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태준식] “눈을 뜨세요, 이건 현실이에요”
2008-06-04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필승 ver2.0 연영석>의 태준식 감독

태준식은 노동운동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본인은 그런 딱지가 끔찍한 부담이라는데, 10년 넘게 한눈팔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뤄왔으니 이제 와서 쉽게 떼낼 수 있는 꼬리표도 아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던 <필승 ver2.0 연영석>은 음악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의 일관된 궤적을 외려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 무엇보다 그가 필승 시리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택한 민중가수 연영석이 이를 증명한다.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투사”가 아니라는 연영석은 누구보다 앞장서 삶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쑤시고 헤집는 데 열심이다. “눈을 뜨십시오. 이건 현실이 아닙니다.” 한때 극장에서 40번 넘게 봤다는 <에이리언2>의 개봉 당시 신문광고를 빗대어 태준식 감독은 말한다. “눈을 제발 뜨세요. 이건 현실이에요.” 연영석의 노래를 빌려 진심을 전하고 싶은 태준식 감독을 만났다.

-연영석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을 기억하나.
=7, 8년 전쯤이었을 거다. 노동절 기념 대규모 집회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렸다. 그날은 좀 쉬고 싶어서 슬렁슬렁 찍자는 심산으로 뒤로 물러났는데 아주 이상한 음악이 들려왔다. <라면>이었나. 집회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다. <엄마 미안해>도 불렀을 텐데, 무슨 저런 음악이 다 있나 했다.

-찍어야겠다고 맘을 굳히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민중가수들은 대개 공연이 있으면 결합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영석이 형은 노래하지 않는데도 집회에 나왔다. 맨 앞에 서 있다가 주동자로 몰려서 기타랑 같이 경찰에 달리기도(잡히기도) 여러 번이고. (웃음) 그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됐던 것 같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에서 나오면서 음악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는데 영석이 형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된 거다.

-연영석이 코스콤 노동자들에게 <연대투쟁가> 한 소절을 가르쳐주는 대목이나 이주노동자들의 거리행진에서 메가폰을 들고 앞장서는 장면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촬영은 여러 번 더 했는데 결국 쓰지 않았다. 영석이 형은 자신이 대단한 투사처럼 묘사되는 걸 꺼려했다. 따라나서면 조용조용할 수 없냐, 부담된다 그랬으니까. 카메라를 많게는 4대까지 썼는데 덩치들이 따라다니니까 신경이 쓰였겠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집회에 나타나니까 현장 노동자들도 고민이 많았을 거다. 가수 왔으니까 노래를 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럴 때마다 영석이 형은 그냥 나온 거라고 멋쩍어하고.

-처음에 흔쾌히 승낙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썩 내켜하진 않았다. 실은 만났을 때 이미 <필승 ver1.0 주봉희>를 본 상태였다. 주봉희 위원장과도 굉장히 잘 아는 사이더라. 그런데 형이 주 위원장을 미화해서 그린 것 아니냐고 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었는데, 형은 자신의 활동이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다뤄지는 게 싫다고 했다. 형의 관심은 노동운동 내에서도 소수자들인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더 관심이 많은데, 완성된 걸 보고서는 넣을 거면 그쪽을 더 많이 넣었어야지 하고 핀잔을 줬지만.

-연영석의 노래가 갖고 있는 힘은 뭔가. 처음에는 뜨악했다면서 이제 광팬이 됐다.
=직접적이지만 싸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 굉장히 세련됐고 음악적 완결성도 어떤 인디음악에 뒤지지 않는다. 서태지 2집이 그러하듯이 지금 영석이 형 1집을 들어도 신선하다. 물론 영석이 형의 토양이나 색깔이 도드라질 수 있었던 데는 고명원 프로듀서의 역할이 컸다.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세상과 어울리는 그의 음악이 카메라를 든 내게는 어떤 모델처럼 느껴졌다.

