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을 펴보면 ‘숨은 스틸 찾기’라는 꼭지가 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스틸사진가 한세준은 이 꼭지의 산파 중 한명이다. 사연은 이렇다. 거슬러 올라, 때는 <괴물>이 개봉하기 전이었다. 우연히 제작사에 들러 스틸북을 들춰봤다. 붉은 교각 위에서 혼자 떨고 있는 배두나의 손이 보였다. 그리고 배우를 달래기 위해 감독과 스탭이 한강의 교각 위를 서커스맨처럼 수시로 오가는 사진도 있었다. 아니 저 위험천만한 스틸은 도대체 어떻게 찍은 걸까.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만 나눴던 스틸사진가 한세준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고, 이후 우연한 자리에서 본 그가 찍은 다른 현장 사진들은 호기심을 더 끓게 만들었다. 다섯명의 스틸작가들의 화첩 공개 특집 기사(<씨네21> 551호)에 이어 지난해 봄 개편 때 ‘숨은 스틸 찾기’라는 고정꼭지가 만들어졌던 건 그런 배경에서다. <해피엔드> <섬>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남극일기> <친절한 금자씨> <괴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거룩한 계보> 등에 이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중국 대장정을 끝낸 뒤 <쌍화점> 촬영에 들어간 그를 만나 사진으로 다 못한 현장 스토리를 들었다.
-계속되는 <쌍화점> 촬영 때문에 연락조차 쉽지 않더라. <놈놈놈> 끝내고 나서 휴식을 좀 취하긴 한 건가.
=지금까지 일하면서 거의 쉰 적이 없다. <목요일의 아이> 때는 1주일 뒤에 촬영한다고 했다가 다시 한달 뒤에 촬영한다는 식으로 계속 바뀌는 바람에 대기하다 끝났고. <놈놈놈> 끝내고 나서는 한 2달 정도 시간이 났는데, 그동안에 하고 싶은 거 하자는 생각부터 들더라.
-그래서 2달 동안 뭘 했나.
=학원 다니면서 요리 자격증 땄다. 집에서도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물론 애들 라면이나 끓여주고 밥이나 볶아주는 정도였지만. 일식을 해보고 싶었는데 복잡하다면서 학원에서 한식을 권했다. 목표가 있으면 빨리 배울 것 같아서 자격증을 염두에 뒀는데 운이 좋아서 잘됐다. 그 덕에 <쌍화점>의 음식 만드는 스탭들과 현장에서 만두피 빚으면서 어울린다.
-많이 찍기로 유명하다. <놈놈놈>은 골라낸 디지털 사진만 500기가가 다 된다. 필름으로 찍은 것만도 1만5천장이나 되고.
=액션영화다 보니 아무래도 더 많이 찍게 되더라. 빠른 움직임을 잡기 위해 연사로 찍어야 할 상황도 많았고. 원래 사진 데이터를 그대로 넘겨주는데 이번엔 직접 골라줘야 했다. 디지털 사진은 15만컷 정도 되는데 파일을 열고 닫는 물리적인 시간만 해도 엄청났다.
-<쓰리, 몬스터> 때도 촬영기간이 2주가 채 안 됐는데 찍어낸 분량이 엄청나서 마케터가 기겁했다더라. 필름으로 스틸 찍던 시절에도 그렇게 많이 찍었나.
=<공동경비구역 JSA> 때 현상소에서 자기 일처럼 걱정했다. 그때 대개 1편 작업하면 필름 100롤 정도가 일반적이었는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300롤 정도 됐으니까. 다큐멘터리 작업할 때도 남한테 얻어먹고, 차도 얻어타고, 잠도 얻어자면서도 필름만은 항상 여유있게 들고 다녔다.
-촬영현장에서 스틸을 찍다보면 이런저런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배우가 꺼려하면 물러서야 하고, 카메라 동선에 치이기도 하고. 제한된 위치에서 제한된 앵글로 현장을 바라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한다. 분위기 안 좋으면 나와 있어야지. (웃음)
-분위기 파악을 ‘안’ 한다고 들었다. (웃음) 고집도 세고. 찍어야겠다고 맘먹으면 어떻게 해서든 찍어낸다더라. <놈놈놈>의 경우 사진을 보니까 심지어 최소한의 인원만 탑승이 가능한 슈팅카에까지 올라탔던데.
