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애장의 욕망이 일으킨 일대 사건
2008-05-2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워쇼스키 형제의 <스피드 레이서>가 흥행하지 못한 이유

유년 시절의 영화관람 추억을 마침내 막강한 자본에 힘입어 한편의 작품으로 복원해내는 것이 근래 할리우드 재주꾼들의 추세 중 하나다. 그런 일련의 출현에 관해 개인적으로는 ‘애장(愛藏)의 영화’라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 부르고 있다. 내게는 <스피드 레이서>도 그중 하나의 결과물로 보이며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말하는 애장이란 우리가 애장품이라고 말할 때의 사전적 의미 ‘소중히 간직함’ 그대로이며, 애장의 영화란 유년의 시절을 사로잡은 대상을 평생 소중히 간직해오다 성인이 되어서 혹은 더 나아가 영화감독이 되어서 마침내 작품으로 실현하고 마는 소유와 보존과 복원의 프로젝트들을 말한다. <스피드 레이서>의 워쇼스키 형제를 비롯하여 재주와 기회를 겸비한 총아들 사이에서 이런 실현의 욕망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영화를 애장하는 몇가지 방법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동시대에 가장 전위적이며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가 자신의 애장하는 것들만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것은 오래됐고 우리도 그의 영화의 특성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타란티노가 그의 성향에 버금가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뭉쳐 각각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를 만들어 ‘그라인드 하우스’(선정적이고 질 낮은 B급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심야 상영관)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옴니버스 프로젝트에는 한 가지 추가되는 특징이 있다.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가 애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지만, 이 때 타란티노는 그 장르의 성격 자체를 넘어 그걸 즐기는 관람의 상태를 더 애장한다. 예컨대 그는 그 시절에 소년 타란티노가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영화를 보며 느꼈을 법한 흥분을 지금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여 선택된 전략은 필름의 상태를 조악하고 훼손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건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장르가 원래적으로 주는 내용과 형식의 퇴폐적 자질과는 무관하다. 스크래치 가득한 질 나쁜 화면, 툭툭 끊기는 릴의 불안정한 상태 등을 연출하여 ‘지금 당신은 그라인드 하우스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유혹한다. 타란티노의 목적은 우리의 관람을 퇴행시키는 것이며 그 퇴행의 목적은 자신이 겪었던 관람 경험의 순결한 복원에 있다.

애장의 영화 계열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될 만한 피터 잭슨은 어린 날 본 <킹콩>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반지의 제왕> 삼부작이라는 거대 에픽이 끝나자 <킹콩>을 차기 프로젝트로 택했다. 원작과 차이가 있다면 혹은 그동안 수차례 시도된 다른 연출자들과 달랐던 건 거대한 물량과 에너지 그리고 묘사력으로 어떤 영화와도 비교되지 않을 완성도 면에서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태도였다. 피터 잭슨은 <킹콩>을 어느 영화관에서 어떤 팝콘을 먹으며 보았는지 애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킹콩>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애장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애장품인 <킹콩>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신이 시도한 이후 누구도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한다. 타란티노가 자신의 관람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그 소유의 순결성을 과시할 때 피터 잭슨은 텍스트의 높은 완성도에 공을 들여 소유권의 완성을 마무리하려 한다. 때문에 이 영화의 완성미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영원한 소유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 등의 몇몇 영화를‘오마주영화’라고 쉽게 부를 수 없는 이유 또는 스필버그-루카스 세대와의 차이는 스필버그-루카스가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영화에서 무언가를‘배웠다’고 생각하는 대신 타란티노와 피터 잭슨은 그것들에서 무언가를‘가졌다’(소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 바치는 헌사라면, 오마주 영화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늘 어떤 존경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소유권의 주장이 더 강하게 느껴지며 그리고 그 소유권이 주장될 때 공통적으로 놀아보는 것, 유희의 확장 가능성도 항시 크게 부각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B급 장르에, 피터 잭슨이 판타지 장르에 좀더 심취해 있다면 애장의 영화 계열 작가로서 빼놓지 말아야 할 워쇼스키 형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에 놓고 홍콩 갱스터영화와 쿵후영화의 기호들을 자력처럼 모아 유희한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매트릭스>라는 영화이며 이 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마치고 <킹콩>을 만든 것처럼 <매트릭스> 삼부작을 끝내자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었다. 1967년 일본에서 제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방영됐을 때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큰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스피드 레이서>에 대한 기억을 워쇼스키 형제도 잊지 않고 되살려낸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 모아지는 기대는 적지 않았고 과연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워쇼스키 형제가 거대한 애장품을 선사할 것이며 흥행에도 성공할 것인가, 모두들 기대했다.

