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현명한 승화의 방식
2008-07-24
글 : 이창우 (영화평론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옌볜의 정서를 묵시적으로 표현한 <궤도>

<궤도>는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옌볜 최초의 독립영화’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옌볜은 양팔이 없거나 말을 못하는 장애인을 대리자로 내세워 자기 자신을 영화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어떤 지역과 시대상의 문화 정치적 코드로 이해하는 이런 식의 추론이 타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영화가 만들어진 경위라든가 감독의 의도 따위를 조사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문화 정치 코드가 실어나르는 것은 작가의 창의성이 아니라 해당 시공간의 뿌리 깊은 사회적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옌볜 방송국 촬영감독 출신인 김광호는 실제 장애인인 최금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8부작을 제작했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뭔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보면 그 소재로부터 참신한 상상력이 탄생할 수 있다는 미술가들의 격언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소설 <백치 아다다>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장철 감독의 외팔이 시리즈 같은 ‘훼손된 신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어떻게 그 시대 그 지역의 정서를 묵시적으로 표현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여기서는 세 가지만 지적하자. 먼저 ‘묵시’의 사전적 의미가 그렇듯이 어두운 사회현실을 장애인 주인공을 내세워 묘사할 때에는 소재와 주제를 제약하는 영화 외부의 정치적 금지들이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속한 소수민족(조선족)에 드리워진 권력장을 간접적으로 내비췄다. “앞으로 하고 싶은 영화요? 난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이 세상과 충돌하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그런 과정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 것까지 중국 정부가 간섭하고 그러진 않습니다.” 두 번째로, 무표정한 시선의 팔 없고 말 없는 주인공들에게 한국의 관객은 동화되기보다는 다소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로부터 심오한 해석을 이끌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한 옌볜 지역 동포들의 표정과 마음의 무게가 우리와 다르리라는 점을 먼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팔 없는 매춘부 영자가 오늘날에는 한없이 낯설게 보이겠지만, 베트남에서 돌아온 부상병과 산재에 시달리던 ‘여공’들로 넘쳐나던 1975년 영화 개봉 당시에는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연민이 충분히 이루어졌던 것과도 비슷한 원리이다. 세 번째로 몸의 물리적 장애는 항상 정신적 비약을 위한 ‘승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신적 승화를 위해 75년의 영자가 밀로 섬의 비너스상을 자기 몸과 오버랩시키는 방법을 택했다면 <궤도>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승화의 방식은 작가주의 영화답게 훨씬 복잡하다. 사스, 장애인, 시선, 공간 등 이 영화에는 풀어볼 만한 몇 가지 코드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서로 파동을 주고 받는 외부의 시선과 주인공의 시선

상황과 인물에 대한 설정을 먼저 짚고 넘어가자. 배경은 전염병 사스가 창궐하는 중국이며 남자주인공 철수는 다소 이상적인 푸른 초원 위의 튼실한 초가집에서 살고 있다. ‘전자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바이러스에 오염된 세상’은 사실 도처에 깔린 미시 권력에 대한 도식적이기까지 한 메타포이리라. 집주인의 겁탈에 맞서다가 수배자 신세가 된 여주인공을 국가는 처음엔 보균자라고 뒤집어 씌웠다. 말하자면 진짜 세균들은 스스로 백신인 척하며 깨끗한 것을 오히려 세균으로 위조한다는 배경 설정이다. 이에 분노하여 철수는 TV를 발로 차서 넘어뜨린다.

배경설명과 더불어 첫신은 철수의 몸에 관하여 기술한다. 사실 발가락으로 담배를 말고 성냥까지 그어 피우는 그의 동작은 현란할 정도이다. 오직 발로 식사하고 나물을 채취하며 머리까지 감는 일종의 ‘신기한’ 볼거리는 작품 전반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왜 영화는 그의 몸동작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걸까? 이는 일종의 감각마비 효과를 통해서 관객이 철수로부터 오히려 ‘장애없음’을 발견하게 하려는 효과가 아닐까? 러닝타임 중반에 이르러 그의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발놀림은 지극히 일상적 순간, 가령 외출할 때 잘린 어깨에 가방을 메는 장면들에 적용된다. 관객은 이런 ‘시각적 훈련’을 거쳐 결국에는 철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극중의 사람들을 다시 이상하게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다. 한명의 자연인이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장애인으로 옷 입혀지는 절차를 고스란히 목격함으로써 관객은 어느새 ‘벌거벗은 임금님’을 비웃는 어린이의 위치로 이동한다.

이 영화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두 유형의 이미지들, 철수가 ‘보이는 장면’과 ‘보는 장면’을 아주 센 강도로 구별하고 각 유형에 동심원처럼 점차 확산되는 리듬감있는 이미지들을 차근차근 추가한다는 점이다.

