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 보인다고요? 아, 조금은. 어제 <박쥐> 밤촬영을 하느라 거의 잠을 못 자서 그런가봅니다. <박쥐>에 관해서도 궁금해하시는 건 알겠는데 나중에 상세하게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죠. 오늘은 <놈놈놈>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에, 그럼…. 김지운 감독님과는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그분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에 제가 출연했고, 또 제가 처음 단독 주연을 맡은 건 그분의 두 번째 연출작인 <반칙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꼭 다시 한번 하자, 이랬는데 <괴물> 촬영 끝날 때쯤 “다음 영화를 함께하자”는 말을 나눴죠. 당시만 해도 <놈놈놈>이 될지 다른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랬는데 <우아한 세계> 제의가 들어왔어요. 어차피 시나리오를 쓰셔야 하니까 감독님께 양해를 구했죠. 그런데 문제는 <밀양>을 하게 된 거예요. 죄송스런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김지운 감독님은 아주 흔쾌하게 기다려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결과적으로 <놈놈놈>도 좀더 준비를 할 수는 있었겠지만요.
하여간 막상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아주 앞이 캄캄했죠, 하하하. 시나리오만 봐도 엄청나고 겁나는데, 김지운 감독님은 현장에서 더 풍성한 그림을 만들고 더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예전부터 재밌고 신나고 액션도 강한 활극영화를 하고 싶다는 말은 하셨어요. 이만희 감독님의 <쇠사슬을 끊어라> 같은 만주 웨스턴을 복원해보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렇게 큰 영화가 될 줄은 몰랐던 거예요, 저도. 감독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영화를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데 선뜻 기획을 못하다가 기왕에 욕심을 내서 해보자 이러셨던 것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를 볼 때는 이중 내가 누군가, 하고 의아해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놈’이 태구이고 그게 내가 맡을 역할이라는 것을 알았다는데, 정작 나는 감을 못 잡았어요. 세놈 다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다들 개성있어 보이고 해서. 사실 어떤 역할이어도 신나게 할 마음이긴 했는데 이상한 놈이 마음에 들었어요. 좋은 놈과 나쁜 놈은 굉장히 멋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상한 놈은 아무래도 이상해야… 흠흠. 물론 나중에 병헌이와 우성이가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큰일났다는 생각을 했죠, 하하. 그렇다고 태구가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요. 태구식의 멋이 있는 거죠. 그게 귀여움이든 잡초스러운 끈질긴 생명력이든. 태구의 특기는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잔머리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인물이죠.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 있는 친구죠. 그리고 다른 두놈들은 총이나 칼 뭐 이런 액션이 많지만 태구는 몸으로 때우는 액션이 많고요. 특히 세번의 폭파신이 있었는데 정말 위험했어요. 특수효과팀 입장에서는 한번의 폭파로 세트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화약을 충분히 심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 앞에는 저 혼자만 있다는 거예요. 터널이 무너지는 장면 때는 카메라까지 저 멀리서 찍고 있어서 외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그 폭발력 때문에 저절로 넘어지기까지 했어요. 영화는 실감이 나겠지, 하하. 어찌 보면 행운인데, 그 행운은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정을 불태웠던 게 행운을 불러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나 한국영화계 차원에서나 대단한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칸영화제에서 영화제용 버전을 볼 때도 뿌듯했어요. <박쥐> 촬영을 하다가 바로 부산에서 출발해 딱 24시간 만에 칸에 도착했는데, 아 피곤했죠. 그런데 스크리닝을 하는 순간 그 피로감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오프닝과 클라이맥스의 액션은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장면이 연출된 것 같고요. 그리고 칸의 관객도 예상보다 더 많이 웃어주시더라고요. 그래도 아쉬웠던 건 그분들이 놓치는 디테일이 있다는 거예요. 우성이와 제가 달밤에 자는 장면이 있어요. 그건 대사로 전달되는 부분인데, 한국 관객은 그 디테일을 다 느끼면서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어제 밤샘 촬영 때문이 아니더라도 피곤하긴 하네요. <괴물> 이후로 <우아한 인생> <밀양> <놈놈놈> <박쥐>까지 연달아 해왔으니까요. 게다가 그 작품들은 모두 다 어떤 면에서건 어려운 영화였어요. 물론 그 피로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놈놈놈>이겠죠, 우하하. 물론, 그런 대단한 감독님의 훌륭한 영화에 동참하게 된 건 개인적으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쥐>를 끝낸 뒤에는 아무래도 당분간 쉬어야겠죠. 물론 굉장히 좋은 영화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