-공연장면 촬영이 굉장히 중요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형 음악은 록 사운드다. 밴드 공연으로 가야 가슴을 울리고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까 그런 공연을 많이 못하는 게 안타깝다. 촬영 때는 찍고 싶었던 밴드 공연이 많지 않아서 서강대 공연도 집어넣고 그랬다. 사실 그 공연은 분위기 안 나는 대낮에 한다고 뒤늦게 듣고서는 찍어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막상 가보니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반면 그거 찍고 나서 며칠 있다 울산에서 대규모 공연이 있었다. 우리쪽에서도 300만원 정도 들여서 카메라 4대에 7명이 차 대절해서 내려갔는데 전혀 분위기가 안 났다. 정말 멋진 공연을 상상하고 갔는데 다 어그러졌다. 조직된 노동자들과 집회 형식에서 형의 음악은 제대로 듣고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연결시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구성에 대해서는 이런 반성을 한다. 코스콤 노동자들 쫓아다니고, 이랜드 노동자들과 KTX 여승무원들 사는 모습 보여주고. 노뉴단 시절에서부터 내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상황들을 너무 안이하게 붙인 것은 아닌가 하고. 그 때문에 영석이 형이 2집 끝나고 칩거했듯이 나도 한 6개월 잠적했다. 관객과의 대화에도 되도록 안 나가고. 내가 해왔던 어떤 것에 대한 반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어서. 만들면서는 영석이 형 팬들한테 욕 좀 먹겠구나 싶었다. 한 개인의 묵직한 고민이 3집에 많이 담겨져 있는데 그 곡들을 많이 넣지 못했다. 아무래도 현장의 화면들과 어울리는 노래들로 구성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빵> 같은 노래는 정말 아쉽다. 영석이 형은 사운드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한다. 한곡 빼고 전부 라이브로 녹음했는데, 그러다 보니 원곡의 무게감을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있고.

-전반부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보면서 궁금한 게 있었다. 수상자로 호명된 연영석은 자리에 없는데 카메라는 여전히 무대를 비추고 있다. 촬영팀이 나눠져 있었던 건가.
=영석이 형은 수상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수상자로 불렸을 때 형은 바깥에서 공연비 세고 있었는데. (웃음) 그러다 뒤늦게 알고 무대 위로 뛰어나온 것이고. 나야 김창남 교수가 끝까지 한번 있어보라고 해서 언질을 줬는데 영문도 모르고 그냥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형이 아무 상도 못 받고 해서 카메라 전원도 껐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거지. 다행히 같이 갔던 친구가 형이 무대에 오르는 장면들을 찍긴 했는데 나는 허둥지둥하느라 놓친 게 많다.

-‘필승’ 시리즈의 원칙이 있다면. 인물을 택할 때의 기준이 궁금하다.
=노동운동가를 다루되 지도부는 안 된다는 정도. 개인의 역사가 풍부한 사람이면 더 좋고. 시리즈를 처음 기획했던 게 사실 좀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운동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패배하는 곳은 계속 패배하고, 타협하는 쪽은 계속 타협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게 좀 답답했다. 이제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에 초점을 맞춰야겠다고 맘먹은 것도 그 때문이고. 영석이 형 같은 경우는 노동운동에 전념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내 고민들이 투영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결정하게 됐다.

-노뉴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면서 힘을 얻는 경우도 있었고 반면 소진되는 경험을 한 적도 있을 텐데.
=파업현장의 힘 같은 게 있다. 보수 반동 꼴통이 아니라면 활기찬 목소리로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면 힘이 불끈불끈 난다. 90년대 중반 지하철파업이나 98년 현대자동차파업이 그랬다. 특히 노조를 처음 만든 이들에게는 설렘과 두려움이 얽힌 묘한 긴장이 느껴진다. 그러나 얼굴 한번 쓱 보이고 마는 국회의원이나 민주노총 지도부들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다. 비정규직 문제에 어떤 해결 의지도 갖고 있지 않는 지도부들을 보면서 나조차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사자들은 어떻겠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는 자포자기야말로 노동운동의 가장 큰 적인데 그런 의식을 지도부가 퍼트린 책임이 크다.

