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매니저 하면 흔히 말끔한 양복을 입은 30대 젊은 남자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유인택 아시아문화기술투자 공동대표는 그런 점에서 보면 예상치를 한참 벗어난다. 게다가 그는 얼마전까지 영화제작자였다. 지난 20년 동안 전주 찾아 투자 받으러 다니기 바빴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중소기업청에 아시아문화기술투자라는 창투사를 등록하더니, 올해 들어서는 <님은 먼곳에> <미인도> <순정만화> 등의 영화와 조용필 부산 공연, 뮤지컬 <마법 천자문> 등의 투자자로 나서고 있다. 올해 5월 150억원 규모의 문화콘텐츠펀드 1호 결성에 이어 최근 아이벤처 영상조합 1, 2호까지 인수해 약 400억원 규모의 펀드를 굴리게 된 그를 만났다.
-제작자에서 펀드매니저로 변신한 뒤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화려한 휴가>가 제작자로서 은퇴작인 셈이다.
=나이 50줄에 들어선 지도 꽤 됐다. 40대만 돼도 노땅 취급 받잖나. 50대 제작자 유인택으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비즈니스가 안 되더라. 단적으로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의 실무자들이 대개 30대 중·후반이다. 연령차가 20년 가까이 나는데.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했다. 밥 먹자고 하면 대표님 무슨 밥입니까, 찾아간다고 하면 무슨 말씀을 저희가 찾아봬야죠. (웃음) 영화제작을 계속 하려면 내 자본이 있지 않는 한 어렵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프로듀서 후배들과 비즈니스 경쟁하고, 파이낸싱 경쟁하고 그것도 모양새가 아닌 것 같고. 그러다보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뭔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흥행작 <화려한 휴가>의 제작자였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좀 뜻밖일 것이다.
=소재의 특성상 투자가 용의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불리한 계약들을 많이 맺었다. 영화 흥행으로 제작사에 떨어지는 몫이 15억원 정도인데 지불해야 할 금액은 18억원이나 된다.
-펀드매니저로서 어떤 점에 강점이 있다고 보나.
=2000년부터 지금까지 대략 6천억원 정도의 돈이 펀드를 통해 영화계에 들어왔다. 현재는 이중 3500억원에서 4천억원 규모의 자금이 운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수익률이 좋지 않다. 잘되면 다 덮어지지만, 안 되면 없는 의혹까지 생겨난다. 벤처캐피털을 운용하는 쪽에서는 수익률이 떨어지니까 영화계쪽에 투명성 문제를 제기했고, 문화콘텐츠는 돈이 안 된다고 등을 돌렸다. 자본과 콘텐츠 사이의 불신의 골이 너무 깊게 팬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벤처캐피털을 운용하는 이들이 영화산업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 모르니까 이들은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 세팅해놓은 작품들에 소액투자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편에 3억원씩 소액투자를 해서 들러리 서는 방식으로는 상식적으로도 좋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화쪽 인력이 함께 결합하는 형태의 펀드 구성이었다.
-다른 벤처캐피털과 비교해 남다른 투자작 기준 결정이 있나.
=후배 프로듀서들에게 아이템 단계서부터 제안해 달라고 부탁한다. 일찍 투자 결정을 받으면 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감독까지 붙여서 시나리오 각색을 수차례 끝낸 다음에 캐스팅까지 거의 구두로 확약받은 상황에서 투자를 제안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작품의 컨셉과 맞지 않는 스타 배우를 무리하게 캐스팅하는 것이나, 제작사들이 경상비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사무실을 운영해야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시아문화기술투자는 시놉시스나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함께하면서 그런 부분들을 제거하고 경제적 효율을 높일 생각이다. 벤처가 뭔가. 아이디어 하나만 보고서 성장 가능성을 예측하고 모험을 거는 것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경남지역 민방인 KNN, 동서대학교 등이 주주로, 부산시와 부산은행 등도 ACTI 문화콘텐츠 펀드 1호 출자자로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문화기술투자는 지역과도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형태의 펀드를 염두에 두고 있다. 문화산업의 경우 지역 불균형이 다른 분야보다 훨씬 심하다. 지자체들은 그동안 관광 등을 위해 세트를 짓는 식의 소진성 사업만으로 접근했는데, 그렇게 해선 지역의 문화적 자생력을 높일 수가 없다. 부산의 경우만 하더라도 영화 관련 대학 재학생만 2800명이나 된다. 그런데 영화사가 하나도 없으니까 모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 올해 후반작업 기지를 준공하는데 서울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산시 등과 펀드를 결성하면서 5년 뒤에 메이드 인 부산 영화가 20편 정도 제작되도록 같이 노력해보자고 말했는데, 시범 케이스인 셈이다.
-하반기 결성 예정인 100억원 규모의 (가)청풍영상펀드도 지역간 불균형 해소 차원에서 추진된 것인가.
=맞다. 지자체 입장에서도 예산을 들여 1회성 지원을 하는 것보다 펀드를 통한 간접지원이 훨씬 이익이다. 수익률이 좋을 경우 배당까지 받는 것 아닌가. 제천시에서도 그 부분을 받아들여줘서 각각 50억원씩 마련하기 위해 뛰고 있다. 대구, 광주, 전주, 춘천 등도 문화콘텐츠 관련 펀드가 결성됐거나 추진 중인데 활성화되면 지역의 관련 업체들도 서울 업체의 하청이 아닌 독자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본다.
-내년 결성 예정인 펀드 중에 500억원 규모의 글로벌 한류콘텐츠 펀드가 있다. 한류 거품이 꺼진 지 오래라 만만치 않을 텐데.
=SM엔터테인먼트나 <난타>의 PMC 프로덕션 등 한류의 대표적인 기업들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각 분야의 대표적인 기업인 학산문화사(만화)나 네오위즈(게임)쪽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이고.
-계획대로라면 2012년 정도까지 누적 펀드 규모가 무려 3500억원이다.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펀드, 펀드, 펀드. 펀드매니저가 아니라 펀드전도사가 됐다. (웃음) 펀드를 통하면 산업은행, 공제회, 농협 등 공적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문화예술계 외부의 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되도록 많이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