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3회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작: <밤과 낮> 이론비평 전문
2008-05-22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자연주의로 진화하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고찰
- <밤과 낮>을 중심으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학계 안의 분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쿠르베가 나타났다. <석공들> 이후 그는 사실주의보다는 조금 더 감상적인, 평민들의 삶의 묘사에 치중한 그림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2008년 3월, 극장에서 홍상수의 <밤과 낮>을 보고 나오는 길에 자연주의 화가로서의 쿠르베가 떠올랐다. 뒤이어 영화적 자연주의 naturalisme의 대표주자 루이 브뉘엘에 대한 생각이 났고, 홍상수 영화가 브뉘엘 작품과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뉘엘, 혹은 스트로하임이 떠오르는 자연주의의 영역에 홍상수는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가 사실주의 réalisme의 맥락에서 설득 가능한 텍스트였다면 그의 최신작은 오히려 자연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1. 반복과 변주의 구분

한 남자가 여행을 떠난다. 그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와 며칠을 보내고 그녀를 떠나 다시 기차에 오른다. 그 기차에서 남자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매달린다. 하지만 그녀는 쉽지 않은 상대이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여행이 갖는 목적을 상실한 채 의도치 못한 새로운 곳에서 헤매고 있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선영을 따라 내린 것은 순전히 자유의지였다.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개 여성을 향한 욕구를 발판삼아 움직임에 대한 상황을 마련하고, 그 상황 위에서 또 다시 욕구를 풀기 위해 자연스레 어떤 행동을 취한다. 이렇게 상황과 행동이 연계되면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반복되던 상황들이 자연스레 특정 결과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는 목적한 최종상황에 도달한다.

<밤과 낮>

영화 속 일상을 정체성과 정체성의 되풀이로 이루어지는 순수 의미의 반복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이중성의 문제에 연루된다. 이 이중성은 문맥적인 대구 구조에서 대칭되는 의미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따라서 이 이중성과 연관될 때 창작자는 두 가지 가능성에서 고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고민이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밤과 낮>에 이르기까지 ‘반복’은 홍상수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였다. 상황이 재현되고, 현실에 녹아든 행동은 또 다른 상황을 진행시키며 사건은 전개된다. A(action)-S(situation)-A′(action′)의 패턴 반복은 지금껏 보아왔던 홍상수 영화의 리얼리즘적 특질인데, 이런 가시적 반복의 형태가 영화에 끼친 효과는 단순한 스토리의 전개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 이루어지던 이런 문맥적 반복이 어느 순간 깨어지고 <밤과 낮>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컨텐츠 선택의 문제로 반복을 오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복’과 ‘변주’는 구분되어야 한다. 올리비에에 따르면 변주는 어떤 것으로부터 아주 다른 것으로 이행하고, 모방을 피하고, 사람들을 매번 새로운 생각으로 안내하기 때문에 분명 반복과는 다른 것이다. 홍상수의 경우 문맥적으로만 받아들이더라도 이차성의 문제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또 그것은 마치 원기둥의 표면에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점을 설명하는 것처럼 단순 대칭으로만 구분되는 지점은 아니기에, 변주를 통한 이차성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생각해보면 행동(A)과 상황(S)의 맞물림, 즉 사실주의의 패턴이 이번 영화에서 꽤 많이 깨어져 있단 것을 알 수 있다.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크게 눈에 띄는 이유는 ‘일기체’를 이용한 구성에서 발견된다. 지금껏 관계에서 파생되는 반복적 소재 -예를 들어 삼각관계-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 즉 일종의 장치였다. 하지만 <밤과 낮>에서 인물의 행동은 단순히 연속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일기가 그렇듯이 삶이란 들쑥날쑥하기 마련이고 지극히 개인적 영역이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이 영화를 향해 “너무 반복되는 것 같아 지루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지금까지의 홍상수 영화’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영화의 주인공은 모든 상황을 ‘우연히’ 맞이한다. 그는 의도치 않게 파리에 도착해서 우연히 옛 연인을 만났으며, 또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는다. 마치 운명과도 같아 보이는 이러한 행보는 실상 리얼리즘의 반복과는 차이가 있다. 리얼리즘적 반복은 만남의 상황을 제시한 후 정황의 타당성 위에서 행동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밤과 낮>의 만남은 모두 우연히 이루어지며, 따라서 무균질하게 그 특성을 내비춘다. 이 반복, 아니 변주되는 만남들은 게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것들만의 타당성을 만들어내는데, 이 타당성이 또 다시 다른 단계로 넘어가면서 통일성을 드러내며 주제가 나타난다. 즉, 외양의 반복이 결국 모든 반복을 쓰러트려 다른 것에 눈을 돌리게 만들고, 전체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통일성을 이루어 사실주의와는 다른 의미의 반복을 생산하는, 이것이 자연주의적인 반복의 패턴이다.