촌스럽고 유아적인 것이 전부인가?

<스피드 레이서>에 관한 본격적인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제기된다. 그리고 질문을 끌어낸 결정적인 계기는 예상치 못한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이다. 영화광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문화권에서 애장의 영화나 오마주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스피드 레이서>의 경우는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의 오랜만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좀더 선전이 기대됐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예상보다 못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전국 300개 이상의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아이언 맨>에 밀리며 선전한다고 말하기 힘든 정도다. 왜 그럴까?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을 막는 어떤 거부감 또는 어떤 저항선이 있는 걸까. 그건 무엇일까. 흥행의 성공 유무를 산업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 흥행 전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스피드 레이서>의 진실에 대해 좀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본 관객은 제 각각의 이유를 말한다. 부정적인 반응은 대략 몇 가지로 추려진다. 이야기가 없다. 너무 현란하기만 하다. 혹은 너무 촌스럽고 유아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의견들이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 부진을 설명하는 온전한 이유가 될 것인가. 과연 이 표현들은 맞는 것일까. 이야기가 없는데 큰 흥행을 한 영화를 알고 있다. <디 워>는 지난해 국내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였으며, <스피드 레이서>는 <디 워>의 전체 관람가와 유사한 수준의 12세 이상 관람가다. 서사가 단순하다는 건 그러니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스피드 레이서>의 CGI 기술은 <디 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실로 놀랍다. 만약 CGI의 놀라운 기술력이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무기라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많은 관객을 모아야 할 것이다. 현란하기만 해서 싫다는 반응도 의아하다. 부분적으로는 <스피드 레이서> 못지않게 현란했던 <트랜스포머>는 500만 관객을 넘었으며 이 영화를 본 호사가들 중 일부는 이제 우리가 영화를 보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며 감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의아한 건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촌스럽다, 유아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스피드 레이서>는 촌스러우며 유아적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반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만 말하고 나면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는다. 예컨대 <스피드 레이서>는 정말 촌스러운가 혹은 유아적인가. 그보다는 혹시 낯설고 불편하고 어렵고 모호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그 낯섦, 불편함, 어려움, 모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이들은 자기들의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다가 <매트릭스>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워쇼스키 형제가 우리를 실망시켰다며 씁쓸해한다. 누군가는 의심할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워쇼스키 형제 그들은 아이도, 어른도, SF의 마니아들도 심지어는 철학자와 미학자들까지 매료시킨 대중문화의 네오가 아니던가, 라고.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 1편을 만들었을 때 대개 저돌적인 철학적 모험가이지만 때로는 철학계의 약장수인 슬라보예 지젝은“매트릭스는 일종의 로르샤흐 검사의 구실을 하는 영화이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며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에 부합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 영화의 함의에 철학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뛰어든 수많은 논평자들과 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라캉주의자들과 푸랑크푸르트학파와 뉴에이지 운동그룹, 혹은 플라톤 주의자들이 제각각 자기의 철학적 명제에 기대어 이 영화를 로르샤흐 검사지 삼고 있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매트릭스>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카피처럼 영화가 무엇을 보여줬던 그 이상의 철학적 개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지젝도 2003년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개봉하기 전 이미 2002년에 출간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원제는 <매트릭스와 철학>)에 실린 바로 그 글 안에서 “<매트릭스>의 속편들에서 우리는 아마도 ‘진실의 사막’ 역시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의 예지력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 속에서 모피어스가 “자넨 꿈나라에서 살았었네. 이게 오늘날의 세계야. 진실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하네”라고 말할 때 그건 가상의 프로그램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실의 사막이란 자신들의 육체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 바깥의 세계를 가리키는 비유다. 매트릭스의 세계와 그 바깥은 연결되어 있지만 지젝이 예고한 것처럼 그 바깥조차 매트릭스는 아니었다. 그럼 지젝의 실수를 지금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한 가지가 될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성이 대철학자조차 호들갑 떨게 할 만큼 충분히 상상의 여지를 주었다는 걸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워쇼스키 형제는 신나게 유희했을 뿐 철학은 그걸 본 철학자들이 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러므로 여전히 유희의 연장에 있다. 유희는 말한 것처럼 애장의 영화감독들의 사명이며 그것만이 그들의 진실의 사막이다. <매트릭스>의 창작자들이 어떻게 <스피드 레이서>처럼 이런 유치찬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목소리들이 높은데 개인적으로는 이상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 마침내 <매트릭스3 레볼루션>을 본 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먼은 “오랜 세월 인간의 실제 행위를 기록해온 카메라 촬영술과 새롭게 떠오른 컴퓨터그래픽 이미지, 실제 배우들과 그들의 스턴트 대역들, 그리고 실제 로케이션 장면들과 스튜디오 세트장면들을 결합해내기 위해 워쇼스키 형제가 감내해야 했을 복잡다단함을 생각해본다면, 영웅 해커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컴퓨터에 의해 구현된 가상의 현실을 상대로 펼치는 이 무용담은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건 지젝의 예상보다 훨씬 더 유효할 뿐 아니라 <스피드 레이서>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예고했던 문장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가장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길목에서 동선을 살짝 전환하여 유년 시절 그들을 사로잡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든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버리지 않으면서. 애니메이션에 더 근접하기 위해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섞는 방법이 <스피드 레이서>에서 특징적이며 그 점이 <스피드 레이서>를 말할 때 어떤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건 이미 <매트릭스>의 연장일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더 직접적으로 근접해간 그들의 애장과 유희의 방식이다. 그들의 애장품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순결의식을 지키는 방식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유희의 연장으로 선택한 자동차와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

