 카메라가 ‘불현듯’ 바깥으로 나가자 한밤중에 집 저편 하늘에서 섬광처럼 번개가 칠 때(<번개>) 거의 무아지경으로 보던 그 누구라도 갑자기 멈칫하게 된다. 혹은 산주로가 두 무리로 나뉘어 칼부림을 하는 마을로 들어서자 ‘불현듯’ 바람이 분다(<요짐보>). 구로사와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때 멈추는 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며 그 순간 우주라는 시간이 흐른다, 라고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혹은 이 중단의 방법을 자유간접화법이라고 말하면 사실상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 결정적 순간을 부른) ‘영화로부터의 해방’을 다시 의미 안으로 수렴시키는 짓이다. 이 순간은 무한소급의 방식으로 의미를 자리잡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문득과 불현듯, 의 비밀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계열을 따라 바깥으로 나와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서 갑자기 빈칸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떤 도움도 없이, 이를테면 시점숏을 만드는 클로즈업이나 인물의 동선의 일치, 혹은 대사의 지시없이, 그냥 문득 생각난 것처럼,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건너뛴다는 것이다. 이걸 횡단이나 점핑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출현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자리가 없는 숏, 이라는 발명. 문득의 숏과 불현듯의 숏은 우리를 표면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끌어낸 다음 그냥 영화와 마주하게 만든다. 계열의 불연속. 그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등장인물의 내면의 리듬을 쫓아가다가 문득의 숏, 혹은 불현듯의 숏과 마주칠 때 영화의 내면을 마주보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두개의 내면. 등장인물의 내면과 영화의 내면.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등장인물의 사건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 사건의 진실, 혹은 거짓을 따져 묻고 난 다음 그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인물의 마음을 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인물이 아니라 영화의 표면이다. 문득의 숏과 불현듯의 숏은 그 표면에 틈을 만들어낸다. 이때 틈은 이야기를 장소로 되돌려 보내고, 등장인물들을 정물의 일부로 만들고, 사건을 세상의 범주들의 관계 속으로 옮겨놓는다. 일본영화는 세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기하학적인 도표의 형상처럼 다룬다. 문제는 그런 다음 다시 이야기에로, 등장인물들의 사건 속으로, 되돌아갈 때 생겨난다. 왜냐하면 운동은 연결되어야 하며, 리듬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모하게 고백하는 가와세 나오미의 방법

