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거기 없는 것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1]
2008-06-19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애도에 대한 정반대 태도를 보여준 두 영화, <위 오운 더 나잇>과 <아임 낫 데어>

얼마 전까지는 욕망이 지적 유행이었고, 지금은 애도가 트렌드이다. 대상을 바꿔가면서 앞을 다퉈 장례식에 열중하고 있고, 새로운 리빙 데드를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저 단지 들뢰즈에서 데리다에로, 혹은 지젝에서 아감벤으로 아카데미 안의 명품이 시즌 패션을 바꾼 것이 아니라면) 왜 갑자기 상실이 그렇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것일까? 실패가 예정된 존재론. 타자에 대한 채무. 그런데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대차대조표 안의 납골당 앞에서 이미 삼켜버린 타자를 토해내기 위해 자아는 왜 그렇게 고통받고 있는가? 성공적인 애도와 불충분한 애도 사이의 숨바꼭질. 이미지들이 날뛰고, 환영이 세상을 감싸고 있으며,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이 도래하고 있는가? 그 뒤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주어로서의 무엇과 목적어로서의 무엇. 둘 사이의 차이. 어제까지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를 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었다면(들뢰즈-가타리의 니체적인 그 아름다운 문체), 이제 세계화를 설명하는 증세는 우울증의 산문이 되었다(아감벤의 하이데거적인 그 무미건조한 서술). 물론 이 자리는 신간도서를 소개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 대신 여기서는 영화가 애도에 대해 보여준 두 가지 정반대의 태도, 그러니까 먼저 순진할 정도로 과도하게 표명할 때 어떻게 그 행위가 역설적으로 애도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바라본 다음, 반대로 변덕스럽게 빈정거리는 이미지로 애도를 오작동시키려 들 때 어떻게 거기서 욕망이 변장을 하고 나타나는지를 쳐다볼 생각이다.

과소평가된 제임스 그레이의 <위 오운 더 나잇>

먼저 <위 오운 더 나잇>. 올해 두명의 제임스 영화를 본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한 사람은 제임스 맨골드이고(<3:10 투 유마>), 다른 한 사람은 제임스 그레이이다. 나는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좋아하며, 그런 다음 매번 새로운 영화에서 영화가 실망스러울지언정 항상 보다가 멈칫할 만큼 황홀한 신을 펼쳐 보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오로지 그 장면 때문만이라도 꼭 한번 더 보게 만든다(하지만 <앙코르>는 정말 나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명의 제임스에 대해서 (허문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신중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내가 과문한 탓일까?).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위 오운 더 나잇>을 환기하기 위해서 먼저 김소영이 쓴 글을 읽기 바란다(<씨네21> 제656호, ‘미국 시민권을 지닌 영화의 지극히 글로벌한 유통’). 나는 이 글의 후반부에 아무것도 더할 말이 없다. 특히 이런 대목.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밤의 지배자들인 나쁜 이민자들은 축출되고 죽은 시민이 된 아버지의 희생은 애도된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형제들의 혈연동맹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시작, 사랑은 아마다와 바비의 것이었으나 영화의 끝, 바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형 그루진스키이다.’ 게다가 애도와 아감벤에 대해서도 잘 정리해놓았다. 그러므로 다소 얄밉게 이미 해놓은 노력에 살짝 편승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약간 관심을 돌려서 제임스 그레이를 조금만 더 소개하려고 한다.