이 영화가 일기체로 쓰인 것은 단순히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연이 타당성을 만들고 그 타당성이 결국 통일성을 드러내도록 만든 의도된 장치이다. 즉, 이전까지 성행하던 내러티브를 통한 반복이 한 작품 내에서 통일성의 변화로 대체되고 있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의식의 발견

<극장전>의 상원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꾸준히 자신의 심경을 담은 내레이션을 읊는다. 그 해설을 듣는 것은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드는데,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호, 그가 영실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더라도 믿기지 않는 것은 의도된 효과다. 마치 A형 혈액형의 캐릭터가 O형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리듯 이 영화의 ‘영화 속 영화’는 어떤 전형을 향해 내달린다. 상원은 끊임없이 자살을 이야기하지만 그건 단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위한 차후 행동이며, 정작 그는 자살할 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밤과 낮>의 내레이션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위 <극장전>의 경우와 반대의 이유에서다. 마치 일기를 쓰듯 자신이 진심만을 이야기하는 성남의 독백은 건조하고 일상적인 화면에 감정을 ‘덧붙이기 위한’ 장치인데, 상원의 독백이 아이러니를 끌어내는 정반합이었다면 이 영화의 독백은 감정이 아닌 결과를 끌어낸다. 예를 들어 임신을 이야기하는 성인과 유정, 그리고 여섯 번의 중절을 말하는 민선의 말은 모두 사실로 취급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내레이션의 진실성에서 나온다. 설혹 그 진실이 성남이 믿는 그만의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그의 진심은 진실이 된다.

<밤과 낮>에서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남을 통해 전해지는 전달은 모두 현실에 기반을 딛고 있다. 인물의 내면에 있는 진실과 거짓, 그리고 좋고 나쁨이 정작 캐릭터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주인공 성남의 내면이 영화의 가장 큰 구심점이 되지만, 정작 일정한 내면적 기준이 제시된다고 해서 그것이 옳고 그름의 명확한 척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오! 수정>에서 수정과 재훈이 술집에서 떨어진 젓가락과 휴지를 오인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정작 중요하지 않은 많은 부딪힘이 일상에는 널려있다. 이렇게 많은 소소함의 일상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혹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런 고민은 결국 우리를 다름 아닌 ‘주관성의 문제’로 인도할 것이다. 주관에 관한 이야기는 감독 개인의 화법의 차이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결국 관객들에게 관람의 척도를 제시해 줄 것이기에 중요하다. 게다가 홍상수 영화의 주관성은 특별히 현실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꽤 명쾌한 해석을 제시해 준다.

사실주의 영화의 틀과 비교해 자연주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특이질의 초현실주의 속으로 확장하며 자신을 강조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다만 ‘형식의 차이로 영화 본질의 문제를 다르게 표출하는 방식의 대립’이라 말할 수 있을진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극장전> 이후의 영화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전의 영화와 분명 선을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당신의 예술에서 흥미를 느끼는 점은 무의식적인 면이 아니라 의식적인 측면입니다” -J. Th. Soby, Salvador Dali 중.