소중히 간직해온 것을 대하는 그 순결 의식의 행태에 대해서는 이미 쿠엔틴 타란티노나 피터 잭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한 바 있으니 여기서 피터 잭슨이 <킹콩>에서 대상을 다루었던 방식과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관람의 경험을 다루었던 방식을 다시 상기해달라고 제안하고 싶다. 두 감독이 각자 집중했던 문제가 <스피드 레이서>에는 모두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드 레이서>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무엇’을 애장하는가와 ‘어떻게’ 애장하는가. <스피드 레이서>의 흥행의 부진도 실은 워쇼스키 형제가 다루는 이 애장의 두 가지 방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스피드 레이서>가 애장하는 무엇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에서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GoGoGo!>다. 그리고 <마하 GoGoGo!>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복 및 헤어스타일과 <007> 시리즈의 자동차에서 이식받아 태어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것이다. 미국에서 생겨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추종자들을 만든 60년대 문화 혼종성의 일례. 이때 주요한 대상이 되는 것이 자동차다. 자동차는 영화사에서 때때로 유의미한 기호이며 특히 미국 대중 영화 속에서 장르와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절대적인 문화 기호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양의 소년들이 성인으로서 등록받기 위해 유년기에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 하는 상징물(<트랜스포머>의 자동차)이자, 성인의 세계에서도 여성을 유혹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남성의 성적 유인물(<데쓰 프루프>의 자동차)이자, 때로는 한 시대의 연애감과 미스테리를 상징하는 공간(<조디악>의 노란 자동차)이다. 단적으로 자동차는 사회학자 존 오르의 주장처럼 모더니티의 “상품화된 악마들”이라는 자격을 얻을 만큼 중요했으니, <마하 GoGoGo!>라는 원작이 태동한 196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감안할 때 이 영화의 자동차들이 동 서양의 모더니티를 우회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단지 <스피드 레이서>의 작품 결정성 또는 흥행성의 가치를 두고 말할 때 이 중요한 기호가 의외로 핵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자동차는 몇 가지 더 화려한 상상적 기술과 금속적인 느낌, 그리고 경주 장면에서 제작진 스스로 카-푸(자동차 쿵푸)라고 부를 만큼(하지만 사실은 카-레, 즉 자동차 레슬링의 태그 매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시아 격투기 같은 상상력을 넣어 다시 혼종성이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자동차로 대변되는 모더니티는 그 이상으로 크게 격상되지 않고 있다. 자동차를 둘러싼 나머지가 더 부각된다.