-노뉴단에서 나온 이유가 궁금하다.
=무슨 일이든지 오래 하면 재미없잖나. 창립멤버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활동하는 선배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필승 ver1.0 주봉희>까지 하고 2003년에 나왔는데, 경제적인 이유가 좀 컸다. 결혼해서 같이 사는 친구한테 약속한 것도 있고.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생계를 책임지는 식으로 바통 터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노뉴단에서 나와서 한동안 방송프로덕션에 다니기도 했고, 미디어센터에서 일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력이 되니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더라. 그래서 아내한테 그랬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고. 이후 개인작업을 시작했는데 첫 번째가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였다.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는 삼성화재쪽에서 문제 삼아서 결국 KBS 방영이 무산됐다.
=정말 힘들었다. 제작비 잘 받아봤자 800만원 정도 선인데 우리 가정 입장에서는 몇달치 생활비잖나. 방영 약속받고 시작한 건데 결국 일이 그렇게 돼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렇다고 다시 직장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방영이 취소된 뒤에 삼성의 로펌쪽에서 전화가 왔었다. KBS에서 안 틀어준다는데 한번 만나시죠라면서. 그럴까요, 싫은데요 그러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런다. 삼성이 얼마나 주는지 한번 계산이나 해보지 그랬냐고. 내 입장에서도 돈 받고 이 판을 확 뜰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었다. (웃음) 그때 당한 일 때문에 삼성에 대한 복수심이 아직도 잘 안 가라앉는다. 언젠가 삼성 골탕먹이는 다큐를 꼭 만들 거다.

-다큐멘터리 감독들끼리 힘을 모아서 옴니버스 작업을 한번 해보지 그러나.
=실제로 기획해서 제안서를 쓴 적도 있다. 김용철 변호사 나왔을 때 독립다큐한다는 사람들이 가만있을 거냐,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처럼 옴니버스로 한번 가보자고 했는데. 결국 추진을 못했다. 나 말고도 원한 갖고 있는 감독들이 꽤 되니까 언젠가는 성사될 것이다.

-건국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입학했는데 과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애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마음에 안 들고. 술만 먹고 올 F 맞고 2학기에는 휴학하고 놀다가 군대를 갔다. 그러다 돌아와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영화지 싶더라. 어렸을 때는 극장 구경 좀 했으면 했으니까. 그래서 햇살이라는 이름의 영화동아리에 갔는데, 이상한 선배들을 만나서 운동을 접한 거지. 다행인 건 운동도 열심이었지만 방학 때만큼은 단편을 필름으로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곳이었다.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김)명준이 형과 (홍)형숙이 누나 따라다니면서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에서 막내로 촬영을 했고, 얼마 뒤에 노뉴단에서 제안이 오더라. 영화감독보다 운동을 어떻게 더 오래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에 주저하지 않고 갔다. (일찌감치 스카우트된 건가?) 월급이 얼마였는 줄 아나? (웃음)

-구조조정, 비정규직 문제 등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된 관심사였다.
=삶의 조건은 점점 안 좋아지는데 왜 그것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다큐 안 하고 애먼 짓 할지 몰라도 결국 이런 관심은 쉽게 저버릴 것 같지 않다. 백발의 켄 로치가 여전히 존경스러운 이유도 그러하고.

-지금 촬영 중인 <샘터분식>도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홍대 샘터분식은 한때 근처 고시원에 살면서 자주 들렀던 곳이다. 그 주변에 살면서 분식집에 들르는 세명의 인물들을 관찰하는 형식이다. 부제는 그들도 우리처럼이라고 붙였다. 왜 사람들은 밀리고 또 밀리면서도 그냥 사는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또 뭔가. 시간적 배경이 겨울에서 봄까지인데, 일상의 조그만 변화들 속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는지, 그 안에서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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