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크레더블 헐크>를 보고 오는 길인데, 루 페리그노가 이번에도 카메오로 나오더군요. 경비원 역입니다. 놓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거예요. 여전히 만만치 않은 덩치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영화 내내 방방 뛰어다니는 초록색 CG 헐크를 보다보면 잠시 등장한 그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에서 오버랩됩니다.
루 페리그노 하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는 바로 오리지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피터 루퍼스입니다. 미션 임파서블팀에서 이른바 ‘근육맨’을 연기하던 배우죠. 그가 연기한 윌리는 다른 네명과 함께 빠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멤버였지만 계급으로 따진다면 늘 바닥이었습니다. 왜냐? 머슴 차별은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서니까요. 여자인 시나몬이나 흑인인 바니도 그보다 늘 상위였지요. 배우로서도 마찬가지였고요. 루퍼스에게는 늘 단순한 역만 주어졌습니다. 힘을 쓰거나 배경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죠.
루 페리그노는 피터 루퍼스보다 운이 더 좋았습니다. <헐크> TV시리즈에서 그는 거의 주인공이었죠. 드라마 파트를 맡은 건 브루스 배너를 연기한 빌 빅스비였지만 그래도 시리즈의 타이틀 롤은 브루스 배너가 아니라 헐크잖습니까? 그리고 그가 배우 경력을 시작했던 70년대 말은 보디빌더가 영화주인공이 되기 좋은 때였습니다. 스테로이드를 잔뜩 먹은 남자들의 근육이 찬미의 대상이 되고 실베스터 스탤론이니 아놀드 슈워제네거니 하는 근육맨들이 웃통 벗고 나오는 영화들이 슬슬 만들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도 그 흐름을 타서 꽤 잘 버텼습니다. <헐크> 시리즈는 82년에 끝났지만 90년대까지 TV영화들이 나왔고, 헤라클레스 역은 두번 정도 했을 거예요. 물론 슈워제네거 수준의 스타가 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만, 그게 꼭 페리그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슈워제네거의 경력은 정말로 예외적이었으니까요. 그만큼 운 좋은 사람이 같은 세대에 하나 이상 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죠. 게다가 가장 유명한 역을 연기할 때 라텍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면….
전 <헐크> 시리즈 이후에 잠시 방영되었던 TV시리즈 <트라우마 센터>에서 나왔던 페리그노의 모습을 조금 기억해요. 그 시리즈에서도 그는 말없이 힘만 쓰는 근육맨이었지만 정작 그가 근육 쓰는 장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그가 수줍은 얼굴로 동료 구급요원에게 따돌림당하고 구박당하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던 장면은 기억납니다. 그 각본은 아마 페리그노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을 거예요. 그는 청각장애인이고 보디빌더가 된 것도 자신감 회복을 위해서였다고 하니까요. 하여간 그 장면에서 전 잠시 뭉클했습니다. 결코 로버트 드 니로 수준의 연기는 아니었지만 그 덩치 큰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고 연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광경은 감동적이었어요.
그러나 그건 그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의 진짜 역할은 그가 가진 육체의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과시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극한은 <헐크> TV시리즈였고요. 페리그노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을 겁니다.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두편의 <헐크>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그는 영상매체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헐크예요. 전 리안의 영화를 좋아하고 이번에 나온 <인크레더블 헐크>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지만, 그 두편의 영화들에서 CG로 만들어낸 헐크는 초록색 메이크업을 한 루 페리그노에 비하면 고무 장난감 같습니다. 믿음도 안 가고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아요. 여전히 그는 저에게 유일한 진짜 헐크입니다. 그리고 그건 무척 안심되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CG 마법이 인간의 육체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