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추억을 더듬어보자면, 이소룡의 <사망유희>(1978)에서 그가 세상을 뜨고 난 뒤 나머지 역할을 대역한 배우(당룡), 성룡의 <사형도수>(1979)와 <취권>(1979) 그리고 <사제출마>(1980)와 <용소야>(1982)에서 그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악당 두목(전자는 황정리, 후자는 황인식), 또 <중원호객>(원제: 삼덕화상과 용미육, 1977) 등 홍금보가 연출한 일련의 골든하베스트 무술영화들에서 가공할 발차기를 선보인 액션 배우(왕호)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뒤 큰 충격에 빠진 적 있다. 그들은 분명 기존의 홍콩 액션 배우들보다 더 빠르고 날렵했으며 체격도 더 당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출연한 영화들은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물론 한국에서도 제법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 흔한 B급영화 대접도 받지 못한 영화들이 태반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홍콩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못한 용병처럼 느껴졌다. 그들 중 당룡과 왕호가 부천을 찾아 ‘홍콩 커넥션: 70년대 한국 퓨전 액션의 세계’ 메가토크에 참석해 액션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개봉을 준비 중인 류승완 감독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영화에서 만난 적도 있다. <사망유희> 온실장면에서 사정없이 화분을 깨뜨리고 홍콩 배우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었던 각도 높은 발차기를 교환하며 박력 넘치는 일대일 대결을 벌인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시아 버전에 포함됐던 이 장면은 당시 국내 개봉 시에는 볼 수 있었지만, 현재 영어 버전이 출시된 <사망유희> DVD(태원)에는 수록돼 있지 않다.
당룡, <사망유희>를 완성한 한국의 이소룡
이소룡은 <사망유희> 촬영 도중 세상을 떴다. 라스트 액션 신만을 촬영한 상태였기에 이소룡의 모습을 편집해서 조악하게 적당히 배치하고 그의 대역을 찾아 영화를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대니 이노산트, 한국의 합기도 고수 지한재, 유명한 농구 선수 카림 압둘 자바를 기용해 촬영했지만 여러 이유로 촬영이 미뤄졌고, 결국 이소룡은 <용쟁호투>(1973)에 먼저 출연하고 난 뒤 요절해 영화 완성 자체가 불투명했던 것. 그러다 ‘이소룡 영화’라는 막대한 흥행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골든하베스트는 대역을 공모했고, 당시 동아흥행(현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사장의 권유로 무명의 김태정이 홍콩으로 건너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이소룡의 사후 자리를 꿰찼다. 비록 선글라스를 쓴 채 뒷모습이나 옆모습으로 보일 때가 많았지만, 이소룡의 촬영분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사망유희>에서 실제로 더 오랜 시간 연기했다. 그때를 회고하는 당룡은 지금도 벅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이소룡은 나의 절대적인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가면 벽은 물론이고 화장실 천장까지 전부 이소룡의 사진으로 도배돼 있었다. <사망유희> 배우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내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가짜 이소룡 가운데 첫째였다. 이후 거룡이라는 또 다른 한국 배우가 활약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오직 액션 배우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한 그는 호떡 장사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충무로를 들락거리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배우가 됐다. ‘이소룡 같은 배우가 되겠다’는 얘기는 당시 누구나 가졌던 꿈이었지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기에도 딱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소룡 같은 배우 정도가 아니라 실제 이소룡이 된 배우다.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홍콩에서도 무명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그에게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고 그때부터 그는 손동작부터 특유의 괴성이나 버릇 등 이소룡의 모든 것을 샅샅이 연구해 이소룡이 됐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은둔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왕호와 달리, 아주 오래전 영화계를 떠나 현재 하와이에 거주하는 그는 메가토크와 같은 자리 자체가 처음이다. “아무래도 이소룡의 대역이었고 나의 존재 자체가 팬들의 환상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이후에도 언론을 기피하게 됐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왜 인터뷰도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사람들 앞에 서게 됐다.”
