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4일자 <스포츠 칸>은 어느 탈북자의 사연을 보도했다. 지난 2000년, 한국에 정착한 유상준씨의 이야기다. 그는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이 사전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도용했다고 주장했고 이미 자신의 사연으로 <닥터봉> <자귀모> 등을 연출했던 이광훈 감독과 정식계약을 체결해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탈북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실제 탈북자를 배려하지 않아 속상할 뿐”이라며 법률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20일 뒤인 지난 7월14일, 이광훈 감독에 의해 <크로싱>에 대한 영화상영금지 등 가처분 신청이 제기됐다. 심심할 때면 찾아오는 충무로의 유사소재 공방이 또다시 불거진 것이다.
공방의 관건이 된 <크로싱>의 에피소드는 주인공 만철의 아들인 명철이 몽골 국경 인접지대의 사막을 건너다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이다. <크로싱>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광훈 감독쪽은 이 이야기가 유상준씨의 고유한 사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상준씨는 지난 1998년 큰아들 철민군과 함께 탈북했는 데, 단속을 피하던 과정에서 1999년 5월 한 조선족 가족에게 아들을 맡겼고 2000년에 혼자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아들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결국 몽골 국경에서 아들을 잃게 됐고 이 사연은 국내 언론과 <CNN> 등 해외 매체에 소개됐다. 이후 그는 후원금을 지급받는다는 조건으로 이광훈 감독과 정식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인간의 조건>을 준비했다. 이광훈 감독의 법정대리인인 문정구 변호사는 “<크로싱>이 명백하게 유상준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였고 이광훈 감독이 이미 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완성하였음에도 이광훈 감독에게 어떤 협의도 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상준씨에게조차 동의를 구하지 않아 이광훈 감독이 갖는 영화 <인간의 조건> 시나리오에 관한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전도용 여부와 저작권 인정을 둘러싼 양쪽의 주장
<크로싱>을 연출한 김태균 감독은 이미 <스포츠 칸>과의 인터뷰에서 유상준씨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기에 더해 지난 7월15일,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입장표명 자료를 낸 <크로싱>의 제작사 캠프B는 “<크로싱>은 유상준씨 특정 한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2004년부터 수많은 탈북자들의 인터뷰와 사연, 다큐멘터리 등을 바탕으로 기획, 제작된 작품”이라며 “이유진 작가와 김태균 감독은 100여명의 탈북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났으며 유상준씨와도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끝내 만나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광훈 감독이 <인간의 조건>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으며 <스포츠 칸>의 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정구 변호사는 “2년 동안 여러 투자사들에서 투자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영화계의 특성상 캠프B쪽이 <인간의 조건>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투자사들이 시나리오를 회람하는 과정에서 유출됐을 거라고 본다. 그렇게 유출된 시나리오를 캠프B쪽이 도용했다는 정황상 증거도 있지만 그건 재판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게다가 <크로싱>이 개봉하기 한달 전 연출자인 김태균 감독과 유상준씨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도 제기됐다. 이광훈 감독쪽의 의견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태균 감독은 유상준씨에게 ‘영화의 시나리오를 눈물로 기도하면서 썼으니 긍정적으로 봐달라’고 말했으며 유상준씨의 사연을 에피소드로 담았다는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문정구 변호사는 “공식적으로 동의를 요청하지 않으면서 마치 동의를 구한 것 같은 외관을 꾸미려 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쟁점은 이광훈 감독이 쓴 <인간의 조건> 시나리오에 대한 저작권의 인정여부다. 캠프B쪽은 법무법인 한영의 이경천 변호사의 말을 빌려 “시나리오에 대한 저작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가 창작물로서 공표되거나 발표되어야 하는데, 이광훈 감독이 습작하고 있던 단계에 불과한 내용에 저작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저작권의 법리로 판단하더라도 명백히 법리를 오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정구 변호사는 “저작권은 저작물이 완성되면 인정되는 것”이라며 “투자사에 회람을 할 때, 초고가 아닌 완성본을 가지고 투자요청을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미 이광훈 감독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유상준씨의 사연에 저작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도 빼놓을 수 없는 쟁점이다. 문정구 변호사는 “이미 유상준씨와 이광훈 감독간에 정식계약이 있었던 만큼 유상준씨의 사연을 영화화할 권리는 이광훈 감독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피할 수 없을 듯
하지만 이러한 법리적 해석에 대해 허점이 많다는 주장도 있다. <하얀방> <범죄의 재구성> 등 상영중지 가처분 사건 등을 맡았고, 저작권 관련 소송을 전문적으로 담당해온 변호사인 영화사 봄의 조광희 대표는 “양쪽 모두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은 저작물이 공표되어야만 인정되는 게 아니라, 완성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고 특정 개인의 삶을 묘사했다고 해도 개인의 라이프 스토리에는 저작권이 없기 때문에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광훈 감독과 유상준씨가 계약을 체결한 부분에 대해 조광희 대표는 “그건 두 개인의 계약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저작권을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계약은 보통 극화과정에서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문제요소를 미리 합의하고자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사건의 경우에는 <크로싱>이 유상준씨의 명예를 훼손했거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것이 입증되거나, 이광훈 감독이 유상준씨의 고유한 이야기에 가미한 창작성을 <크로싱>이 침해했다는 것이 확인되어야만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양쪽의 문제제기에 이런 부분은 빠져 있다.”