가와세 나오미는 그걸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스튜디오 시대의 대가들을 흠모하지도 않으며(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 야마나카 사다오, 시미즈 히로시, 이시다 다미조), 그렇다고 그것을 훈련받지도 못했다(구로사와 아키라, 이마이 다다시,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가와 곤). 미학적으로 철저하게 따져 묻지도 않는다(마스무라 야스조). 혹은 단호하게 저항하지도 않는다(스즈키 세이준,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그저 다 포기하고 시네필의 길을 택하지도 않았다(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그러므로 가와세는 그걸 연결할 때 방법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의미를 구하지도 않는다. 혹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알리바이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냥 그 숏이 부조화하는 대로, 가까스로 흘러가던 리듬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더라도,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문득 중단할 때, 그것이 물론 오즈만큼 미학적으로 굉장한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아직 그것으로 무언가를 해냈다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그러나 그 의지만큼은 그만큼 단호한 것이다. 같은 말의 반복. 여기에는 일인칭의 압도라는 의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당혹(當惑)스러운 숏(plan d’hesitation)인데, 그걸 볼 때는 정감의 숏(plan d’affection)으로 다가온다. 가와세는 그냥 무모하게 고백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불현듯 고백하듯이 문득 멈춰버린다. 그 앞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하지만 재빨리 다시 등장인물에게로 돌아간다. 나는 <수자쿠>를 보았을 때 그건 아직 가와세가 영화라는 방법에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가와 신스케의 네 명의 촬영기사 중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책임진 다음 가와세 나오미의 <수자쿠>를 촬영한) 다무라 마사키가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그런 식으로 진행하였다. 아무리 불편하고, 종종 아, 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되는 대목에서조차 그냥 그렇게 틈을 벌려서 하소연의 숏을 출현시킨 다음, 다시 되돌아갔다. <호타루>를 보았을 때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라소주>를 보면서 결국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중단하고서라도, 인물 사이의 구조를 포기하면서까지, 사건을 망치면서, 자기를 고백하는 숏을 문득 공존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그게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때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와세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가와세는 지금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다큐멘터리로 만족했을 것이다. 극영화의 존재 이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세상, 말하자면 던져진 세상. 그런데 그 세상 바깥에 있는 나. 두 세계의 공존의 방법. 가와세는 던져진 세상의 질서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때 가와세의 방법은 고백이다. 말 그대로 고백은 가와세 나오미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법이다. 그때 이 고백은 가와세의 사건이 아니라 기분이며 마음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가와세는 무언가 자기 안의 은밀한 것을 털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그걸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녀의 영화가 지닌 가장 불가사의한 순간이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일인칭의 고백의 숏. 하소연이라는 정감. 그러므로 그 고백의 일인칭 숏을 던져진 세상이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설명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그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를 자꾸만 구원하려 든다. 구원? 누가 누구를? 비평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모한 용기. 책에 의존하지 않은 소설 쓰기. 말 그대로 얘기꾼으로의 후퇴. 이때 베냐민은 내게 유용한 충고를 해준다. 얘기꾼이란 결국 무엇인가. “모든 진정한 얘기는 드러난 형태로든 숨겨진 형태로든 간에 유용한 그 어떤 것을 품고 있는 법이다. 이러한 유용성은 설교 속에 있을 수도 있고(설교로서의 비평?), 실제적 충고에도 있을 수 있고(삶에 관한 충고로서의 비평?), 또 속담이나 생활의 좌우명 속에 있을 수도 있다(속담으로서의 비평?). 아무튼 얘기꾼이란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얘기꾼과 작가)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 이 말의 역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로부터 내가 잃어버린 것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가 아닐까? 그래서 내가 무언가 가와세 나오미를 빌려서 조언을 하려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다음 가와세 나오미와 당신을 내가 중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다. 우리는 예술적 관찰을 포기하면 안 된다. 가와세 나오미가 만들어내는 하소연의 숏, 설명을 요구하는 그 틈. 우리는 하소연과 화해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와세가 행위로 이행하는 대신 계속해서 공존의 방식으로 머물려고 할 때 왜 그녀는 매개를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종합에로의 거부라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물론 이걸 가장 한심하게 설명하는 것은 가와세 나오미를 신데렐라의 판본으로 읽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헤어진 다음 이 불쌍한 소녀는,… 등등. 좀더 세련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뉴에이지 비슷하게 읽거나 혹은 트라우마의 치료라는 식으로 해설하려는 시도에도 동의할 수 없다. 내가 가와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그녀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결국 성립시키는 그 문득, 이라는 일인칭, 불현듯, 이라는 고백의 숏이다. 이 틈. 영화 안에서 만들어진 신 속의 자기의 숏이라는 일인칭 공간. 다소 비스듬한 인용 (아시다 아키라와 함께 일본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읽은) 나카자와 신이치가 공간을 ‘空-間’으로 읽을 때, 그래서 공간을 ‘빈-사이’로 다시 쓸 때, 공간이 만들어내는 거리의 의식을 차이의 유토피아로 다시 구상할 때, 세계라는 구조와 세상이라는 이미지 사이의 이항대립의 ‘사이’(間)를 제시할 때(<티벳의 모짤트>), 가와세 나오미는 그 사이(間)의 빈(空) 자리로 재빨리 뛰어든 다음 그 안에서 자기의 영화를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가와세 나오미의 무대는 그러므로 측량할 수 없는 장소이다. 절반쯤은 이쪽에 기대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저쪽에 기대고 있다. 이때 이쪽과 저쪽의 구별이 처음에는 분명한 것처럼 시작했다가 점점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나간다. 저기서 시작한 다음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로 설명할 수도 있다. 가와세는 그것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해냈다. <너를 보내는 숲>을 처음 보았을 때 막 시작하고 5초 동안 그만 아, 나는 지금 <너를 보내는 숲>을 보러 들어왔는데 상영시간을 착각해서 <수자쿠>를 다시 보게 된 줄 알았다. 두 영화의 첫 장면은 거의 똑같다. 바람에 조용하게 흔들리는 숲. 망원렌즈로 보여주는 그 평면감. 두 영화는 전편과 속편의 관계가 아니다. 두편의 영화 줄거리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두편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11년이나 된다(<수자쿠>는 1997년에 찍었고, <너를 보내는 숲>은 2007년에 찍었다).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두 영화는 같은 방법으로 시작하고 있다.

가와세가 오가와에게 배운 것

우선 두 가지 사실의 환기. 나는 가와세 나오미가 일본영화의 바깥에 있지만 그러나 오가와 신스케의 ‘마기노-이후’(牧野-以後) 세대라는 자리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가와세 나오미가 야마가타영화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와세의 영화에는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이행한 다음 그 안에서 두 가지 계열의 공존에 관한 수수께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질문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대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어쩌면 가와세 나오미는 처음부터 대답을 미루는 방식으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두 가지 계열 중 하나는 내면의 불-균형과 비-평형이고 다른 하나는 풍경의 고정이다. 첫 번째 계열, 내면의 불-균형과 비-평형의 선은 계속해서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끌어당긴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할 때도 그러했고(<따뜻한 포옹>), 그런 다음 극영화를 만들 때도 그러했다(<수자쿠>). 다섯살 때 가와세를 버리고 떠나간 아버지. 그런 다음 떠나간 어머니. 가와세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녀는 성인의 날에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세의 영화는 부모를 찾아가는 길에서 자기를 찾는다. 대부분 가와세 나오미를 이야기할 때 이것만을 반복해서 말한다. 물론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너를 보내는 숲>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NHK> TV) 가와세는 이 영화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저를 보살피고 저와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가 치매(認知症)를 앓기 시작했을 때 이 문제와 마주친 것입니다. 나는 갑자기 이 병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 병에 걸린 할머니가 아니라 이 병 자체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마주친 셈이지요. 나는 이 병의 사회적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병은 가족 중의 누군가라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현대가족 중에서 이 문제를 안고 있지 않은 집이란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치매라는 병은 일본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비로소 할머니가 이제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떠난다는 문제. 죽음이라는 질문. 그렇다면 할머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린 시절, 어제까지 건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오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너무 두려워서 할머니에게 질문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대답을 할머니에게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그 대답을 내가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곁을 떠나간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나는 <너를 보내는 숲>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와세는 나라현의 감독, 나라현은 가와세의 우주

