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저항을 통해 성장을 꿈꾼다
2008-07-20
글 : 씨네21 취재팀
‘판타스틱 감독백서 : 그렉 애러키 특별전’의 감독 그렉 애러키의 세계

‘더 이상의 그렉 애러키는 없다’ 애러키가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베로니카의 갈등을 그린 로맨틱 드라마 <키싱 투나잇>(1999)을 발표했을 때 평단은 동요했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그렉 애러키의 영화입니다’ 애써 부연 설명이라도 해줘야 할 판이었다. 뻔뻔하게도 그는,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분노, 욕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신을 규정짓던 모든 요소를 일거에 버리고 나타났다. 앞뒤 잴 것 없이 이건 <리빙 엔드>의 충격적인 연출로, 선댄스의 기대주로 촉망 받으며 퀴어 시네마의 선봉장으로 지지 받아온 그를 향한 기대에 침을 뱉는 배신행위자, 자신의 작품의 모든 제목을 ‘엿같은(Fuck)’이라고 바꿔도 별 무리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변절과 같은 행위다.

애러키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에게 이 같은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만큼만 그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일본계 미국인. 가진 거 ‘쥐뿔도’없던 그는 출현과 동시에 미국독립영화계와 퀴어시네마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가 ‘몰래 촬영’도 불사하며 변변한 스태프도 없이 5천불도 안 되는 제작비로 흑백영화 <밤거리의 난폭한 사람들>과 <긴 주말>을 만들었을 때,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장 존 조스트 감독은 이 어린 싹에게 맘껏 쓸 수 있는 후지 칼라필름과 싱크사운드 장비 일체를 대여해주었다. 이때부터 애러키는 흑백의 시대를 벗어나 <리빙 엔드>의 선연한 칼라, 빛의 세계로 진입했다.

색깔을 입은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게이의 성 정체학 속에 애러키는 ‘미친 공화당놈들’과 ‘빌어먹을 세상’을 대입 시키며 90년대 초반 하위문화인 게이 컬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일등 공신 역할을 자처해 냈다. <리빙 엔드> 이후 할리우드 주류 틴에이저 무비를 비웃기라도 하듯 쏟아낸 <완전히 엿먹은> <둠 제너레이션> <노웨어>로 이어지는 3부작은 ‘진짜’ 십대들의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주류 스튜디오 시스템에 편입한 매끈한 영화를 만드는 대신, 여전히 16미리로 촬영하여 35미리로 블로우업한 거친 입자의 화면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굳혀나갔다. ‘게이 시네마의 고다르’, ‘아트-퀴어 시네마의 대표주자’. 그 어떤 파격적인 수식어도 끝장을 보고 마는 그의 스타일을 지칭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랬던 그가’ 로맨틱 멜로 <키싱 더 투나잇>을 통해 온순하고 착해졌으며, 감성적인 성장 영화 <미스테리어스 스킨>을 통해 주류 스튜디오 시스템에 완벽한 안착을 하고, 약에 취해있지만 욕설과 냉소는 모두 발본색원한 <스마일리 페이스>라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했을 때 그에 대한 오해와 갈등의 골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완성도로 보자면 흠잡을 데 없는 일련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팬들은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아쉬움, 자포자기의 감정을 경험해야했다. 그의 작품을 수식하는 언어는 ‘엿같은’이 아니라, ‘엿같은 빠져버린’으로 바뀌었다.

다수를 향한 애러키의 배신은 물론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예전의 거친 혼돈 속으로 돌아 갈리는 없다. 그러니 한 편 두 편 그가 새로운 시도 속에 심어놓은 진심을 이제는 보아줄 때가 왔다. 돌이켜보면 애러키는 욕설과 섹스가 난무하는 그의 영화, 청춘을 길 끝까지 몰고 가서 박살을 내는 순간에도 애정 어린 시선과 감정적인 동요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 표출이 아니라, 그 거침없고 냉소적인 표면의 끝에 있는 ‘그래도 결코 아름다움은 잃지 않겠다’는 고고한 시선들이었다. 그의 ‘청춘들’이 이제는 조금은 착해지고 얌전해졌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것은 없다. 혼란스럽던 청춘은 언젠가 성장하게 마련이다. 성장통을 깬 애러키도 이제 겉으로 마구 드러내며 피를 철철 흘리며 자신을 깨버리지 않아도 아픈 속내를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어른이 됐을 뿐이다. 물론, 여전히 그 아픔은 잊지 않은 어른 말이다.

스마일리 페이스 Smiley Face
그렉 애러키 | 미국 | 2007 | 85분

약에 절은 한 소녀의 하루를 농담과 익살로 빚어낸 소동극. 마리화나 중독인 제인은 룸메이트 스티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침나절부터 마리화나 컵케이크를 모두 먹어 치운다. 그때부터는 제인의 하루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배우 오디션을 망쳐버리고,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의 희귀본을 훔쳐 달아나다 도둑으로 몰리며 마약 브로커에게 갚아야 할 돈을 갚지도 못한다. 약에 취한 제인의 모든 것은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우스꽝스럽게 진행된다.