=내 뜻대로 안 돼서 속상할 때도 많다. 술을 많이 먹기도 하고. 그렇지만 어쩌겠나. 다른 부서 스탭들이 싸움의 대상도 아니고. 다만 끊임없이 요구할 따름이다. 이 장면 찍어선 안 돼, 라는 상황은 순간이다. 다른 상황이 되면 찍겠다고 다시 덤벼야지. 물론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여러 가지 것들을 따져야 할 거다. 연출부라면 또 그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나도 스틸사진가로서의 내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게 내가 현장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고.
-<놈놈놈> 해외 로케이션 현장에 갔던 기자가 그러더라. 당신 뒤에 서니까 ‘그림’이 보이더라고. 마케터들도 카메라 위치 선정이 탁월하다고들 많이 이야기 한다. 꾸준히 고집을 부린 결과인가.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최적의 포인트라고 생각하게 된다. 원래 난 앵글을 잘 잡아, 명당을 잘 찾아, 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게 어느 순간 덫이라고 여겨졌다. 위안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거다. 지금도 여기서만이 아니라 저기 위에서도 찍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편이다.
-원하는 그림을 잡아내려면 그전에 스탭, 배우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구워삶았나. 스틸은 마케팅 부서에 속하지만, 일하는 곳은 현장이라 섞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구워삶는다고 삶아지는 게 아니다. 다만 10년 동안 스틸사진 하면서 내가 먼저 죄송하다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스탭이 나와 부딪혀도 그건 내가 그 자리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또 하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포커스 잡는 친구에게 한컷만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끼어들었다면 한컷만 찍고 나와야 한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감정 상하는 일까지 갔던 적은 없다. 그리고 요즘은 나이가 점점 들어서 과거보다는 부탁하는 게 조금 수월하기도 하다.
-나이가 무기가 된 셈인가.
=나이로 넘버 투, 넘버 스리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다만 곤란한 점도 있다.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마케터들에게 과거의 관례들을 이야기하면서 내 입장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하면 그들로서는 부담일 테고.
-한세준의 사진에는 기교 대신 힘이 있다고 한다. 드라마나 배우의 감정을 잘 읽어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 마케터는 가짜 스틸이 아니라 진짜 스틸 같다고 표현하더라. 영화 속 한 장면을 캡처한 것 같다면서 말이다.
=스타일을 내세우기보다 인물의 감정이나 표정에 집중하려고는 한다. 감독들도 배우가 몇 번째 테이크에서 최고의 감정과 표정을 내놓을지 모른다. 스틸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저 감정이 터져나오겠지 하면서 계속 찍어내는 것이다. 물론 찍은 컷 중 90%는 버리겠지만 그걸 찾아내는 시간이 있어야만 그 순간을 캐치할 수 있다.
-스틸은 사전 리허설 때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리허설 때 잡기란 쉽지 않을 텐데.
=배우들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 강호 형과는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5편을 같이 했다. 편당 촬영 회차가 100회라고 하면 적어도 500일은 얼굴을 맞댄 셈이다. 직계가족 말고 그 정도로 얼굴을 마주한 친척이 있을까 싶다. 그래선지 강호 형은 내가 왜 자기 앞에 서 있는지를 안다. <살인의 추억> 때 점집에서 박두만이 몽타주를 들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점집이 정말 손바닥만했다. 들어갈 자리가 아예 없는 거다. 어떻게든 한컷 찍어야 놀아도 맘이 편할 것 같더라. 그래서 잠깐 빈틈이 난 순간 욕먹을 각오하고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 나를 형이 본 거지. 리허설이 따로 없는데도 그런 나를 보고 촬영할 장면의 액션을 취해주더라. 드르륵 찍고 나왔다. <놈놈놈> 때도 슛 들어가면 내가 못 찍는다는 걸 아니까 레커차를 얻어타고서 이동하는 동안 배우들이 끊임없이 연기를 해줬다. 홍보용 엽서사진은 그때 찍은 것들이다.
-박찬욱 감독도 <올드보이> 때 아예 돌리를 치우고 스틸 촬영을 하게끔 해줬다던데.
=광각을 워낙 많이 쓰다보니 내 입장에선 인물의 측면밖에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카메라를 빼주시더라. 섀도 복싱을 하는 장면이나 내 몸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말하는 장면들을 코앞에서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려 덕분이다. 다만 놓친 장면도 꽤 있다. 한컷 찍으려면 감독 외에도 조감독, 촬영감독, 조명감독, 배우한테 각각 허락을 구해야 했는데, 조명을 끄지 말아주십사 부탁해서 OK를 받으면 이번엔 배우가 사라지기도 하고 해서.