<사망유희> 이후 그는 다시 골든하베스트가 이소룡이 과거 출연한 화면을 그대로 짜깁기해 만든 ‘무늬만’ 이소룡 영화인 <사망탑>(1980)에 출연했다. 첸지앵(이소룡)의 의문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도쿄로 떠난 첸큐오(당룡)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중반부터 당룡은 얼굴을 드러내고 출연해 열연했다. 특별히 스턴트를 연상시키는 동작을 하지 않았던 이소룡과 비교하자면 사실 당룡은 발차기로 전구를 깨뜨리거나 호쾌한 돌려차기를 연속으로 시도하는 등 액션의 난도 자체는 이소룡보다 더 화려했다. 이후 국내에 돌아온 그는 이형표 감독의 <아가씨 참으세요>(1981)에 당대 최고 톱스타였던 정윤희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등 인기를 과시했다. 하지만 국내 출연 작품 편수는 많지 않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장 클로드 반담의 출세작인 <특명 어벤저>(1986)에 그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는 이소룡의 유령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오래도록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만큼 이제 후배들의 제의가 있다면 작은 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자서전도 준비하고 있다”며 “내 옛 영화(<아가씨 참으세요>)를 지금 다시 보니 몹시 부끄러워서 죽고 싶을 정도다. (웃음) 부끄럽지 않은 작품 하나 남겨야 하는데”라며 웃어 보였다.
왕호, 토네이도 발차기의 달인
왕호(본명 김용호)는 골든하베스트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였다. 출연 작품 편수로만 보자면 황정리와 더불어 가장 ‘다작’했던 한국 태권 용병들 가운데 하나다. 해병대 태권도 대표 선수로 활동하던 그는 1976년 김선경 감독의 <흑룡강>과 <밀명객>에 황정리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고, 한국에 와서 배우를 물색하던 골든하베스트의 황풍 감독의 눈에 띄어 <사대문파>에 출연하게 된다. <아가씨 참으세요>에서 당룡을 괴롭히던 쌍룡회의 콧수염 고수로 출연한 권영문도 그와 같은 케이스였다. 이후 <중원호객>, <천하제일권>(원제: 찬 선생과 조전화, 1978) 등의 작품에서 기존 홍콩 스타들을 압도하는 현란하고 시원한 발차기를 선보였다. 정소동의 데뷔작 <생사결>(1982)에서도 은발 머리로 나와 잠깐이지만 멋진 액션을 구사하기도 했다. “영화배우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태권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미국에 가서 도장을 차리고 싶었다. 그런데 한홍 합작 붐을 타고 우리 해병대가 운동하는 체육관에 홍콩 골든하베스트 사람들이 찾아왔고, 황풍 감독의 권유로 제대하자마자 홍콩으로 갔다”는 게 그의 얘기다.
현재 그의 작품들은 국내에 DVD로는 <중원호객>과 <생사결>만 출시돼 있지만, 해외 사이트에는 ‘Casanova Wong’이나 ‘Casafa’라는 이름으로 아주 많은 작품들이 검색된다. 그중에는 그가 국내에서 출연하거나 연출한 작품인데도 국내에서는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채 ‘홍콩영화’로 둔갑해 출시된 작품들도 상당수다. 한국 액션영화의 단절, 거시적으로는 한국 영상자료의 보존이라는 면에서 꽤 가슴 아픈 일이다. ‘카사노바’라는 꽤 장난스러워 보이는 영어 이름은 황풍 감독이 지어준 것이다. 아마도 새로 발굴한 배우를 눈에 띄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가운데 ‘노’자를 빼서 카사파라 줄여 부르기도 했지만 한국에는 왕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어떤 이름이었건 간에 ‘발차기는 왕호’라는 팬들의 공감대는 넓었다. “홍콩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안 됐다. 말도 안 통하는데 나를 증명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특수 발차기를 계속 개발했다. 날아서 다리를 양쪽으로 찢는 가위차기, 세번 연달아 차기, 공중에 떠서 다섯번까지 찼다. 그런 노력으로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역시 카사파!’라고 얘기해줄 때 정말 뿌듯했다.”
당룡과 달리 왕호는 한국으로 건너온 뒤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출연뿐 아니라 많은 작품을 직접 제작도 하고 연출도 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이유도 ‘연출을 하고 싶어서’였다. <마검야도>(1985), <냉혈자>(1987), <붉은 마피아>(1994)는 물론 액션 드라마 <비객>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잊혀갔다. 액션영화를 천대하는 풍토에다 오직 배우만 하다 온 사람이 제작과 연출을 겸하며 척박한 한국 영화계 안에서 버티기에는 쉽지 않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는 틈틈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천지무예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무도단체를 만들어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다. “배우는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야 한다”는 자신의 오랜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