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파시즘은 독일의 유망한 감독들을 타국으로 내몰았고 덕분에 미국은 자신의 문화와 사회를 장르의 혁신과 독특한 시선으로 재현하는 이방인 예술가들로 때아닌 행운을 누리게 된다. 멜로드라마의 거장 더글러스 서크(1900~87) 역시 그런 망명자들 중 하나다. 물론 에른스트 루비치(1892~1947)의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뒤바리 부인>이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뒤, 1920년대에 이미 할리우드로 건너온 경우다. 어쨌든 시기상 차이는 있지만, 더글러스 서크는 유니버설사의 전속 감독으로서, 에른스트 루비치는 파라마운트사의 대표적인 감독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8월8일부터 31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는 이들이 미국에서 만든 작품들을 중심으로 ‘에른스트 루비치 & 더글러스 서크 회고전’이 열린다.
미국으로의 이주 뒤, 루비치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건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그의 발빠른 적응력과 상상력을 증명한 뮤지컬 <러브 퍼레이드>다. 여왕과의 결혼으로 왕의 자리를 넘보는 어느 외교관의 좌절기라고 할 만한 영화는 결국 왕의 껍데기만 쓰고 상류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루비치의 뮤지컬 (로맨스)코미디의 시대(<몬테 카를로> <당신과 함께한 시간> <메리 위도우> 등)가 열린다. 루비치의 코미디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권위에 대한 조롱과 성적인 긴장, 그리고 그걸 드러내기 위한 설정- 이를테면 삼각관계를 비롯해 속임수나 우연한 타이밍으로 인해 어긋나버리는 관계- 의 근원에는 ‘오인된 정체성’의 모티브가 있다. 쉽게 말해 내가 보는 당신이 진짜 당신이 아니라는 건데, 그러한 착각과 역할 전도에서 사랑과 사건의 희극이 비롯된다. 그의 후기작인 <사느냐 죽느냐>는 그 모티브를 최대한 극적으로 활용하여 로맨스와 사회코미디를 매끄럽게 엮어낸 수작이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두 무게중심은 나치군이 등장하는 반나치 연극 공연 극단과 실제 나치군이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집단이지만 배우들은 금지된 연극을 아예 무대 밖으로 끌어내어 실제 파시즘의 무대 위에서 ‘나치군’이라는 기표를 한껏 연기하며 그들을 조롱한다. 그것은 생존의 기술이자 유머러스한 저항의 기술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트릭 속의 트릭, 연기 속의 연기 등으로 부르고 싶은 절묘한 순간들이 있으며, 배우 출신 감독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철학이 묻어난다.
서크의 경우, 할리우드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반나치 영화를 만들다가 1950년대 초 본격적으로 멜로드라마에 뛰어들면서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흥행감독이었지만 그의 영화들은 70년대가 되어서야 평론가들에 의해 강력하게 다시 살아났고 파스빈더는 이 독일인 망명자의 영화를 보며 스타일과 이데올로기의 만남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지극히 양식화되고 과잉된 소품, 색채, 공간으로 가두고 사랑을 그러한 양식화된 것들의 일부로 위치시키는 서크의 전략에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혹은 불가능하게 하는, 혹은 견디게 만드는, 혹은 파괴하게 만드는 사랑 ‘이외의 것’들을 봐야만 한다는 맹렬한 주장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미국 중산층 가정으로 대변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과 가부장제의 위선부터 계급, 인종의 맥락까지를 아우르는 사회적 구멍의 추악함에 대한 증거다. 대단한 건 그가 낭만적인 시선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음에도 사랑의 뼈대가 냉정하게 드러나는 장면의 정서적 밀도는 그 어떤 멜로보다 깊다는 사실이다. 비극적인 끝을 예견하는 <바람에 사라지다>의 도입부에 휘몰아치는 스산하고 부조리한 이미지가 주는 감정적 울림을 잊을 수 없다. 되찾은 행복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 행복에 달라붙은 차디찬 고통이 함께 보이는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결말의 시린 마음도 잊을 수 없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웃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오.” 백만번 옳다. 더글러스 서크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