두 번째 애장의 방식, 즉 어떻게 애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때 자동차라는 대상 자체보다 중요해지며 이 영화의 핵심과 직결된다. 자동차가 달린 적 없는데 그 휘황찬란한 속도감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CGI의 수혜를 말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CGI로 재현된 이 속도감이 정작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람의 경험을 결정짓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 워쇼스키 형제가 추구한 건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노렸던 효과와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에만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더 질문할 수 있다. 원작의 매체성과 가까워지려는 <스피드 레이서>가 <베오 울프>와는 공유하지 않되 <300>과는 공유하는 점이다. 하지만 원작의 세계에 순결함을 바침과 동시에 독창적일 수는 없는가. 워쇼스키 형제가 선택하는 방식은 단순히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그냥 섞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생전 처음 만난 것처럼 모조화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취하는‘어떻게’의 모든 방식은 모조화이며, 더 모조화이다.

모조화를 강화하는 두 가지 매우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팝하게 모조화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이키델릭하게 모조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드 레이서>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표현을 잊지 않고 한다. “영화가 아주 팝해”, “영화가 사이키델릭하더군”. 하지만 멋진 그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까지는 아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각종 매체의 기사까지 이 말들이 모두 사용되는 걸 보면 제작진 스스로가 제작 단계에서 이런 개념들을 공유해왔고 유포해온 것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영상이 팝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사이키델릭하다는 건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똑같이 대중적이며 현란한 영화인데 왜 <베오울프>와 <300>과 <트랜스포머>에 대해서 팝하다고 말하지 않는 대신, <스피드 레이서>에 관해서는 팝하고, 사이키델릭하다는 논평을 내는 걸까.

<스피드 레이서>는 팝한 세계와 사이키델릭한 세계가 마치 매트릭스와 매트릭스 바깥으로 구획되듯 구체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는 뭉뚱그려져 있지 않고 정확히 구획된다. 경주 트랙 바깥의 세계는 팝하지만, 경주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먼저 트랙 바깥 팝한 세계. 여기는 종이 인형들을 오려 붙인 것처럼 인물과 풍경이 콜라주식으로 오려 붙여져 있고(흔히 말하듯 원근법적 파괴는 그다지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캐릭터는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봄직한 과장된 표정으로 일관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일명 캔디 랜드라고 불릴 만큼 알록달록하다. 그 모든 것이 형광도료를 통째로 뿌려 놓은 것 같은 상태다. 이 의도적으로 키취적인 세계를 접했을 때 우리가 팝 아트 미술과의 연관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트랙 바깥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거의 팝 아트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인물과 동네로 유별나게 채색하고 콜라주 해놓았다. 짐 호버만은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단 뒤 케니 샤프, 제프 쿤, 무라카미 다카시, 케네스 놀란드 등등 팝 아트 미술가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이 이 영화의 미장센에 관여했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추론하는데, 나는 실제 그들이 참여했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말할 입장이 아니다. 또한 그들의 참여 유무가 중요하다 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손길이 닿았건 그렇지 않았건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 바깥의 세계는 확실히 팝 아트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트랙 바깥의 세계가 팝한 것인가.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동차에 타고 경주를 벌일 때 그 트랙 안의 세계는 사이키델릭하다. 특히 주인공 스피드가 형의 환영과 경주하는 영화의 초반부 경주 장면과 마지막 트랙 경주 장면에서 이 사이키델릭함은 두드러진다. 우리가 <스피드 레이서>를 보며 사이키델릭하다고 감탄할 때는 대체로 자동차의 경주가 벌어지는 이 때 트랙 안 세계의 속도감과 재현성을 상기해낼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이키델릭한가. 빛의 속도, 광속으로 달린다고 말하고 싶어질 만큼 아찔한 자동차의 움직임. 그 차의 속도감을 표현해내는 조작된 기술은 자동차가 아니라 그 주변으로 흐르는 빛의 채색이며 동시에 아찔한 빛의 플래쉬들이다. 속도감은 붓 칠해 놓은 곡선과 일직선의 형형색색의 선들로서 표현된다. 혹은 그 안은 꼭 빙빙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어지럽다. 그 선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 겹겹이 흐르고 겹치는 도안이 될 때 우리는 멈춘 스튜디오 안의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느낀다. 만화경, 그것의 도안, 그것의 효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사이키델릭하다는 것이 환각의 상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인상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판단을 가르는 것은 약(drug)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LSD의 문화적 상징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그것의 유포된 비주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과 자동차의 경주, 즉 사이키델릭한 비주얼이란 실은 환각의 비주얼이다.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낯설음과 그로 인한 역효과

