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감독 데이비드 리프와 존 셰인펠드가 만든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은 1960~70년대 반전운동가였던 존 레넌에 관한 영화다.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존 레넌은 비틀스의 존 레넌이다. 2004년 <롤링스톤>이 발표한 “불멸의 거장들: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인의 아티스트” 리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영국 밴드의 멤버. 20세기 세계 대중음악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였고, 반전시위와 히피즘, 자유의 60년대에 젊은 대중에게 예수로 추앙받을 만큼 숭고했던 사회운동가. 그의 짧았던 40년의 삶을 몇개의 궤적으로 나눠 간단히 살펴보자.
1. 비틀스와 존 레넌
존 레넌은 비틀스의 가장 최초 멤버다. 1957년, 열일곱살의 존 레넌은 학교 친구인 에릭 그리피스와 함께 비틀스의 전신이 된 밴드 쿼리맨(The Querrymen)을 만들었다. 교회 공연에서 만난 폴 매카트니가 밴드에 합류했고 이듬해 조지 해리슨이 베이시스트로 들어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 레넌,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의 비틀스가 만들어진 건 1962년 1월. 오늘날의 비틀스를 키워낸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3개월 뒤였다.
1963년 첫 앨범 ≪Please Please Me≫가 영국에서 넘버원 히트를 한 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1967년 8월까지 4년여간, 비틀스는 영국의 로큰롤 스타에서 미국시장을 정복한 세계적 스타로, 다시 밥 딜런과의 만남 이후 예술성과 저항정신을 결합한 이 시대의 아티스트로서 점점 더 독보적인 위치를 다져갔다. 엡스타인의 사망은 비틀스 해체에 거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멤버들은 새 매니저 영입을 두고 큰 갈등을 빚었고, 이 시기 비틀스는 두명의 매니저(존 레넌,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담당과 폴 매카트니 담당)를 두게 됐다. 뒤에 존 레넌은 <롤링스톤>을 통해 엡스타인이 죽은 뒤 팀이 철저하게 매카트니 위주로 돌아갔었다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존 레넌은 1969년 팀을 떠났다. 1970년 5월 동명의 음악다큐멘터리와 함께 기획된 정규앨범 ≪Let It Be≫ 발표 직후 비틀스는 공식 해체했다. 비틀스 멤버들간의 파트너십이 법적으로 해제되는 서류에 존 레넌이 사인한 건 1974년이다.
2. 오노 요코와 존 레넌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의 만남은 팬들에게나 멤버들에게나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것이었다. 존 레넌은 오노 요코를 만날 당시 첫 번째 아내 신시아 레넌과 결혼 상태에 있었다.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66~67년이고, 존 레넌은 1968년 오노 요코와 결혼하기 위해 신시아를 상대로 이혼청구소송을 냈다. 존 레넌의 소송 사유는 아내의 불륜이었는데, 곧 오노의 임신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시아의 항소가 이어졌고 존 레넌은 자신의 아내가 위자료로 7만5천파운드 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존 레넌에게 10만파운드의 위자료와 매년 2400파운드의 생활비를 아내에게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레넌과 오노는 1969년 결혼했다. 두 사람의 유명한 평화 침대 시위(Bed-In)가 처음 벌어진 것은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신혼여행에서였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이 시위를 이어가려 했으나 입국을 거부당했고, 대신 몬트리올로 갔다. 70년대 반전운동의 주제가처럼 불리게 된 <평화의 기회>(Give Peace a Chance)는 이때 녹음되었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은 1971년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시인이자 운동가였던 존 싱클레어의 석방 촉구를 위한 콘서트 무대에 함께 섰다. 각종 반전평화운동에 나섰던 존 레넌은 2년 뒤, 미국 정부로부터 60일 이내의 출국명령을 받았다. 오노에겐 아무 조처도 내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치적 보호를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를 진행했다. “국가도, 경계도, 여권도 없는 오직 사람들만의 세상”이란 개념의 “뉴토피아”를 주장하며 레넌 부부가 새하얀 손수건을 흔들었던 이날 기자회견의 전체 모습은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에서도 볼 수 있다. 곧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2년 뒤 재결합했다.
3. 존 레넌의 죽음
존 레넌은 1980년 12월8일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네발의 총을 맞았다. 응급실로 옮겨졌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이튿날 오노는 남편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다. 오노는 “장례식은 없을 것”이라면서 “존이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말했다.
존 레넌의 사망 6일 뒤, 대대적인 묵념 모임이 열렸다. 레넌을 기리는 10분간의 침묵 기도를 해달라는 오노의 요청이었다. 이날 뉴욕 센트럴파크에 모인 인원은 10만명이 넘었고 레넌의 고향인 리버풀에서도 3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시대의 아티스트이자 운동가였던 존 레넌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센트럴파크에는 존 레넌의 어린 시절 회상이 담긴 비틀스의 곡 <Strawberry Fields Forever>(1966)에서 이름을 따‘스트로베리 필즈’란 이름의 정원이 만들어졌다.
팬을 가장해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2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