‘그를 보는 시선’은 대략 네 단계를 거쳐 확대되면서 근본적 사유의 깊이에 접근한다. 먼저 그를 호기심과 기피대상으로 여기는 주민들의 시선이 있다. 표피적인 일상에 만연한 시선이다. 다음으로 두 ‘장애인’을 (자동차 주행의) 성가신 ‘장애물’로 여기는 경멸의 시선이 있다. 세 번째로 그가 집을 나설 때마다 에덴동산 시절의 원죄를 추궁하듯이 아주 먼 거리에서 그를 노려보고 이내 사라지는 소년의 시선이 있다. 철수의 초가집과 인근의 초원 전체는 소년이라는 ‘순수한 법’의 판결에 따라 원형감옥의 ‘포스’에 갇혀버린다. 마지막으로 점점 더 가까운 거리로 다가오며 미소짓는 향숙이의 시선은 철수가 어릴 적 자신이 죽였다고 믿는 어머니의 시선과 오버랩된다. 이 때문에 향숙이가 철수를 사랑할수록 철수는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내러티브가 성립한다. 향숙이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던 철수의 노력이 끝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이제 철수가 누릴 최대 향락은 그를 자기 파괴와 죽음으로 내몬다. 이렇게 외부적 시선은 호기심, 기피, 경멸, 외적 추궁, 내적 파괴/사랑으로 각각의 매듭을 거치면서 파멸을 향해 그를 옥죄어온다.

그를 바라보는 각 단계의 시선 맞은편에는 그의 내면으로부터 눈을 통해 쏘아져 나오는, ‘그가 보는 시선’이 있다. 지나치는 주민들의 시선에 대하여 철수는 모든 것을 무심하게 되반사하는 시선을 보낸다. 영속적으로 그 자리에 정지해 있을 것 같은 그의 무표정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표정을 보며 우리가 동물의 감정을 헤아리고자 할 때마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느끼는 좌절감 섞인 모호한 감정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매체의 특성상 의미가 텅 비어 있는 그의 시선에 꼼짝없이 수초간 붙들어 매어 있어야만 하는 관객은 조바심과 불안함 속에서 전율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 단계에서 그의 시선은 철길 궤도를 따라 점점 더 멀어져 급기야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조망한다. 상실의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목욕하는 철수의 벌거벗은 몸에 향숙이 다가왔을 때 그의 시선은 공포에 가깝다. 에너지가 집약된 그러한 시선은 급기야 자신을 노려보았던 소년이 서 있던 지점(원죄의 지점) 안으로 철수를 도망가게 한다. 그가 프레임 중앙을 지키면서 카메라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은 거리감보다는 중앙의 작은 점으로 몸 자체가 수축되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옌볜의 장애인은 추궁하는 외적 시선에 못 이겨 자기가 나온 자궁 안으로 퇴행하고, 모든 원죄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다.

외부로부터의 시선과 주인공 내부로부터의 시선은 핑퐁 게임처럼 파동을 주고받는 잠재태와 현실태의 균형잡힌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하학에 비유하자면 꼭짓점이 접한 서로 마주보는 쌍둥이 부채꼴의 형상이다.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장소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

철수는 일련의 미학적 메타포를 통해 형이상학적 자살을 꿈꿀 뿐 아니라 끝내는 물리적 자살을 감행한다. <궤도>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옌볜 동포들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살의 코드를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영화의 요점이자 ‘위험요인’은 철수가 자살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는데 영화의 문제틀이 철수가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과 그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철수 내면의 과거 상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상처라는 것조차 누군가(가령 아버지)로부터 당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령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주는 상처이다. 그리하여 성인이 되어 만나는 모든 ‘난관과 사랑’이 자기가 죽인 어머니의 기억으로 고통스럽게 환원될 때 해결법은 ‘그리운 어머니가 계신 하늘나라’ 혹은 옌볜 조선족의 입장으로 확장하면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온 모국’에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궤도>가 옌볜 지역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이 영화의 주제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여 준다. 철수가 거주하는 아름다운 초원의 아담한 초가집은 우리가 옌볜의 근교 지역에 관하여 이국적 이미지로 상상하는 목가적 풍경을 재현하는 면이 있다. 그곳은 비록 사스로 오염된 중국 대륙에 포위되었고 때때로 수배범을 쫓아 경찰이 들락거리긴 하지만 버려진 가난한 땅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현실의 작은 이상향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철수는 벙어리 향숙뿐 아니라 병든 노인까지 데려다가 간호를 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병적인 철수의 정신적 세계와 건강한 철수의 신체적 세계를 날카롭게 대비시키면서 옌볜 민중이 스스로를 무능하고 열등하다고 믿도록 정당화하는 고질적 정서구조를 문제화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태반이, 긴장도가 점점 커지는 내외 시선의 변증법 즉 철수를 괴롭히는 강박 관념을 묘사하는 데 할애되어 있음 또한 사실이지만 그의 파국적인 자멸을 충격적으로 묘사하는 라스트신은 옌볜 민중이 얽매어 있는 신화를 극단적으로 구현하고 무(無)화시킴으로써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발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과거 사건은 논리적으로 볼 때 철수의 현재 삶을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궤도>는 현명하게도 회상장면을 최소한의 컷으로 제한함으로써 우리가 ‘받들어 모시는’ 역사적 과거란 객관적 사실이기보다는 현재의 주관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면제받기 위해 구성한 신화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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