팝 아트와 사이키델릭의 기원이 1950, 60년대로 소급된다는 사실에 더해 자동차의 모더니티라는 점까지 합일시켜보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의식적 관람 경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른바 <스피드 레이서>는 ‘디지털 시대에 모조화된 모더니티의 재현을 당신은 과연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바뀐다. 그건 워쇼스키 형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질문일 것이다. 트랙 바깥의 콜라주 된 팝한 세계로, 또 하나는 트랙 안의 금속적이며 디지털적이며 사이키델릭한 세계로 비주얼이 처리될 때, <스피드 레이서>를 접한 관객은 혹은 그 예고편을 구경한 관객은 이 영화에서 오는 어떤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부담감이란 사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유처럼 촌스럽거나 현란하거나 서사가 없다는 표현에 걸맞는 것이 아니다. 팝과 사이키델릭이 가져온 모조화된 모더니티가 낯설다는 토로다. 예상외로 그 부담이 <스피드 레이서>를 보는 관객 사이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워쇼스키 형제가 자신들의 유년 시절에 기원하는 모조화된 모더니티를 팝과 사이키델릭이라는 구체적인 비주얼의 양분을 통해 재현해내면서 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며 희희낙락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들도 이 점이 어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역효과? 맞다. 그 역효과가 사실은 이 영화의 흥행적 수치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전 세계적으로 <스피드 레이서>와 같은 시기에 개봉한 뒤 놀랍게도 <스피드 레이서>를 크게 물리치고 흥행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아이언맨>은 지금까지 출현한 각종 맨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후진적이며 직접적이다. 주인공이 무기 공학자라는 점을 근거 삼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아이언맨은 한눈에 ‘인간 미사일’과 ‘인간 화염 방사기’의 비유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언맨, 즉 철갑맨은 덜 미래지향적이고 덜 복잡하며 더 군사적이어서 액션영화의 관객을 손쉽게 자극한다. 지금 전 세계는 팝과 사이키델릭으로 칠해져 모조화된 모더니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품을 구경할 것인가, 아니면 몸에 화염과 미사일을 장착한 군사주의적 로봇을 구경할 것인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하고 있는 형국이다.

<스피드 레이서>를 본 당신은 전시장에 가서 팝 아트를 쉽게 이해할 만큼 지적인가(내게 팝 아트는 언제나 어렵다). 아니면 당신은 사이키델릭 아트의 근본적인 환각성에 관해 자신 만만하게 과감한가(생각해 보니 나는 약을 해 본 적이 없다). 워쇼스키 형제의 유희적 선택은 방어선을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역효과를 낸다. 대중영화 선호의 관객이 예술로서의 영화를 찾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를 보는 것에 저항감을 갖게 된 셈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확실히 지지의 미아가 됐으며 애장과 순결과 유희라는 입장에서 원본보다 더 나아가는 독창성을 발휘하고자 했으나 의도치 않은 역효과에 붙들려 괴상한 예술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애장의 영화가 일으킨 거대한 오해의 사건이 된 셈이다.

<매트릭스>에 환호를 보냈던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스피드 레이서>에 다시 찬사를 보낼지는 미지수이며 <매트릭스>의 S. F 지지자들이 보기에 <스피드 레이서>는 형광도료의 유치한 난장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건 타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워쇼스키 형제를 영화의 네오라고 생각했던 건 실은 언제나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며 그들 스스로는 오로지 영화의 레이서라고 여겨 왔을 뿐이니까.“내가 만드는 영화가 뭘 추구하고 있는가는, 단순히 대단한 그림을 만들었다, 신난다! 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영화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지만, 그런 것이 워쇼스키 형제에겐 없다고나 할까.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을 비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오시이 마모루가 옳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