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포커스] 제한상영가는 위헌이다
2008-08-05
글 : 장영엽 (편집장)
영비법 제한상영가 등급 규정,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 불합치 결정

“위헌이랍니다.” 7월31일 오후 2시 반, 전화기 너머로 박주민 변호사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려 3년 만에 나온 결론이니 흥분할 만도 하다. 이날 헌법재판소는 영화 및 비디오물 진흥법(이하 영비법)의 제한상영가 등급 규정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이 같은 결정 이유는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영비법상 관련 조항에 따르면, “어떤 영화가 제한상영가 영화인지 규정하지 않고 있다”. “상영 및 광고·선전에 있어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영화”라는 규정만이 유일하다.

제한상영가 등급은 2001년 등급보류 규정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단에 따라 이후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생겨난 등급분류 기준이다. 하지만 제한상영관은 실질적으로 운영되지 못했고, 영화계 안팎에서는 그동안 제한상영가 등급이 사실상 상영금지 조치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에 대해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우리는 법대로 심의했을 뿐”이라며 “제한상영관이 없는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맞서왔다. 하지만 헌재의 이번 결정에 따라 이 같은 논쟁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헌재가 영비법의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사실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다. 수입사인 월드시네마가 <천국의 전쟁>에 내려진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등급판정 취소를 내용으로 한 행정소송을 신청한 것이 2006년 2월. 이에 앞서 2005년 11월24일 영등위는 ‘성기 및 음모 과다 노출 등’을 이유로 들어 <천국의 전쟁>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 월드시네마는 “영등위의 심의기준이 모호하다”며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신청하면서, 동시에 영화진흥법 제21조 제3항 제5호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함께 제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헌법재판소로 넘겼다. 참고로 헌법재판소 9명의 재판관 중 7명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영화 <천국의 전쟁>은 멕시코 감독 레이가다스의 2005년작으로, 같은 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장군의 개인 운전사로 오랫동안 일하던 남자는 장군의 딸을 사랑하지만,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버림받고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다는 내용의 영화다. 문제가 된 장면은 주인공과 여자가 정사를 나누는 대목이다. 영등위는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여과없이 묘사됐다”며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지만, 이 영화는 독일, 영국 등지에서 18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네덜란드에서는 16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제한상영가 등급은 상영불가 판정과 마찬가지

월드시네마의 변석중 대표는 영등위에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직후 “이 정도 수위는 이미 18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된 <몽상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심의기준에 문제를 제기했다. 월드시네마쪽은 2005년 12월 남산감독협회에서 시사회를 열고 전문 평론가, 영화 전문 기자, 일반인을 상대로 <천국의 전쟁>의 제한상영가 판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영등위의 등급 판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

월드시네마가 위헌심판을 신청했던 영화진흥법 제21조 제3항 제5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한상영가: 상영 및 광고·선전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영화’. 이 조항만으로는 어떤 부분이 어떻게 제한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호한 등급이 영화감독이나 영화 수입업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영화와 관련한 광고나 비디오 출시가 모두 금지되는 데다 국내에 제한상영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2004년 대구의 레드시네마와 동성아트홀 등이 제한상영관으로 재개관하며 한동안 ‘제한상영관 개관 열풍’이 불었으나 모두 몇달 만에 경영난으로 극장 문을 닫았다. 제한상영가 등급은 상영불가 판정이라고 영화 관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왔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영등위의 재심의를 거쳐 제한상영가 등급에서 벗어난 영화도 있지만, 상당수의 영화들은 재심 과정에서 자체삭제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는 세 차례의 심의를 거치면서 7분가량의 정사장면을 색보정한 뒤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의 <숏버스>(2007)는 극장개봉을 포기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의 등급면제분류 추천을 통해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2년6개월 동안 네번의 영등위 심의를 거치며 소송을 진행한 월드시네마 또한 법적 대응을 택하지 않았다면, 앞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법적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월드시네마쪽이 감내해야 했던 피해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월드시네마쪽 박주민 변호사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며 법원 행정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서울 행정법원이 우리의 제청을 바로 헌법재판소로 보냈어야 했는데, 행정직원의 착오로 6개월간 안 보냈더라. 그런 시간낭비로 이미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또 사건을 맡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바뀌는 바람에 한동안 심의가 보류되기도 했다.” <천국의 전쟁>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됐지만, 월드시네마 입장에서는 손쓸 여력조차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영상물 등급에 대한 논의 재점화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 영상물 등급에 대한 논의는 다시 뜨거워질 전망이다. 특히 상영등급에 대한 구체적 기준 마련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토론 대상이다. 이번 소송의 담당 변호사이자 인권운동사랑방과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온 박주민 변호사는 “심의기준 자체가 통째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관계자들이 영화를 만들거나 수입하는 과정에서 등급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도록 평가기준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모범 사례로 든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경우 ‘언어, 폭력, 노출, 성적 행위, 공포, 심리적 충격’이란 여섯 가지 기준을 통해 등급을 분류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심의기준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보는 주체가 일반 시민들인 만큼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등급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편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천국의 전쟁>과 똑같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뒤 이에 불복해 영등위 심의기준에 대한 위헌 소송을 진행 중인 영화사들은 힘을 얻은 분위기다. <숏버스>의 공식 개봉을 포기해야 했던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우리도 이미 1심은 승소한 상태고, 2심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내놓았다. 조 대표의 기대처럼 <숏버스>도 제한상영가 등급 영화라는 멍에를 벗을 경우, 비디오나 DVD 판매가 가능해진다. 헌재가 ‘표현의 자유’에 손을 들어준 건 올해 들어 두 번째. 헌법재판소는 지난 6월 TV 방송광고 사전심의제에 대해서도 “사전 검열에 속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헌재의 결정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다.

“<천국의 전쟁>을 기다려준 관객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월드시네마 변석중 대표 인터뷰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벌써 3년 정도 됐다. 그동안 <천국의 전쟁> 때문에 다른 영화도 거의 개봉 못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그동안 우리 영화를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불법 인터넷 파일로 많이들 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도 소송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제한상영가란 판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심의 과정에서 불합격을 받았을 때 지적받은 것이 ‘노출 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예전에야 아예 성기가 노출되면 안 된다, 음부가 나오면 안 된다, 이렇게 일괄적인 노출 심의 기준이 있었는데 지금 이 정도 노출은 벌써 개방된 거 아닌가. 수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가 기준이 모호하게 생각됐다. 오죽하면 (영등위가) 예쁜 사람은 등급 잘 주고, 미운 사람은 등급 안 준다는 생각까지 했겠나.

-패소에 대한 걱정도 많았겠다.
=물론이다. 헌재가 결정을 내리기 직전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한국에 마땅한 제한상영관이 없다는 사실을 헌재가 고려해줄 것이란 기대는 있었다. 만약 패소했다면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장면은 어쩔 수 없이 편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예전에는 헌법재판소 하면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 아니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사례를 많이 겪으면서 헌재쪽이 우리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영화 수입사 대표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예상되나.
=새로운 기준이 완성되는 동안 여유를 가지고 우리 작품을 돌아볼 수 있는 유예기간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또 이번 결정으로 이제까지 영등위의 판정에 불만을 가졌던 영화사들이 덩달아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등위의 입지가 애매해지지 않겠나.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할 일이 많다. 헌재의 위헌 결정이 나왔다고 해서 영화를 바로 상영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영등위에서 관련조항을 수정하면 <천국의 전쟁>을 일반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영화를 기다려준 관객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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