<위 오운 더 나잇>은 얼핏 보기에는 상투적인 갱스터 하드보일드 영화처럼 보인다. 뉴욕의 나이트클럽. 잘나가는 지배인 바비 그린. 마약이 곧 도착할 예정이며, 악당들은 바비의 도움이 필요하다. 경찰들은 마약 커넥션을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해 이제 바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희생자가 발생하고, 결국 바비는 경찰 편에 서서 악당들을 소탕한다. 끝. 만일 이게 전부라면 <위 오운 더 나잇>은 (<무간도>를 ‘지루하게’ 각색한)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드>의 나른한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장르의 얼룩이 종종 진행을 방해한다. 지배인 바비 그린은 경찰인 아버지와 형을 두고 있다. 그는 거의 의절한 상태로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가족 행사가 있으면 마지못해 찾아간다. 그날도 그래서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형은 그에게 경찰에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자장은 반대편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바비가 지배인으로 있는 나이트클럽의 주인은 그를 거의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자기 집에 초대한 다음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바비와 함께 사업을 의논한다. 말하자면 바비의 대부. 이 대부가 돈을 대고 있는 마약 커넥션의 보스는 바비를 보자마자 거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낸 다음 그에게 뉴욕으로 들어오는 마약의 유통을 부탁한다. 처음에는 코폴라의 <대부>와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의 리믹스 버전처럼 보이지만, 곧 제임스 그레이는 방향을 튼다. <위 오운 더 나잇>을 내내 짓누르는 것은 뉴욕에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러시아의 아이콘들과, 러시아 이름들과, 러시아의 가족들과, 러시아라는 것을 숨기려는 그림자이다. 처음에는 뉴욕 경찰들과 러시아 마약 커넥션 마피아들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서로 반대편에 선 가족과 사업 사이에서 이 난처한 지배인이 자기 자신에 관해 고백하면서 바비 그린은 어머니의 성을 딴 이름이며 자기의 진짜 이름은 로버트 바비 그루진스키라고 말할 때 미국의 시민권은 혈통으로 이어진 이민의 커뮤니티를 놓고 내기를 벌이게 된다. 이때 바비 그린은 (제임스 그레이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서 1막과 2막까지를 연기하는 주인공”과 같은 지경에 빠지게 된다. <위 오운 더 나잇>이 셰익스피어에게서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축하연회장에서 아버지와 형이 동생 바비 그린을 따로 불러 그 곁에 위치한 교회로 데리고 간 다음 그에게 이제부터 시작될 경찰과 마피아의 전쟁 사이에서 결국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할 때, 이 신은 그 이후에 진행될 모든 동선의 도미노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이때 바비 그린은 가족과 사회 사이의 복잡한 인과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막연하게 느낀다. 말하자면 비극.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는 의도적으로 범죄와 악으로부터의 정화과정을 그리면서 의도적으로 현실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렇다고 그가 장르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아니다. <위 오운 더 나잇>은 반대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단순해진다. 그리고 거의 원형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인물들의 상황에만 집중한다. 상황의 과정. 이때 상황으로부터 장르와 현실이 동시에 사라지자 갑자기 이 과정은 마치 종교적 암시 같은 느낌을 불러들인다. 좀더 정확하게 수난의 과정. 이때 제임스 그레이를 흥분시키는 것은 비극적 패러독스이다.

이때 영화 내내 <위 오운 더 나잇>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거의 음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음악 효과이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블론디의 <Heart of Glass>(나는 이 글에서 음반이나 노래 제목을 구태여 번역하지 않을 생각이다)가 침입하듯이 고막을 때린다. 첫 번째 인덱스. 여기가 나이트클럽이라는 장소의 표기. 두 번째 레토릭. 이 노래를 ‘유리처럼 차가운’ 마음이라고 들어야 할까, 아니면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세 번째 레퍼런스. 그런데 이 노래가 실린 음반의 제목은 <<Parallel Lines>>이다. 말 그대로 ‘평행선’.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위 오운 더 나잇>보다 차라리 이쪽이 더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뉴웨이브 음악을 들려준 다음 두 번째 제임스 그레이가 선곡한 노래는 영국 펑크밴드 크래시의 <Magnificent Seven>이다(석장짜리 LP <<Sandinista>>의 첫 번째 곡이다. 이 음반 이름은 당신이 알고 있는 1961년에 조직된 니카라과 무장혁명조직 ‘산디니스타’ 맞다). 그런 다음 화면 안의 노래는 슬그머니 사라진다(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현실의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인물의 감정 안으로 선율은 자리를 옮긴다. 그때 제임스 그레이는 폴란드 작곡가 보이체크 킬라르가 쓴 세개의 테마를 가져온 다음 그것을 영화 안에서 계속 변주한다. 하나는 아들 바비 그린의 선율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버트의 반주인데, 여기에 악당의 멜로디가 더해진다. 이 삼각형은 종종 불균형하게 느껴지고, 어떤 대목에서는 마치 불협화음처럼 낮게 웅얼거리다가 때로 러시아 정교회에 온 것 같은 울림을 끌어낸다. 어떤 경우에도 음악은 중립적으로 사용되거나 드라마를 흥분시키려고 들지 않는다. 이때 킬라르가 염두에 둔 선율은 명백히 크르지츠토프 펜데레키와 헨릭 미코라이 고레츠키이다(그런데 킬라르는 모튼 펠드먼을 구체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음악들은 서사를 위해서 아무것도 봉사하지 않는다. 차라리 음향처럼 사용된 이 음악들은 종종 서사를 방해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영화 안으로 들어온 다음 자꾸만 인물이 말하지 않는 대사의 톤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물들이 말하다가 문득 대사를 멈출 때 갑자기 그 인물의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가 마치 러시아어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라도 하는 것 같은 환청을 불러일으킨다. 이 효과는 매우 주의 깊게 이루어져서 음악의 감정상태가 아니라 점점 바비 그린이라는 인물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때 바비 그린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그의 존재론적 질문에 기댄 위태로운 정체성에 관한 수난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비극의 원형을 그리는 일관된 태도