사실주의réalisme-자연주의naturalisme-감성주의affect의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 들뢰즈의 영화 분류에서 확실히 홍상수의 초기작들은 사실주의에 가깝다. 사실주의 속 장소와 계기는 구조적이기 마련인데 이를 위해 감독은 인물을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촘촘한 ‘상황’을 제시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집으로 가기 위한 목적 있는 여행을 하는데, 끝내 그는 자신이 목적하는 집-오리-혹은 여자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발걸음이 끊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를 그렇게 방황하도록 내몬 ‘여성들을 향한 욕구’에 휘둘린 뿐이다. 인물 개인이 느끼는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한 인물의 여러 가지 현실적 입지는 철저히 감독의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데, “어떻게 하면 좀 더 타당하게 표현될 것인가?” 하는 것에 따라 인물은 설정되고 그들은 다만 목적한 감정에만 충실하다. 일단 캐릭터가 무언가에 끌리게끔 설정이 되면, 또 그렇게 특성화된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건 스스로가 작가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절망하는 양상을 띠는 격이다. 경수가 선영을 따라 경주에서 내린 것처럼, 상황과 행동의 연계가 또 다른 행동을 촉구하고, 두 번째 행동이 또 다른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면서 스토리 플롯은 발전한다. 그 사이에서 절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영화구석구석으로 분산된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고 재조합되며 발전하는 리얼리즘 영화에서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가 아무리 놀라워도 그것이 ‘의도적인 놀라운 것’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의도적인 놀라운 충격을 위해서는 차라리 장르론 속에서 헤매는 것이 나아 보이는데, 이는 곧 장르론 속에 갇혀있는 영화 전부를 굳이 리얼리즘 영화에 비견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일련의 영화는 리얼리즘 계열의 가장 합당한 텍스트라 칭할 만하다.

반면 자연주의는 어떠한가? 추상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얼마나 정교한 것인가에 대한 분석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줄곧 발견되었다. 달리, 브레통 그리고 브뉘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상과 불과분의 관계에 있으나 일상적인 현실과는 다른, 이 제2의 현실에 대해 초현실주의자들은 경험에서 드러나는 심연과 공백의 암시로 그 존재를 표현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마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아 자신의 영토를 가시화시키려 했던 것처럼 방대할 뿐 아니라 또 효율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초현실주의가 가지는 극단적인 정서의 표출을 한 예로 두고 그 쪽에 가까운 영화를 무작위로 선별하는 것이 더 수월해 보이는데, 구조적 영화 연구가 자연주의에 적합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확실히 자연주의 영화는 구조적으로 뜯어볼수록 더 재미있는 텍스트가 되어준다. 텍스트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분석자 각자의 특정 이론에 기대어야 하겠지만, 들뢰즈의 경우 운동적 이미지와 감성적 이미지의 조합에서 제 3의 위치로 설정한 것이 바로 자연주의 의 영역이다. 이론가이기도 했던 초현실주의 작가 군단, 혹은 파스벤더, 파졸리니가 떠오르는 이런 정의에 홍상수 영화가 적법해 진 것은 가장 최근의 일이다. 홍상수의 신작은 플롯이나 미장센보다는 작가 개인의 의식에 집중하고 있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의적이긴 마찬가지라서 의도만으로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스타일의 측면에서 자연주의가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을 고수하는 것은 해석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홍상수의 초기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에서 인상주의적 경향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과도한 의식이 발견될 뿐. 하지만 <오! 수정> 및 <생활의 발견>을 필두로 인상주의적 특성은 그 영역을 확대하는데, 예를 들어 <해변의 여인>에서의 두 여자가 그렇다. 이 영화에서 선미는 고현정이 연기한 문숙과 닮은꼴 여인이다. 더구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 봉래는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미지론’을 설파하는데, 이것은 인상주의적 회화의 특성을 정리한 것이다. 점이 모여 선과 면을 이루듯,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는 실체의 모습과 자꾸자꾸 변하는 순간의 정지된 화면이 계속 중첩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물론 <오! 수정>에서 대칭되어 보였던 엇나간 기억들이 <생활의 발견> 이후 동시에 존재하는 상반된 혹은 공통된 이미지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떠올려 봐도 좋다.