그렉 애러키의 가장 최근작. <키싱 투나잇>에서부터 보여준 자신의 느슨함을 굳히려는 듯, 그는 이 작품에서 편안하게 박장대소할 수 있는 웃음을 주재료로 하고 있다. 물론 정신없는 제인을 한껏 조롱하는 동안, 애러키 본인이 할 말은 야금야금 심어놓았다. 특히 자신의 게으름을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옹호의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새로 구입한 좋은 침대를 뺏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인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중 누구와도 다르지 않음을 일깨우는 매서운 일침이다. 영화를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무서운 영화>의 히로인 안나 파리스다. 뚱한 표정으로 환상과 실재의 경계를 오가는 제인을 연기한 안나 파리스는 무서운 연기 파워를 보여준다.

완전히 엿먹은 Totally Fucked Up
그렉 애러키 | 미국 | 1993 | 78 분

LA에 사는 십대 게이, 레즈비언 청소년들은 말한다. 그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다고.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기본. 하루하루는 목적도 없이 따분하게 흘러가며, 연인마저 자신을 속이기 일쑤다. 여기에 성적 정체성 때문에 호모포비아들의 조롱도 견뎌내야 한다. 십대 동성애자들의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신문의 기사처럼 이 ‘엿같은’ 세상에서 아이들이 정말 할 수 있는 건 자살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형식의 파괴를 통해 <리빙 엔드>로부터 발전한 애러키의 성향을 뚜렷이 보여준 작품. 최근 그의 작품을 규정짓는 표식이 ‘퍽’(fuck)의 사라짐이라면, 세상을 향한 온갖 분노를 날리는 ‘퍽’의 사용이 최고조에 이른 <완전히 엿먹은>은 애러키의 이전 영화를 설명하는 집약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내러티브는 없다. 마치 고다르의 <남성 여성>을 연상시키듯 영화는 홈 비디오 다큐멘터리로 교차 편집된 15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거친 화면 속, 아이들은 자신의 고독과 소외, 혼란, 불만을 토해낸다. 카메라는 앤디를 중심으로 하는 십대 동성애 소년, 소녀들의 잡담처럼 별스럽지 않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런 영화의 비극적 결말 속, 영화는 십대 성적소수자들의 생활에 대한 가장 솔직한 보고서로 자리한다.

리빙엔드 : 리마스터 Living End : Remixed and Remastered
그렉 애러키 | 미국 | 1992 | 85분

한 눈에 서로를 알아 본 동성커플 루크와 존. 어느 날 존이 HIV 양성반응을 나타내면서 둘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성적 소수자로 이미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에게 AIDS는 또 하나의 낙인을 더한 셈. 모든 것을 버리고자 LA도심을 출발,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내달리는 게이 연인에게 ‘미친 공화당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빌어먹을 엿 같은’ 곳일 뿐이다.

퀴어 시네마의 선봉장 그렉 애러키의 대표작. 로드 무비의 형식을 빌어 90년대 하위문화인 게이 컬쳐를 대변, 충격을 준 작품이다. 마치 존 케루악의 소설을 화면에 옮긴 듯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는 매 장면, 세상을 향한 불만을 가득 담은 'Fuck'과 일탈을 꿈꾸는 동성 간의 섹스로 일관된다. 영화는 절망에 휩싸인 성적 소수자들의 내면을 대변하며 90년대 퀴어영화의 새로운 틀을 창조해냈다. 영화제 상영은 16mm로 촬영하여 35mm로 블로우업 한 오리지널 버전을 HD로 전환, 화면 보정, 사운드트랙 리믹싱 작업을 거친 리마스터 버전.

미스테리어스 스킨 Mysterious Skin
그렉 애러키 | 미국 | 2004 | 107 분

어릴 적 야구단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두 소년 브라이언과 닐. 충격 때문에 그 ‘다섯 시간’을 까맣게 잊은 브라이언은 그 사건을 UFO와 에일리언에 대한 이상한 상상으로 치환한다. 이와 달리, 늘 바쁜 엄마로부터 소외된 닐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코치의 행위를 사랑이라 믿고, 지금은 동네 아저씨들을 상대로 남창으로 하릴없이 지낸다. 다른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코치의 학대는 지금도 소년들에게 고통을 주는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스콧 하임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 <완전히 엿먹은> <둠 제너레이션> <노웨어>로 이어지는 거칠고 반항적인 십대 이미지를 걷어낸 한결 정제된 형식과 내러티브를 사용, 애러키 영화의 새로운 도약을 보여준 작품. 스튜디오 시스템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보여주는 깔끔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성추행, 아동학대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영화는 단순히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 사건이 그들의 성장에 미친 심각한 영향을 호들갑떨지 않고 조용하게 지켜봄으로써 아라키는 소년들의 성장통을 감동적으로 담아내며, 자신의 작품의 성장까지 이루어 낸다. 남창 닐의 모습을 엣지 있게 그려낸 조셉 고든 레빗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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