약간의 첨언. 이것은 <위 오운 더 나잇>에서 갑자기 던진 질문이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이민 온 세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혹은 그의 세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혈통을 근심한다(대런 애로노프스키, 스파이크 존즈, 웨스 앤더슨이 그와 동갑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데뷔작 <리틀 오데사>에서 뉴욕 브롱크스의 브라이튼 비치를 무대로 유머없이 진행된다. 러시아 유대인 커뮤니티로 돌아온 살인청부업자는 아버지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한다.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동생은 넋이 나간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오이디푸스적이라기보다는 무언가 가족과의 혈연을 끊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가득 찬 이 이야기는 장르에서 시작하지만 곧장 비극의 알레고리에 사로잡힌다.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이 가족은 미국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슬픈 자들의 비극을 맞이한다. 이들은 누구도 자신들이 왜 슬픈 자의 자리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적 비극의 무대. 이들은 자기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서져가면서도 그저 죄 짊어진 상태에서 고스란히 운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역사의 끈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가족. 그런 다음 낯선 나라에서 맞이하는 비극. 이때 제임스 그레이는 고전적인 비극을 미국 안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던져진 수동적 선택의 실존적인 상황에로 재빨리 연결시킨다. 두 번째 영화 <더 야드>는 감옥에서 6년 만에 출소한 사내가 가족에게로 돌아오지만 과연 사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 위태로운 내기를 한다(제임스 그레이는 이 영화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은 다음 영감을 얻어서 만든 일종의 독후감이라고 말했다).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바비 그린은 단지 가족으로부터 눈 감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이 육감적이면서 정숙하기까지 한 그의 애인 아마다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오로지 그가 희생양이 될 때에만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잔인한 시련의 요구를 받을 때 이야기는 이것이 희생을 명령하는 것인지 의무에 대답하는 것인지 모호한 상태로 갑자기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다. 이때 객관적 희생이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대답은 이상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비 그린은 형에 대한 복수의 이름으로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 러시아 마피아 보스 바딤을 배신하고 그의 마약 은거지를 FBI에 고발하지만, 그 대가로 바딤은 그의 아버지를 죽인다. 이제 바비 그린은 그의 사업상의 아버지를 죽여야만 복수가 성립된다. 영화는 점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고 더 나아가 가족에 대한 방어가 이웃에 대한 증오로 밀고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임스 그레이는 장르에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무대를 조금씩 고전적인 무대로 옮겨온 다음 주인공이 수난이라고 부를 만한 시련에 빠져들 때 거의 비극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광경으로 옮겨놓는다. 이때 그는 이야기를 확장하지 않고 점점 더 가족 안으로 좁혀 들어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단순한 장소의 형태를 갖추면서 보기 드물게 인물에로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 점에서 나는 제임스 그레이가 폴 토머스 앤더슨보다 좀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상징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내내 육신의 연기를 하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반대로 고립된 상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자체로 자신의 행동 자체가 비극적인 무대의 제스처가 되는 와킨 피닉스의 표정의 연기를 비교해보라. 말하자면 제임스 그레이는 액션 자체를 심리적 과정으로 만든다.

