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개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제시 제임스는 한국인에게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서구에서 그의 유명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19세기 말에 유럽인이 아는 미국인이라곤 마크 트웨인과 제시 제임스뿐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발간한 <카우보이>에 따르면 “서부 역사상 어떤 무법자도 ‘제임스 갱단’만큼의 성공과 명성을 얻진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무법자인 돌튼 형제, 부치 캐시디, 선댄스 키드, 존 웨슬리 하딘, 빌리 더 키드는 모두 제임스 갱단 아래 위치한다는 이야기다. 제시와 프랭크 제임스와 10여명의 주변인들로 결성된 ‘제임스 갱단’은 1866년 2월, 미주리주에 소재한 은행을 털면서 시작을 알린 뒤, 장장 15년 동안 7개주에 걸쳐 12건의 은행털이, 7건의 열차 강도, 5건의 역마차 습격에 성공하며 이름을 날렸다.
빈틈없이 사전조사를 하고 과감하게 실행한 다음엔 흩어져서 은신처에 숨는 방식으로 법망을 피했던 그들은 1876년, 노스필드 은행 강도의 실패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는다. 제임스 갱단의 멤버 중 유독 제시의 명성이 더 높은 건 그가 리더였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1882년, J. D. 하워드란 이름으로 칩거 중이던 34살의 제시는 그처럼 유명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로버트 포드의 총을 맞고 죽는다. 그러나 악당을 죽인 자가 받아 마땅한 환호와 3만달러의 현상금을 받지 못한 채 포드는 쓸쓸히 사라져야 했다. 남부인들로부터 영웅으로 환대받던 제시에 비해 포드는 한낱 겁쟁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상이 제시 제임스와 그의 일당에 관해 알려진 역사적 사실의 일부인데, 막 개화하던 서부영화 장르에서 제시가 인기 캐릭터가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미 1920년대에 그의 아들인 제시 제임스 주니어가 출연하는 영화가 나왔고, 이후 수십편에 달하는 영화와 TV물이 만들어졌다. 주목할 부분은 제시를 다룬 주요한 영화의 감독들이다. 인기 면에서 존 포드의 바로 뒤에 자리하는 서부영화 감독인 헨리 킹이 <제시 제임스>를 만든 건 당연하다손 치더라도 작가의 만신전에 오를 프리츠 랑, 새뮤얼 풀러, 니콜라스 레이가 그 리스트에서 줄줄이 발견되는 건 신기한 노릇이다. 스튜디오의 요구에 따라 제작에 임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제시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각자의 영화에서 특색이 우러나오진 못했을 게다.
1939년에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하나인 <제시 제임스>는 제시에 관한 영화의 전범이 되었다. <제시 제임스>처럼 195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제시의 행각을 자본, 문명으로 상징되는 북부에 맞선 영웅적인 남부인의 투쟁으로 다룬다. 그리고 흔히 카우보이와 무법자로 나뉘는 서부의 사나이들과 달리 제시는 두 성격이 복합된 인물로 부각됐다. 제시의 불안과 갈등은 자본가와 정치인에 대항한 데서 기인한 게 아니라, 목장주와 가장의 평범한 생활과 거친 무법자의 삶 사이에서 선뜻 선택을 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제시 제임스>는 아내와의 애절한 사랑과 제시의 순수한 성격과 희생자적 면모를 두드러지게 표현한 결과 무법자를 미화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서부 개척민과 (철도로 대표되는) 북쪽 자본주의의 대결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 서부영화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프랭크 제임스의 귀환>은 프리츠 랑의 첫 서부영화이자 그가 미국인에게 기울인 관심이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다. 랑은 “나는 서부영화가 미국인에게 종교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의 말대로 <프랭크 제임스의 귀환>은 역사적 사실과 거의 무관한 픽션을 다루면서도 미국의 언론, 법, 대중문화, 인종문제, 빈부문제, 도덕에 관해 진지한 의문을 제기한다.
새뮤얼 풀러는 데뷔작 <내가 제시 제임스를 쏘았다>를 만들면서 장르의 관습에서 탈피해 반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려놓았다. 36살의 나이에 감독으로 나선 풀러는 첫 장면을 찍기 전 실제 총인 ‘콜트 45’를 쏴 사인을 내렸고, B급영화 제작자 로버트 L. 리퍼트와의 관계는 향후 풀러의 노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며, 두 주인공의 동성애적 관계가 은밀한 화제를 낳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2007년에 발표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의 앞선 형태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자와 소년들의 영웅이었던 남자의 내면, 제시 부부의 조마조마한 관계, 신화가 된 남자를 죽여야 했던 추종자의 정신적 고통쪽으로 시선을 돌린 <내가 제시 제임스를 쏘았다>는 심리적 웨스턴의 숨겨진 보물이다.
니콜라스 레이의 <제시 제임스의 실화>는 제시에 관한 종래의 픽션, 전설, 거짓말을 걷어내겠다는 취지하에 제작됐다. 제임스 갱단이 몰락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각각의 인물들의 기억과 플래시백을 통해 제시의 연대기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남북전쟁이 끝난 시기에 남부인이 선과 악 사이에서 겪었던 혼란을 참신하게 묘사했다. 1980년대에 한국에 소개된 <롱 라이더스>를 포함해 이후에도 제임스 갱단을 다룬 작품들이 무수히 발표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전 작품들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루 도미닉이 연출한 <비겁한 로버트 포드…>는 실로 50년 만의 제시 제임스의 의미있는 귀환이다(<프로포지션>(2005)과 함께 남반구 출신이 만든 가장 중요한 서부영화라 하겠다). 2007년에 쏟아져나온 철학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서부영화 중 한편으로 목가적이고 사색적이며 지독하게 느린데다 (로저 디킨스가 촬영을 맡아) 실로 아름다운 이 영화는 이제껏 보지 못한 서부영화의 비경을 완성했다. 반면 론 한센의 원작에 맞춰 간간이 들리는 내레이션은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는 듯하지만, 인물의 내면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서부 신화의 실체와 쓰라린 쇠퇴의 과정이 160분 동안 날것으로 폭로된다. 제시는 영웅 이전에 야비하고 야만적이며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삶에는 익숙하지 않은 갱단의 멤버들은 믿음과 애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불안과 공포에 절어 사는 그들은 사회의 위협에 의해 파괴되는 게 아니라 사회로부터 고립된 조직 내부에서 하나둘 무너진다. 제시를 죽인 로버트 포드도 용서받지는 못한다. 영화는 그를 신화를 해체한 인물이라기보다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힌 가여운 인물로 결론짓는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는 불안과 우울의 기저에서 선정주의의 열망으로 미국의 한 역사를 해석한 걸작이다. 이런 영화가 극장 개봉을 이루지 못하고 DVD로 직행하는 현실 앞에서 겸연쩍기만 하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의 DVD의 영상과 소리는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아쉬운 건 다섯 DVD 공히 작품에 어울릴 만한 부록을 수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