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섬세한 클로즈업으로 말하는 희망의 빛,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2008-08-08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유능하고 다정다감했던 남자 브라이언이 거리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그는 한 노파의 아들이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한 남자에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그의 죽음으로 각각 남편과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던 오드리와 제리의 이야기다. 오드리는 제리가 원망스럽다. 브라이언이 제리의 생일을 챙기고 돌아오던 밤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당신이 대신 죽었어야죠”라고 말할 때에도 제리는 말을 잇지 못한다. 허물기 힘든 장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오드리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제리를 끝까지 신뢰했던 남편을 기억한다. 그리고 제리에게 차고의 별채로 들어와 살아달라고 부탁한다. 한때 변호사였으나 지금은 마약중독자 신세인 제리는 그렇게 새로운 삶의 빛을 부여안는다. 여기서부터 만약 두 사람의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다른 영화를 찾아볼 일이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을 잃어버린 뒤 외로운 존재로 남겨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제리에게서 남편의 흔적을 더듬던 오드리는 보호막을 걷어내고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깨달으며, ‘신의 키스’라는 헤로인을 탐닉하던 제리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집에 불이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불에 탄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며 그것들을 아쉬워한다. 영화는 그 목록에 적힌 물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 우리의 삶에 있음을 나지막이 속삭인다. 한 마약중독자가 죽으면, 그의 곁에 있던 마약중독자는 마약을 끊게 된다고 한다. 한 남자의 죽음 끝에서 생의 의지를 회복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제발 고통과 상처의 극점에 이르기 전에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한다. 극중 주인공의 딸이 극장에서 보던 흑백영화는 <선셋대로>다. 그러게, 파멸과 죽음은 스타들의 몫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희망과 생명이 더 어울린다. 감독 수잔 비에르는 연출에 앞서 “물론 세상은 잔인하다. 그러나 희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소박하면서도 깊은 감동은 그녀가 희망을 쉬운 이야깃거리로 다룬 게 아님을 증명한다. 비에르는 <오픈 하트>와 <브라더스>(한국판 DVD가 출시되어 있다) 등의 영화로 구미 예술영화 팬들의 지지를 얻어낸 덴마크 출신 감독이다. 그녀의 첫 번째 영어권 영화를 위해 <아메리칸 뷰티>의 샘 멘데스 등이 발 벗고 나선 데서 보듯, 향후 행보를 주목할 만한 감독이다. 주연을 맡은 할리 베리와 베니치오 델 토로는 뛰어난 스타일과 성적 매력과는 반대로 상처 입은 평범한 사람으로 분할 때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주제와 분위기 면에서 두 배우의 대표작 <몬스터 볼>과 <21그램>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베리와 델 토로의 아름다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영화의 존재감은 덜했을 것이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또 다른 점은 다양하고 잦은 클로즈업의 사용이다. 인물의 내면을 풍경화처럼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를 따른 것으로서, DVD의 섬세한 표현은 눈가의 주름과 음영 하나하나를 인상 깊게 드러낸다. ‘영화에 관한 토론’(21분)은 감독, 제작자, 스탭, 배우들이 나와 주제부터 연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이며, 7개의 삭제장면(10분)과 예고편은 영화의 여백을 잔잔하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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