<위 오운 더 나잇>이 장르로부터 빠져나와 바비 그린을 상황에 던져버렸을 때 그는 자기의 행위로 어떤 목표를 이루려거나 혹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두개의 가족 사이에서 난처하게 머뭇거린다. 하나는 물론 그를 낳아준 아버지 그루진스키의 가족이다. 다른 하나는 그에게 사업적 성공을 약속하고 그를 믿어주는 대부 부자예프의 가족들이다. 이때 바비 그린은 그루진스키와 부자예프 두개의 가족 사이에서 이상한 방법으로 두 가족이 미국인이 된 과정을 대립시키는 척하면서 겹쳐놓고 고스란히 동시에 반복한다. 그가 타락한 삶으로부터 올바른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가 선택하는 행동은 밀고와 배신, 그리고 복수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점점 더 나쁜 행위이다. 그는 그루진스키가 되기 위해 부자예프의 행동을 되풀이한다. 이때 제임스 그레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명백히 앤서니 만 이후에 사라져버린 장르 안에서 영웅이 떠안아야 하는 희생의 신화학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은 앤서니 만의 등장인물처럼 복수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복수는 그 원인이 모호하고(누구 때문에 복수가 요구되는가? 원인에 대해서 그는 무죄인가?), 이때 필연적으로 수난이 문제가 된다(우리는 어디까지 원인을 소급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루진스키와 부자예프는 러시아에서 미국에 온 먼 친척들일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이 반목은 바비 그린이 그루진스키일 수도 있지만 부자예프일 수도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바비 그린이 (명백히 그의 마음을 은유하는 풍경인) 불길이 타오르는 갈대숲에서 결국 바딤 네진스키를 죽이지만 그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호하다(다 타버리고 난 다음 재가 되었을 때 바비 그린은 여전히 시민의 의무를 지킬까?). 아니, 차라리 바딤 네진스키를 불타는 갈대숲에서 죽일 때 그는 자기의 알리바이를 소멸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알리바이? <위 오운 더 나잇>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바비 그린이 그루진스키가 되기 위해서 두명의 아버지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의 아버지 버트 그루진스키는 죽고 그의 대부 마라 부자예프는 살아남는다. 이때 아버지 그루진스키에 대한 애도는 (이미 김소영이 지적한 것처럼) 몹시 순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아들 바비 그린이 미국 시민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절차라면,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상징의 질서가 자아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치르는 미국식 굴복의 폭력적 우회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실상 바비 그린의 애도는 그가 부자예프의 마약 커넥션인 바딤의 믿음을 배신했을 때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비 그린의 애도는 처음부터 상실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 불충분한 행위일 때 균열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사회 안에서 성공적으로 애도의 행위를 수행하면 할수록 사실상 부자예프는 그대로 남겨놓은 채 아버지 그루진스키는 이미 상실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대상과 동일화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지막 장면.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미래의 버트 그루진스키는 형 조셉이 아니라 동생 바비 그린이다. 형은 총상에 의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사무직으로 옮겨가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은 동생 바비 그린이다. 아버지의 유령. 혹은 가문의 반복.

시종일관 죽음이 어른거르는 <아임 낫 데어>

이번에는 반대의 방향. 토드 헤인즈는 록가수들의 전기에 관심이 많다. 43분 중편으로 찍은 <슈퍼스타: 카렌 카펜터스의 이야기>에서는 1970년대 초를 장식했던 남매 듀오 카펜터스의 여동생 카렌에 관한 짧은 삶을 인형을 내세운 스톱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했으며, <벨벳 골드마인>에서는 (토드 헤인즈 자신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데이비드 보위보다는 T-렉스의 마크 볼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거의 엑스파일에 가까운 그 부활설을 그려냈다. <아임 낫 데어>는 다시 한번 로큰롤의 슈퍼스타를 초대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러나 두편의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밥 딜런은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애도를 바치거나 혹은 불만족스러운 애도를 후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상쩍게도 <아임 낫 데어>에는 시종일관 죽음이 어른거린다. 혹은 일곱명의 밥 딜런이 변장을 하고 유령의 분신들처럼 나타난 다음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매번 나타난 밥 딜런은 다른 인물이며, 단 한번도 자신을 밥 딜런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마치 상형문자와도 같은 밥 딜런.