-리허설을 따로 하지 않고 가는 감독들도 있다. <범죄의 재구성> 때 최동훈 감독이 리허설을 하도록 끊임없이 관계자들을 괴롭혔다던데.
=그전에 <와니와 준하>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첫 촬영을 대형 마트에서 했는데, 배우들이 리허설 없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아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제작사 대표에게 말했다. 사진 못 찍겠다고. 불러서 갔는데 바보짓 할 수는 없잖나. 현장에서 내가 무거운 스탠드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제작사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사전 리허설을 해달라고 감독에게 다시 요청해서 계속하게 됐지만.
-제작사에서 의뢰가 오면 시나리오부터 보자고 한다고 들었다. <놈놈놈>도 시나리오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질문부터 했다던데. 그 정도 프로젝트면 바로 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잘난 척하는 거 아닌데.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를 전에 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시나리오 분석하는 능력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마케터를 만날 때 무슨 영화인지 알아야 이야기가 될 것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만나면 과거의 일밖에 나눌 말이 없잖나. 이건 가능하겠다, 이건 어렵겠다는 식으로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하려면 시나리오를 보자고 하는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를 보고 거절한 경우도 있나.
=있긴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꼭 시나리오 때문이라고 하긴 그런데. <살인의 추억> 하면서 지방을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좀 부담이 됐다. 아이가 일어서는 순간을 아빠로서 보고 싶긴 한데, 기어다니던 아이가 영화 1편 끝내고 나니까 쭉쭉 걸어다니더라.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남과 북의 전쟁을 개인의 상황으로만 풀어가는 게 좀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물론 앞의 이유 때문에 갖다붙인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감이 안 왔던 건 <늑대의 유혹>이었다. 10대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어서 그런지 이해를 잘 못했다. 애들이 왜 싸우지, 그러고.
-스틸사진계의 김수현이라고도 불린다. 김수현 작가가 방송작가들의 위상을 높였듯이 말이다.
=말도 안 된다.
-몸값이 비싼 사진가라는 말도 된다.
=이 일을 시작한 다음에 한편 할 때마다 100만원은 적어도 더 받으려고 했다. 물론 500만원 받다가 다음 작품에서 4천만원 받겠다고 하면 미친 놈 소리 듣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여곡절 끝에 스틸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해왔다. 사실 스틸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오래 버티는 사람은 없다. 쉽게 들어왔다가 쉽게 나간다. 그리고 안 좋은 말을 하고 다닌다. 가정이 유지될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된다. 스틸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최근 투자·배급사에서는 스틸, 메이킹 등의 비용에는 어느 선 이상 줄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큰 영화들을 많이 맡게 된 데는 그런 정황도 있을 텐데.
=그렇긴 하다. 하지만 큰 영화라고 해서 실속이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영화 여러 편 하면 더 좋겠지. 150회 찍는 영화가 50회 찍는 영화보다 세배의 개런티를 주는 건 아니니까. 상주하는 게 아니라 할리우드처럼 중요한 장면을 미리 제작, 마케팅팀과 이야기해서 그 장면을 중심으로 찍어낸다면 결과물도 좋고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전에 스틸사진의 인건비 자체가 충분히 비싸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편수가 줄어서 지금은 들어오면 무조건 한다 분위기니까. 영화사들도 사진가의 경력이나 영화의 특성을 고려한다기보다 이 이상은 줄 수 없다고 선을 긋는 식이 많고.
-필름은 본인이 보관한다고 들었다. 계약서 쓸 때 그런 요구조항을 넣는 이유가 뭔가.
=사진가로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하나. 편당 300, 400롤씩 찍었는데 아무것도 수중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천컷 찍어도 개봉 때 막상 쓰이는 건 50컷도 안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결과물이 모두 제작사에 넘어간다면 허탈하지 않겠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 참여하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 영화를 보고서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했어야 하는것 아닌가라고. (웃음) 제작사들이 필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영화사는 담당자가 바뀌거나 영화사가 아예 없어지는 경우도 있고. 이사갈 때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사무실 옮긴다고 하면 서둘러 가서 필름을 가져온 적도 있다.
-특이하게 수학을 전공했다.
