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헐크와 우리
2008-06-13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아마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일 것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원전을 따지고 들면 19세기 영국 작가 스티븐슨의 소설이 떠오른다. 점잖은 지킬 박사가 약을 먹으면 선악판단의 잣대를 상실한 채 파괴 욕구에 불타오르는 살인마 하이드씨가 되는 이야기. <인크레더블 헐크>의 브루스 배너는 자의가 아니라 실험의 실패로 인해 헐크가 됐고 변신을 한 뒤에도 살인의 쾌감을 느끼지 않지만 분명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헐크와 싸우는 괴물 어보미네이션이다. 헐크처럼 빠르고 강한 놈이 되고 싶다는 그놈의 욕망은 지킬 박사를 괴롭히던 살인마 하이드씨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 물론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마니아 중심인 괴기소설 혹은 공포물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마블의 코믹스에서 다시 태어난 <인크레더블 헐크>는 훨씬 대중적인 슈퍼히어로물로 바뀌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크레더블 헐크>는 우리 내면의 무의식이 괴물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슈퍼히어로 액션영화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활과 칼로 싸우던 의적을 그린 <로빈훗>이나 <쾌걸 조로>가 현대에 이르러 <배트맨>이나 <스파이더 맨>으로 탈바꿈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이 만드는 현대의 신화에 관해 우리는 다음주 슈퍼히어로 특집호를 통해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참이다.

다음호 예고부터 했지만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인크레더블 헐크>를 보면서도 촛불집회 장면이 떠올랐다. 폭력본능에 몸을 내맡긴 채 질주하는 괴물 어보미네이션이 쓰러진 여대생의 머리를 마구 차던 의경의 군홧발과 겹쳐 보인 것이다. 감마선 실험에 동원된 것도 아닌데 비무장 시민을 향해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차는 폭력성은 어떻게 발현된 것일까? 폭력행위를 한 의경을 찾아 법적 조치를 한다는 기사를 읽고 나니까 오히려 심란해진다. 동영상에 찍혀 공중파 방송에 수차례 반복 재생된 탓에 폭행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됐지만 그날 시위에서 폭력행위는 한둘이 아니었다. 의경들이 두줄로 나란히 늘어선 사이로 계속 걷어차이고 맞으면서 연행됐던 시민들에게 정부는 어떤 보상을 할 수 있는가? 촛불집회의 배후를 잡겠다는 정부의 레토릭을 빌리자면 정말 찾아야 하는 것은 그날 시위진압 경찰의 배후일 것이다. 이성과 자제력을 잃고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린 경찰. 촛불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헐크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냉큼 꼬리만 자르고 도망쳐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의 거짓말과 변명과 임기응변에 지친 사람들이 안 그래도 헐크로 변신하기 일보 직전까지 와 있으니 말이다.

이번호 표지는 영화배우 설경구씨가 촛불을 들고 찍었다. 집회에 직접 나가지는 못했지만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다. 영화잡지에서 계속 촛불집회 얘기하는 것이 부담스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떤 영화인을 만나도 촛불집회 얘기가 빠지지 않는 상황이다보니 이해하시길 바란다. 촛불의 힘이 어떤 슈퍼히어로의 파워보다 크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요즈음이다.

P.S. 오정연 기자가 미래를 위한 변신을 준비하느라 <씨네21>을 떠난다. 영화와 영화인(특히 촬영감독들)을 정말 사랑하며 늘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친구라 빈자리가 많이 허전할 것 같다. 이번호 오픈칼럼에서 자신의 기사에 대한 겸손한 작별의 변을 썼지만 대상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의 글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기자로 일했던 것처럼 한다면 앞으로 뭐든 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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