<극장전>의 엄지원은 영화에서 한 번 그리고 현실에 다시 한 번, 동시에 두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데,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도 완벽하게 두 편으로도 나뉘어져 있다. 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이런 이미지 분할은 더욱 발전해서 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하나의 공동된 특징을 보여주는데, 두 남자가 중국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창밖의 긴 머리 여인을 통해 과거의 선화를 떠올리는 것이 그 시작점이다. 사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홍상수의 영화 리스트 안에서- 직접적 이미지 표출의 시발이 되어주는 영화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주인공의 화신으로 개가 등장한다던지, 혹은 문호의 상상이 영화에 갑자기 등장한다던지 하는 것은 분명 이전까지 그의 영화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 작품 이전에 홍상수는 직접적 메타포를 던지길 꺼려했던 것 같다.

<밤과 낮>에서 이불 아래 드러난 유정의 맨발은 그런 맥락에서 또 다른 지표일 것이다. 성남의 머릿속에서 맨발은 여자도 아내도 사랑도 아니며, 다만 그 자신의 욕정이 가리키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체이다. 길을 건너는 유정의 청치마 아래 드러난 두 다리를 보는 순간, 그 순간의 인상은 성남의 머리 전체를 지배하는 파워를 갖게 된다. 한 인물이 여러 개의 이미지를 지배하던 것과 달리, 또 여러 인물이 한 이미지를 설파하던 것과 달리, 이번영화에서 지표는 실체를 드러나지 않고 마치 점이 찍히듯 분할되고 반복된다. 게다가 이 욕망의 실체는 민박집 계단을 내려오는 이름 없는 여자의 다리에서 중첩되고, 또 <세계의 근원>에서는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가 카페에 앉아있는 유정과 해변을 뛰어가는 유정의 다리를 통해 다시 내려오는 식으로 성남의 안에서 줄을 긋는다. 민선-현주-유정-지혜-성인에 이르기까지 성남이 아우르는 다섯 여성의 고리 역시 위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때 좀 더 명확히 파악되는데, 이 여인들은 각자가 분산되었다기보다 분산된 위치에서 성남이란 인물을 조금 더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 적합하겠다. 즉,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론에 따르면 이 다섯 여인은 ‘김성남’이란 인물의 실체를 형상화하는 다섯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밤과 낮>에 나타난 닮은꼴-다른꼴 찾기는 영화 본연의 실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비슷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닌 이미지의 순환은 영화 읽기의 중요한 초석으로 작용한다.

3. 양면성에 대한 인식의 표출

파리란 도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거대한 돌덩이들로 덮여있는 곳이다. 그 돌덩이들은 건물 곳곳을 뒤덮고 강 위에 놓인 다리를 뒤덮고, 다리 위에서 보이는 모든 풍경을 점령했다. 주인공 김성남은 돌다리 위에 서서 파리를 한번 쭉 둘러보고 이렇게 한탄한다. “이 많은 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아마 역사적으로 쌓이고 모여 이룩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 거대한 도시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장치를 통해 그 생성과정을 추론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 전체에 드러나는 ‘순환’의 모티브이다. 길거리를 걷던 성남은 우연히 개똥을 발견한다. 물을 뿌리며 지나가는 청소부가 그것을 치우는 것을 보고 그는 역시 이렇게 생각한다. “아, 개똥은 이렇게 치워지는구나!” 음악이 깔린 채 도로위에 물은 흐르고 다시 흘러가던 물이 모여서 어느덧 강을 이룬다. 세느강을 바라보던 주인공, 그는 그곳에서 도시를 바라본다. 그리고 도빌의 바닷가에 이른 세 남녀가 도빌의 출렁이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볼 때, 이윽고 우리는 ‘구름’의 존재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성남은 화가이며, 구름을 그리는 화가다. 구름이 낮게 흐르는 파리에서 그는 결코 붓을 들지 않지만 그의 머리 위엔 항상 구름이 떠다닌다. 물의 끊임없는 순환을 가능케 하는 자연적 장치로서의 구름은 이렇듯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닌다. 민박집 안에서 듣던 빗소리는 비 내리는 하늘을 연상케 하며, 또 우연히 길을 걷다 만난 소나기에서도 물의 순환은 인지된다. 오랜 시간 모이고 깎인 돌처럼, 물 역시 원래적 자원의 일종으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한 순환된다.