상투적인 소개. <아임 낫 데어>를 본 다음 모두들 밥 딜런을 연기하는 여섯명의 배우 혹은 일곱명의 밥 딜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기발하기는 하지만 놀라운 것은 아니다. 만일 밥 딜런이라는 가수의 궤적에 대해서 당신이 잘 알고 있다면 놀라기는커녕 그 탁월한 선택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약간의 회고. 나는 밥 딜런의 앨범을 (공식적으로 발매한 일곱개의 ‘해적음반’(Bootleg) 박스 세트를 비롯해서) 라이브까지 포함해서 모두 갖고 있다. 약간 자랑을 하자면 밥 딜런이 1962년 10월 뉴욕 맥두갈 스트리트 116번가 지하에 자리잡은 ‘가스라이트’에서 가진 라이브 <<Live at the Gaslight>>도 갖고 있다. 자랑인 까닭은 2005년에 출반된 이 레코딩은 미국 내의 별다방(Starbucks)에서만 제한적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 물론 나는 밥 딜런을 순서대로 듣지 못했다. 밥 딜런은 셀프 타이틀의 첫 번째 녹음을 1961년에 내놓았다(그러니 그걸 내가 무슨 재주로 순서대로 듣나?). 내가 처음 들은 밥 딜런의 레코드는 1975년에 녹음한 <Blood on the tracks>이다. 그런 다음 한편으로는 이전 녹음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보를 기다렸다. 밥 딜런을 들을 때 가장 바보 같은 짓은 그의 ‘히트곡 모음집’(Greatest Hits)을 선택해서 듣는 방법이다.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듣는 사람에게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밥 딜런에 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 없이 들었을 때 나는 거의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끊임없이 새로워졌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를테면 <The Times they’re a-changin’>을 들은 다음 <Nashville Skyline>을 들었을 때 나는 두명의 밥 딜런이 동명이인이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종종 목소리가 바뀌었고, 그래서 어느 쪽이 가성일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포크로 시작해서 로큰롤을 했고, 그런 다음 컨트리를 했다. 매번 그는 열렬한 팬들을 배신했고, 그런 다음 새로운 지지자를 끌어들였다. 발라드를 불렀고, 커버 버전만으로 두장의 앨범을 냈다. <<Self Portrait>>와 <<Dylan>>. 그리고 찬송가를 불렀다(보통 여기서 끝난다). 1980년대가 되었을 때 밥 딜런은 그래미 가수처럼 보였다. 지지부진하지만 쉬지 않고 새로운 녹음을 했다. 하지만 항상 발표한 앨범마다 한곡 혹은 두곡이 혹시나, 라는 기대를 끌어냈다. 거의 기적처럼 1997년 <<Time out of Mind>>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단지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해 거의 최고 걸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지지난해 <<Modern Times>>는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마치 다시 전성기가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밥 딜런은 거의 동시에 시작했지만 지금 그 둘은 얼마나 다른가? 올해 그의 나이 69살이다. 내가 길게 밥 딜런의 디스코그래피를 소개한 것은 이 자체가 <아임 낫 데어>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혹은 <아임 낫 데어>의 줄거리는 바로 그 밥 딜런의 삶 자체이다. 그 이외에는 어떤 줄거리로도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밥 딜런에 대해 만일 당신이 잘 알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이해하는 척해봐야 알 수가 없게 진행된다. 그저 넘쳐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어리둥절해할 뿐이다. 영화는 모든 신을 레퍼런스 없이 이해할 수 없게 찍었다. 거의 백과사전적인 나열.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아임 낫 데어>는 (올리버 스톤의) <도어즈>가 아니다. 혹은 조니 캐시를 그린 (제임스 맨골드의) <앙코르>가 아니다. 레이 찰스를 그린 (테일러 핵포드의) <레이>가 아니다. 슈프림스를 그린 (빌 콘돈의) <드림걸즈>가 아니다. 토드 헤인즈는 밥 딜런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배려도 하지 않는다. 충고하건대 당신이 아무리 영화를 좋아해도 밥 딜런에 관심이 없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아임 낫 데어>는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도 없다. 밥 딜런의 ‘장미 봉오리’ 따위는 이 영화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밥 딜런을 입체적으로 만들 생각도 없다. 차라리 토드 헤인즈는 그에 관한 증빙서류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는 쪽에 훨씬 관심이 많다. 그는 밥 딜런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대신에 각기 다른 사방의 양쪽 끝을 매번 그 끝까지 가져간 다음 꼭짓점 사이를 구태여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때로 각자의 벡터를 따라 서로 멀어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각자의 전개. 그런 다음 각자가 각자의 사건이 된다. 토드 헤인즈는 <아임 낫 데어>를 만들기 위해서 밥 딜런을 만난 적이 없으며, 그에게 어떤 자문이나 확인의 메일도 보내지 않았다(심지어 밥 딜런이 이 영화를 보았느냐는 질문에 “보았을 것으로 확신한다”라는 수준의 대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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