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조금씩의 오해를 품고 시작된다. 당연히 수긍해주리라 생각했던 가벼운 질문이 끊이지 않는 논쟁으로 옮겨가고, 호의를 갖고 건넨 말도 까칠한 날을 달고 돌아온다.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이 같은 주제를 놓고 말을 하니 이야기가 쉽게 만나는 건 어쩌면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게다가 대화의 상대가 배우라면 오해의 골은 더 깊어진다. 매번의 인터뷰를 일정한 틀 속에 넣고 사고하려는 기자와 반쯤 답을 담고 물어오는 질문에 같지 않은 답을 꺼내려 고민하는 배우. 수애와의 인터뷰를 기다리며 이전 인터뷰 기사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단아함, 강인함, 고전미 등. 그녀를 수식하고 있는 말들은 서로가 비슷했고 그걸 보고 꺼내놓았을 질문도 뻔해 보였다. 다시 한번 답을 담아 질문을 던져야 하나. 게다가 <님은 먼곳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까지 가는 여인 순이의 이야기다. 시대극이고, 고전적이며, 강단도 있다. 수애와 순이를 놓고, 단아함과 강단을 놓고 이리저리 엮고 섞어보았다. 여전히 재미는 없다. 질문은 질문과 부딪힐 테고 답은 답대로 튈 거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차,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마친 수애가 섬펑섬펑 걸어왔다.
시나리오에선 순이가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컸어요. 선 굵은 남자 드라마 속에서 혼자 고뇌하고 있달까요. 그런 점이 연기하는 데 부담이 되진 않았나요. _기자
남자영화… 남녀가 뭐가 중요한가요. 어찌됐든 사람 이야기라 성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각자 베트남에 가는 이유가 다 있고 순이에겐 그게 오기, 사랑 뭐 그런 거예요. 선 굵은 드라마 속에서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는 부담? 글쎄요. 질문을 잘 모르겠어요. _수애
인터뷰가 시작되고 15분. 대화는 계속 부딪혔다. 편집본을 보고 순이에 완전히 젖어 있던 수애는 간단한 질문도 신중히 짚고 되새기며 쉽게 넘기지 않았다. “촬영본과 시나리오는 많이 달라요. 시나리온 참조만 하시면 돼요.” 언론 시사 전에 인터뷰를 했던 탓에 그녀는 계속 시나리오엔 “이런 영화”란 전제만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다 같이 숙식하는 느낌이라 타이 촬영이 좋았고, 이준익 감독의 스타일에 맞춰 촬영을 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갔다는 것 정도. 다소 경직된 채 돌아오는 답변에 손동작이 커졌고, 조급한 마음 탓이었던지 테이블 위에 두었던 병뚜껑이 떨어졌다. 하지만 수애는 오히려 의외의 곳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애에 대한 모든 단어들, 잘못 잡힌 생각들을 떨쳐버리자 오히려 그녀의 현재 모습이 보였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경험이 앞으로 저에게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 같아요.” 소매치기 소녀가장을 연기했던 <가족>, 농촌총각 둘을 우즈베키스탄 여자와 엮어주는 <나의 결혼원정기>의 라라, 농활 온 남자 대학생과 사랑에 빠지는70년대 시골 아가씨로 출연한 <그해 여름>. 과거의 어느 공간, 향수를 자극하는 캐릭터는 <님은 먼곳에>도 마찬가지지만 수애는 이번 영화에서 비로소 대본을 벗어나 연기하는 경험을 치렀다. 간단할 거라 생각했던 대목에서 끝없이 NG가 이어졌고, 수애는 위스키 1/3병을 마신 뒤 필름이 끊긴 채로 연기를 이어갔다. 3편의 영화, 6편의 드라마를 하며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감독님이 거짓 연기처럼 보인다고 했어요. 눈이 덜 충혈됐고, 감정도 덜 올라왔다고. 저한테 너 맞을래?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말 진심어리게 맞겠다고 했어요. 같이 자리를 찾아봤죠. 사람 보는 데서 맞을 순 없으니까요. 그런데 공간이 없더라고요. 결국 술을 가져와서 제가 1/3병 마시고 감독님이 1/3병 마셨죠. 제겐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에요. _수애
<님은 먼곳에>에서 수애의 또 다른 과제 하나는 노래였다. 순이가 위문공연단의 가수로 <님은 먼곳에>는 물론 <울릉도 트위스트>까지 부르기 때문에 수애는 두달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는 수애에게 노래연습을 넘어 자신감 회복 프로그램이었다. “음악을 그냥 잘 몰랐기 때문에 시끄럽다고 생각했었요. 노래에도 흥미는 없었고요. 이동할 때도 전 음악을 안 듣거든요.” 얼굴 빨개지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수애는 “주위에서 싫어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서” 노래하는 자리를 피해왔다. 그러다 <님을 먼곳에>의 순이 역할을 받았고 자연스레 노래연습을 하게 됐다. 몰입,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받아 불러본 노래는 그렇게 싫지 않았다. 연기를 처음 해보고 ‘내 거 같다는 생각’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감도 붙어 <김정은의 초콜릿>에 나가선 <원스>의 O.S.T 수록곡인 <If You Want Me>와 <울릉도 트위스트>를 불렀다. 없던 애창곡을 만들었고, 노래할 상황을 피하지 않게 됐다. 더불어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서 벗어났다. “한번은 감독님한테 제가 얼굴이 빨갛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수줍고, 낯가림이 많으며, 내성적인 수애는 ‘닥쳐온 상황은 피하지 않겠다’는 맘으로 커다란 도전도 별탈없이 마치며 달려왔다. 단아함, 고전, 강단. 따라붙는 수식어가 지겹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직 그녀의 필모그래피엔 <님은 먼곳에>까지 단 네편의 영화만 적혀 있다. 쓸모없는 오해와 걱정들. 수애는 <님은 먼곳에>를 마치고 극중 순이처럼 생애 첫 홀로 여행도 떠났다. “런던에서 혼자 2주 여행을 했어요.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에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지금 제 안에서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단아함, 강단, 고전미. 모두 다 필요없는 수식어인지 모른다. 수애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민비를 맡아 다시 한번 고전적인 여인상을 보여줄 테지만 거기엔 <님은 먼곳에>와는 또 다른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 오해와 고민에서 부딪히던 수애와의 대화가 이제야 막 시작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