쿠르베의 그림 <세계의 기원>을 두고 어떤 이는 음란하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한다. 여기서는 후자인 그림의 이차적 이미지 ‘어머니 = 세상의 기원’에 주목해서 그림을 보자.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한 상념, 혹은 물은 순환하지만 구름이 먼저인지 바다가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마치 <밤과 낮>에서의 뭉뚱그려진 전체적 통일성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변주된 요소들이 끝내 통일성을 드러내며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이 있다. 그것, 그런 의미에서 굴을 먹는 행위야말로 복합적이며 극의 밸런스를 관통하는 장치라 할만하다. 주인공들이 소비하고 찾으러 다니는 굴은 인간의 몸에서 곧 배출될 소비체이며, 또 그것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먹거리이기에 양면성을 띤다. 굴을 둘러싼 껍질의 모양새가 쉬 돌덩이를 연상시키는 것 역시 그러하다. 굴은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원천적 이미지-물과 돌-을 잇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지만 마치 돌로 둘러싸인 파리의 모습을 떠오르게도 한다. 이런 ‘굴’의 이미지이야 말로 영화 <밤과 낮>의 실체일 것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나타난 <석공들>의 뉘앙스가 단순한 그림 모방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 마찬가지로 돌의 순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굴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결과를 순환하고 또 역순환하는, 김성남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본래의 세계란 규정된 환경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타난다. 그리고 이 규정된 환경이란 것도 사실 세계 본연의 모습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주의 영화가 꾸준히 자연을 소재로 취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가끔 작가의 취향이 작품의 소재에 영향을 미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개-오리-새-남산타워-청평사 등의 특정 사물은 꾸준히 등장해 인간사를 표방하고 대체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밤과 낮>의 경우, 인물들은 와인이나 커피가 아닌 굴과 콜라를 소비하며 자연물로 조각된 도시의 일부에 서 있다. 그들은 지극히 한국적 관습을 지녔지만 또 지극히 세계 공통적 문화만을 향유하기도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그동안의 홍상수 영화에서 이어왔던 일종의 무생물이 가졌던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이나 서양이나 인류가 사는 것은 동일한 패턴이며, 다만 어떤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만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이 영화는 한국적이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원래적 세계의 본질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영향들이 어떤 정서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즉, 굳이 서양적일 필요는 없다. 흔히 자연주의가 표방하는 충동은 정서가 아니다. 충동은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인상’이지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 성남은 외로움의 정서를 느끼지만 그것은 부인이 없고 그곳이 한국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단지 유정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그러하다. 즉, 유정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그는 외롭다.

결론적으로 임신이라는 장치를 향해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충동을 위한 이야기의 진행방식이지, 주인공의 정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다. 누군가 ‘홍상수의 영화는 건조해서 차가워!’라고 말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자연주의의 ‘충동’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임신한 유정을 두고 파리에서 한국으로 떠난 것, 6번 중절수술 받은 여자 친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는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 홍상수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지 어떤 패턴을 따르기 위해서 설정된 것이지 그것으로 어떤 도덕적 비난이나 의식을 도출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그가 자연주의 감독이기 때문이며, 이 느낌이나 감동과도 다른 완벽한 일관성과 자율의 ‘충동 pulsion’은 자연주의의 특질이기도 하다.

