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5월9일 영상자료원 내에 문을 연 한국영화박물관을 위한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며 전시품 기증 캠페인을 벌입니다. 41번째는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기증한 김일해의 신분증명서입니다.
1980년대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현장에서 활동했던 김일해는 춘사 나운규, 윤봉춘 등과 함께 활동했던 1세대 영화인이다. 김일해는 1906년생으로 염전을 운영했던 부친과 총독부 사무관이었던 형의 영향을 받아 18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의 신흥키네마에서 배우 수업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일해는 1935년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로 데뷔한다. 이후 해방 전까지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선일보영화제 4위에 오른 <춘풍>(박기채, 1935)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937년 나운규 감독의 유작 <오몽녀>에서 물오른 연기를 보였다고 한다. 데뷔연도가 같고 친분이 두터우며 비슷한 성격파 배우로서 자주 비교되는 전택이가 서민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었다면, 김일해는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모던한 이미지의 배우였다.
1940년 1월 조선영화령이 공포되고 군국주의 선전영화만이 만들어지던 식민지 말기의 암흑기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 소속으로 <수업료>(최인규, 1940), <집없는 천사>(최인규, 1941), <지원병>(안석영, 1941), <반도의 봄>(이병일, 1941), <거경전>(방한준, 1944)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전쟁기에는 공군이 제작한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등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휴전 이후 한국영화 현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많은 신인배우들이 데뷔하면서 스크린에서 멀어져 갔다. 1958년 긴 공백기를 깨고 영화인생 30주년을 기념하며 <인걸 홍길동>으로 감독 데뷔를 했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또다시 침묵했다. 1963년 <단종애사>로 다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뒤에는 분장 스탭으로 영화인생의 전환을 맞았다. 1984년에는 이두용 감독의 <장남>에서 노년의 아버지 역으로 마지막 출연을 했다. 한국영화박물관에 전시 중인 김일해의 신분증명서는 1959년 한국영화감독협회가 발행한 것으로 <인걸 홍길동>을 연출한 다음해에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