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영화]
전쟁이 할퀴고 간 인간의 내면 <바시르와 왈츠를>
2008-07-18
글 : 최하나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2007년/85분/아리 폴만/개막작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단박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어놓을 듯이 광적으로 질주하는 26마리의 굶주린 개 떼. 20년째 젊은 시절 전장에서 죽인 바로 그 개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는 사나이. 아리는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의 전화로 밤늦게 술집을 찾는다. 그러나 이내 이어지는 친구의 물음. “너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거야?” 순간 아리는 친구와 함께 참전했던 레바논전에 대한 기억이 놀랍게도 송두리째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 사실을 깨닫는다. 대체 무엇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시르와 왈츠를>은 1996년 데뷔작인 <세인트 클라라>(Clara Hakedosha)로 카를로비바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았던 이스라엘의 감독 아리 폴만의 작품으로, 프랑스와 독일이 참여한 3개국 합작으로 제작됐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작이자 최대의 화제작 중 하나로 마지막 순간까지 황금종려상의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아리 폴만 감독이 1982년 레바논전쟁 당시 자신과 같은 부대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며 증발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좇는다. 폴만이 추적하는 사건의 핵심은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의 친이스라엘 민병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민간인 수천 명을 잔혹하게 도살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알려진 참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는 전쟁이 할퀴고 간 인간의 내면 깊숙이 렌즈를 들이댄다. 감독은 본래 재정적인 여건, 카메라 앞에 서서 이야기하길 꺼리는 증인들 때문에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을 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적인 질료를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은 폴만의 화폭은 결과적으로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굴절된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 환상을 실사의 영역이 결코 가 닿지 못하는 표현방식으로, 숨 막힐 정도로 아찔하게 펼쳐놓았다. 전장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토악질에 시달리던 병사는 어느새 커다란 여인의 나체에 매달려 바다를 유영하는 환각에 사로잡히고, 공포에 질려 총을 난사하던 젊은 병사는 죽음의 스텝을 밟아가며 미친 왈츠를 춘다. 책장에서 뜯어낸 역사가 아닌 요동하는 인간의 기억으로 쌓아 올린 역사. 관객이 혼란스러운 증언의 조각들을 붙들어 하나의 정돈된 그림을 완성해갈 즈음, <바시르와 왈츠를>은 상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결말을 내놓는다. 이는 가장 참혹한 장면에서조차 부정할 수 없는 우아함을 품은 폴만의 애니메이션이 환상의 휘장을 찢어 던지는 순간이자, 억압됐던 정서적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순간이다. 두려움과 광기, 분노와 절망이 거대한 장송곡처럼 울려 퍼지는 <바시르와 왈츠를>은 전쟁이 파괴한 인간성에 관한 매우 대담한 실험이자 더없이 강력한 증언이다. 아니 어쩌면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이런 탄식이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렇게 간단하게 소묘하듯 써놓은 말들로 <바시르와 왈츠를>의 엄청난 힘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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