<밤과 낮>을 감상할 때 초현실주의의 인식적 맥락과 길을 같이하는 자연주의 영화가 충동적 설정을 이용하는 것은 인지되어야 한다. 많은 장르적 취지에 선 많은 감독들이 살인이나 죽음의 소재를 하이라이트의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자연주의에서의 충동과는 차이가 있다. 이 충동은 자연주의 특유의 원천적인 소재 이용, 즉 극단과 극단의 부딪힘을 백분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에 소재 자체의 도덕성으로 평가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자연주의 영화에서도 누군가 누구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없던 물건이 갑자기 툭 떨어지는 것도 가능한 것이 자연주의다. <은하수>에서 브뉘엘은 두 여행자가 여행 중에 사드후작과 프리실리안을 차례로 만나도록 설계했다. 시대의 설정이나 이야기의 맥락에도 맞지 않는 이런 극단적 장치는 오히려 의미를 의미로써 부각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이런 극단적 양면성의 대칭이 홍상수의 <밤과 낮>에서 두드러진다. 성남은 죄를 짓는 순간에 성경을 발견하고, 길을 가다가는 돈을 줍고, 도박에선 돈을 딴다. 물론 북한인과의 팔씨름에서도 그는 이긴다. 이런 우연한 장치들이 실은 억눌린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것에 관객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치 사상누각에 서서 기쁨을 누리는 인물을 연상케 하는 성남의 캐릭터는, 반대로 그의 모든 행운을 위태로움과 결부시키는 접합점이 되어준다. 행운과 불운의 대립이 아니라, 행운과 위태로움의 대립, 이런 양면성의 표출은 사실 홍상수 영화에서 줄곧 발견되어 왔던 것이다. 여자와 남자,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실과 영화, 진실과 거짓은 지속적으로 회자되었다. 결국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밤과 낮의 대립이 아니라 그 조합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행운과 위태로움의 결합처럼 밤과 낮, 파리와 서울의 만남은 새로운 타합점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극단과 극단이 만났을 때 이루어내는 이런 밸런스, 즉 사실주의를 가장한 우연의 연결이 자연주의 영화 <밤과 낮>의 관전 포인트다.

덧붙여, 김성남을 김성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드는, 혹은 역능을 가진 창의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순간에 대한 언급이 이 영화에 숨어있다. 바로 여자와 만나고자 하는 욕망, 파리와 서울-밤과 낮을 연결시키는 비행기-전화의 사용, 역시 바다와 하늘을 연결시키는 구름의 창작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김성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브뉘엘의 경우 그는 절대 실체로서의 자신을 영화에 등장시키지 않지만 홍상수는 김성남을 등장시켰다. 성남을 보는 것은 마치 홍상수를 보는 것과도 같은데,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극단과 극단을 긋는 선 위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김성남은 그들의 중점이 된다. 그는 구름을 그리고 굴을 먹으며, 비행기에 오르거나 전화를 한다. 심지어 우연히 영화 촬영장에서 새를 살리기도 한다. 이를 보며 예술 작업을 하는 홍상수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장된 감상일까? 영화를 찍는 것은 마치, 표현되지 않아도 될 어떤 중심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도덕성의 표출도 욕망의 분출도 아니며, 다만 여자를 만나는 것처럼, 혹은 구름이 습기를 모으는 것처럼 당연한 에너지의 분출이다. 물론 새 한 마리쯤 죽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 새가 자라 특별한 새가 될 수도 있다. 비행기처럼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확실히 홍상수는 루이 브뉘엘이 가졌던 자연주의적 경향 안으로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헛헛한 웃음소리가 짐작케 하듯, 이것은 아주 날렵한 발걸음은 아니다. 다만 그의 영화 속 현실이 우리의 일상보다 꼬여있고, 또 우연적이며 극단과 극단을 잇는 황당함으로 점철되어 있음에 유의하자. 브뉘엘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위’에 있었던 것과 비견되어 홍상수의 인물들은 다만 현실의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만이 다르다. 하지만 그런 홍상수의 인물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꿈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꿈 시퀀스는 길고 명확해졌으며, 화면에 잡히는 그림 또한 실사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 되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플롯이 홍상수 영화를 읽는 주축이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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