조광희 대표의 말대로라면, 이 사건의 재판은 ‘이광훈 감독이 가미한 창작성을 <크로싱>이 침해했는가’의 여부와 ‘<크로싱>의 묘사에 유상준씨의 명예를 훼손한 부분이 있는지’를 밝히는 과정으로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될 경우, 캠프B쪽에 물을 수 있는 책임은 도의적인 문제뿐이다. 이미 김태균 감독이 유상준씨의 사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힌 만큼 도의적인 책임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왜 더 적극적으로 유상준씨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는가. 김태균 감독이 유상준씨를 만난 자리에서 왜 동의를 구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유상준씨와 이광훈 감독쪽이 접촉을 시도했을 때 왜 적극적으로 나서서 합의를 하지 않았는가란 문제다. 문정구 변호사는 “애초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이광훈 감독쪽이 소송을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상영 뒤에라도 양해를 구하고 협의했다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까지는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접촉과정에서 캠프B쪽이 발뺌했고, 시간을 끌면서 사실상 유야무야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캠프B쪽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크로싱>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재판은 오는 7월25일에 열리며 약 2주 뒤인 8월 초에는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김태균 감독이 동의만 구했다면 소송까지 오지 않았다”
가처분 신청 제기한 문정구 변호사(법률사무소 재유) 인터뷰
-이광훈 감독과 유상준씨는 언제 계약을 체결한 건가.
=2004년 10월경에 계약을 했다. 수익이 날 경우 유상준씨에게 배분하고, 인권운동자금으로 지원한다는 조건이었다. 유상준씨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광훈 감독의 뜻을 받아들여 계약을 했었다.-<크로싱>의 준비단계나 촬영과정에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이광훈 감독은 영화가 개봉을 앞두었을 때야 <크로싱>이 유상준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는 걸 알았다. <인간의 조건>을 알고 있던 영화인들이 <크로싱>의 사전시사를 보고는 시나리오를 팔았냐고 물어왔다고 하더라.-김태균 감독과 유상준씨는 어떻게 만난 것인가.
=김태균 감독이 만남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유상준씨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 동석을 한 것이다. 유상준씨도 그 자리에 김태균 감독이 나오는 걸 모르고 나갔다. 그때 김태균 감독이 유상준씨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동의를 구했다면 이런 소송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이광훈 감독은 <인간의 조건> 영화화를 다시 추진할 계획인가.
=<크로싱>이 일정기간 상영된 이상, 동일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이광훈 감독으로서는 3년 전부터 한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린 게 아닌가. 탈북에 관한 다른 소재를 찾기 전에는 제작이 힘들 거라 판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상준씨의 입장에서도 많은 충격을 받은 상태다.-재판에서는 어떤 쟁점이 핵심인가.
=양쪽이 모두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한다. 두 작품 사이에서 유사성을 심리하고, 제작과정 중에 <인간의 조건>을 참조했는지, 안 했는지를 밝혀내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