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오디세이]
[걸작 오디세이] 관객에겐 찬가, 마릴린 먼로에겐 비가
2008-08-07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 , 빌리 와일더, 1959

빌리 와일더(1906~2002)는 1940, 50년대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발전을 말할 때 맨 앞줄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 목록이 얼마나 화려한지 <이중배상>(1944), <선셋대로>(1950), <7년만의 외출>(1955), <뜨거운 것이 좋아>(1959), 그리고 <아파트를 빌려드립니다>(1960) 같은 대표작만으로도 당시의 할리우드영화사 모두를 쓸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누아르, 코미디, 멜로드라마 등 장르를 넘나들었다. 키가 작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와일더는 매우 영리하고 코믹해 보인다. 그런데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특히 그의 어머니, 할머니, 의붓아버지는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말하자면 그의 삶의 조건은 코미디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데, 역설적이게도 와일더는 사회를 풍자하는 코미디에 발군이었다. 게다가 마릴린 먼로, 잭 레먼 등 스타들을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쓰는 데도 비범했다. 그 정점에 <뜨거운 것이 좋아>가 있다.

‘금발 백치’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마릴린 먼로

마릴린 먼로(1926~62)는 금발의 백치미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6살에 요절한 30년대의 섹스 심벌 진 할로가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1953년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간호의 표지모델로 나와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누드의 주인공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려는 관객의 호기심이 그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해에 <나이아가라>(헨리 해서웨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하워드 혹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진 네글레스코) 등이 연이어 히트하여, 그녀는 명실상부한 섹스 심벌로 각인된다.

그런데 먼로 자신은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바보 같은 금발’ 역할을 그만하고 싶어했다. 당시는 말론 브랜도 같은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가 주목받을 때였고, 먼로도 연기로 평가받고 싶었다.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으로 변신에 대한 그녀의 욕심은 더욱 현실화됐고, 실제로 메소드 연기를 배우기도 했다. 그 전환점이 메소드의 옹호자 조수아 로건이 감독한 <버스 정류장>(1956)에서의 연기다.

<7년 만의 외출>로 이미 그녀와 호흡을 맞춰본 빌리 와일더는 변한 먼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과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어설픈 메소드보다는 자연스런 연기를 선호했다. 와일더는, 아서 밀러와의 결혼 뒤 스크린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그녀를 다시 끌어냈다. 돈이 급했던 먼로는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작품이 바로 <뜨거운 것이 좋아>인데, 여기서 먼로가 맡은 역할은 ‘애석하게도’ 다시 과거의 ‘멍청하고 섹시한 금발’ 그대로였다. “그래도 옛 역할은 이보다 더 바보 같지는 않았어.” 그녀의 한탄이었다.

영화는 처음엔 갱스터처럼 시작한다. 1929년 시카고, 알 카포네 일당이 포함된 ‘성 밸런타인 살인사건’을 암시하는 장면이 영화의 도입부다. 시커먼 어둠이 깔린 지하 주차장에서 검정색 양복을 차려 입은 갱스터들이 다른 계파의 남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있는 바람에 살인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한 두 음악인 조(토니 커티스)와 제리(잭 레먼)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도주를 벌인다. 이들이 짜낸 꾀는 여성 밴드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은 그들은 조세핀(커티스)과 다프네(레먼)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며 밴드에 입단한다.

갱스터, 뮤지컬, 코미디를 섞는 현란한 솜씨

어둡고 무거운 갱스터로 시작한 영화는 두 여장남자가 섹스 심벌 먼로를 만나자, 어느새 티격태격하는 스크루볼코미디로 변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여성 밴드의 단원들인데, 밴드가 기차를 타고 연주여행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사랑을 싹틔울 때는 영락없이 뮤지컬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와일더는 한 영화에서 갱스터, 뮤지컬, 코미디를 뒤섞는 현란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다.

먼로가 플로리다에 도착하자마자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는 빌리 와일더가 그녀에게 무엇을 원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I Wanna Be Loved By You>를 부르는 먼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다. 남성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은 반투명한 옷에 의해, 그리고 교묘하게 비친 조명에 의해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다. 로저 에버트의 말대로 이 장면은 ‘스트립’에 가까운데, 그럼에도 매혹되고 마는 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녀의 도발적인 육체는 남성 시선을 의식하는 스펙터클 자체가 돼 있다. 먼로 자신은 메소드 연기가 요구되는 복잡한 캐릭터를 원했지만 빌리 와일더는 냉정하게도 그녀를 ‘백치 금발’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그런데 많은 영화인들도 먼로의 뜻과는 달리 와일더에게 동의했다. ‘백치 금발’로 그녀를 기억했지 ‘메소드’를 흉내내는 여배우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기로 받은 유일한 상이다. 말하자면 이 상은 영화인들이 보여준 먼로에 대한 찬가였는데, 그녀 자신에겐 비가처럼 비치는 것이다.

다음엔 시각이 아니라 오직 청각에 의존하는 에로티시즘의 사례로서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Persona, 1966)를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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