=원래는 전산통계를 하고 싶었는데 2지망이었던 수학과를 가게 됐다. 애초부터 흥미를 전혀 못 느꼈다. 카메라를 처음 갖게 된 건 누나가 수동카메라를 물려주면서부터다. 한 1년 정도는 썩혔다. 그러다 대학 때 친구들과 놀러다니면서 단체 사진을 좀 찍어줬는데, 사진이 신기하게도 잘 나오는 거다. 이후에 사회사진하는 영상매체연구소라고, 광주YWCA에 있는 문화분과 안의 연구소에서 사진교육을 받게 됐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함께 5월 관련 전시회도 하고, 전교조 해직교사들 전시회도 하고 그랬다. 족발집 하시던 선생님을 비롯해서 우리가 전시회를 한 이듬해 모두 복직됐는데, 아 우리가 의미있는 일을 했구나 뿌듯해하기도 했고.
-사진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맘먹었던 특별한 계기가 있나.
=전시회 열 때만 하더라도 사진은 취미였고, 그냥 졸업해서 적당히 취직하자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우연히 중앙대 사진과를 다니는 형을 만났다. 광주항쟁 부상자를 찾아서 찍는 형이었는데, 그 형에게 관련 단체 사무국장을 소개해주고 대신 사진에 관한 이런저런 갈증을 풀었던 것 같다. 이왕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상명대 사진학과 대학원에 가게 됐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행운은 오형근, 구본창 두 선생님을 만난 거다. 두분 다 영화 포스터 작업을 하시던 때였고.
-구본창 선생의 도움으로 <축제> 현장에 처음 발을 디뎠다.
=구본창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사진 편집을 가르치셨다. 수강 신청한 사람들 중에 나만 저널리즘 파트였고, 다들 광고와 순수 파트 학생들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구본창이라는 사진가가 왜 유명한가 그걸 좀 확인하고 싶어서 들었던 건데 그게 인연이 됐다. 전남 장흥에서 <축제> 포스터를 찍는데 우리집이 광주라는 걸 알고서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때 조수로 따라가서 영화현장을 처음 봤고, 이후에 중요한 촬영 때 선생님 대신 가서 찍었다. 원로 스틸기사가 따로 계셨는데, 인사를 해도 안 받아주셨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때 벽제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고 나서 광주에 내려가야 하는 나를 반포터미널까지 손수 태워주시곤 했다. <해피엔드>는 그 뒤 오형근 선생님의 추천으로 하게 된 것이고.
-다큐멘터리 사진과 스틸사진의 차이가 뭔가.
=90년대 중반까지 농촌 돌아다니면서 다큐사진을 찍었다. 유진 스미스나 매그넘이 찍은 처절한 사진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영화현장이야 삭막한 현실의 풍경보다는 행복하다. 하지만 분노한 농민이 트랙터로 사람을 밀어붙이는 것이나 정우성이 낙마하는 순간이나 똑같다고 생각한다. 성향상 두 장면 모두 찍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소박한 사람들의 땀냄새 나는 현장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거리사진들과 스틸사진들은 연장선상에 있다.
-스틸사진을 하고 싶다며 도움말을 청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남다른 감수성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어내야 한다는 의지라고 말하곤 한다. 끊임없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제 시점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남들이 찍지 못하는 걸 찍어내려면 상황에 밀려 쉽게 아웃돼서는 안 된다고. 사진은 그 자체로 단점이 많다. 동영상은 분위기를 보여주면 넘어갈 수 있지만, 사진은 초점, 노출, 구도, 감정,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단점이 두드러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대상을 찍어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제각기 다르고, 결과물이 다 다른 것처럼 개성적인 매체다. 그런 장단점 때문에 지금까지 긴장하고 찍어내는 것 같다.
-<놈놈놈>의 경우 제작사에서 책을 펴낸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나온 영화 사진집들은 주로 제작노트에 가까웠다. <놈놈놈>도 직접 내가 사진을 골라주는 식은 아닐 거다. 나중에 내가 사진집을 낸다면 상황을 설명하는 것 말고 사진 그 자체로 현장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한다. <놈놈놈>의 경우, 밥차 아주머니들을 따라서 쉬는 날 장보러 가서 찍었던 사진이라든가 (송)강호 형이 아파서 부항 뜨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비가 오는 날 스탭들이 술 마시고 있는 풍경도 궁금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