그러나 다른 하나가 있다. 두 번째 계열, 풍경의 고정. 이것은 가와세 나오미가 서로 전혀 연대하지 않는 그녀의 ‘오빠’ 세대인 아오야마 신지와 스와 노부히로와 공유하는 정서이다. 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혹은 돌아왔다. 아오야마 신지는 규슈(九州)지방 근처에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스와 노부히로는 히로시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만일 히로시마에서 더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으면 차라리 파리에 간다(<퍼펙트 커플>).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일본영화라기보다는 왠지 규슈영화, 혹은 히로시마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다. 가와세 나오미는 어찌되었건 나라(奈良)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 그녀는 일본을 횡단하거나 혹은 도쿄에 갈 생각이 없다. 아니, 차라리 현대 일본영화에 합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와세는 나라현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안에서 생활하고, 영화를 만들고, 아이를 기르면서, 할머니를 생각한다. 아마도 가와세는 그것을 오가와 신스케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공식적인 배움이 아니다. 가와세는 오가와를 매우 사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가와를 추모하면서(1993년 10월 나고야 시네마테크) 오가와 신스케는 뇌와 손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가와는 그 장소에 가서 일기예보를 알아보고 날씨를 측정하고 기후를 분석한 다음 도표를 만들고 (오가와는 자기가 조사한 것을 항상 도표로 만든 다음 그것을 담아나가면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손으로 대지와 접촉한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찍으려는 대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오가와는 자기가 찍으려는 대상을 만져보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배움의 과정을 찍는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오가와 신스케는 영화를 경작(耕作)한다. 대부분 ‘이후 세대’들은 오가와에게서 그것을 배운다. 그러나 가와세는 오가와에게서 장소의 감각을 받아들였다. 오가와가 마기노에 가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면서 그 장소의 리듬을 경작한다면 가와세는 나라현에서 태어나서 거기 머물면서 그 장소의 리듬에 순종한다. 그곳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배움이 필요없었다. 그 대신 나라현에서 살아가면서 익힌 우주의 법칙을 따른다. 언제 비가 내리고, 어디서 바람이 불며, 그때 축제가 벌어지고,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아무리 슬퍼도 그날이 오면 축제가 벌어지고, 결국 헤어져도 그때는 맑을 것이며, 울고 싶지 않아도 그 순간 비가 내릴 것이다. 가와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종종 그 지방에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후의 리듬에 대한 순종이라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가 나라현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만일 가와세가 나라현을 떠난다면 그녀의 영화는 리듬을 상실할 것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일본 감독이 아니라 나라현의 감독이며, 나라현은 가와세의 우주이다. 그녀는 그 안에서 자기의 영토를 만들어나간다.

가와세는 그런 다음 자기의 풍경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계절은 항상 고정된다. 나는 그것을 처음에는 무심코 보았지만 곧 그 계절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가와세의 하소연을 잡아 끌어당기는(attraction) 액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액션? 그렇다. 오로지 계절로서의 풍경만이 가와세 영화 속의 액션이다(그런데 그 역은 아니다). 여름이라는 액션. 가와세는 여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일단 여름이 고정되면 그 안에서 무언가 호소하기 시작한다. 항상 짙푸른 숲. 벌레들의 울음소리. 자꾸만 무언가를 건드리는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그런데도 쨍쨍 비치는 햇살의 기호들. <수자쿠>에서 산길을 걸어갈 때 문득 내리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정감. <호타루>에서 집에서 뛰쳐나온 아야코를 뒤쫓아 다이지가 따라갈 때 골목길에서 문득 내리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장소. <사라소주>에서 바사리 축제를 할 때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악센트. <너를 보내는 숲>에서 숲에서 마치코와 시게키가 길을 잃었을 때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매번 문득 쏟아지는 비. 쨍쨍 비치는 햇살의 시선. 그건 가와세가 나라현에서 살면서 생활하는 날씨의 리듬이다. 방문객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비밀. 그러나 가와세의 영화에서 계절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마치 여름이 끝나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영화를 끝내야 한다고 결심을 한 것처럼, 재빨리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계절을 순환하는 <호타루>는 예외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월 초하루 하쓰모데 행사를 제외하면 이 영화도 대부분 여름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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