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칼럼]
[오픈칼럼] 그들은 액션배우다
2008-08-08
글 : 문석

지난주 고 지중현 무술감독 추모 기사를 준비하다 어이없는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둔황 촬영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을 뿐 아니라 그때 짧은 인터뷰까지 했던 것이다. 당시 취재노트를 열어 그와 나눈 말을 들춰보니 <놈놈놈> 현장에서 그가 낯익었던 이유가 단지 김지운 감독과 닮았기 때문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뒤늦게 기억을 수습해보니 당시에도 그의 인상은 꽤 기억에 남을 만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2005년 9월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518호)이라는 기사를 위해 서울액션스쿨을 취재하던 중 이뤄졌다. 그는 와이어에 매달린 채 공중 발차기를 연습하(는 모습을 연출해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점프하는 높이와 파워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과묵한 그의 태도였다. “할 말이 별로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하던 그를 설득해 당시 서울액션스쿨이 있던 보라매공원 체육관 입구 화단 경계석에 앉아 이야기를 듣게 됐을 때, 그는 스턴트맨의 꿈을 품게 된 계기부터 서울액션스쿨에 들어와 정두홍 감독이 운동하는 모습을 훔쳐보며 혼자 연습했던 일, 지기 싫어하는 성격 등을 툭툭 던지듯 말했다. 쉬엄쉬엄 말하던 그가 갑자기 열변을 토한 것은 “현장에서 연기를 하다 다치더라도 아픈 티를 못 낸다”는 대목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끙끙 앓는 한이 있어도 남들 앞에선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턴트맨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자존심과 의연함 때문이었는지 지중현 감독을 아끼는 사람은 많았다. 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정두홍 무술감독을 비롯해 허명행 무술감독, 생김새까지 닮은 김지운 감독, 여러 작품을 통해 우정을 쌓았던 배우 정우성, 그리고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정두홍 감독은 “선배들에게는 잘 대들었고, 툭하면 행방불명되는 사고뭉치였지만 후배들은 진심으로 아꼈다”고 기억한다. 후배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다큐멘터리 <우리는 액션배우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다큐의 제작진이 <놈놈놈> 현장 취재를 거절당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지중현 감독은 후배들을 위해 현장에서 영상을 만들어 보낸다. 그리고 그가 허무하게 사망하자 그를 따랐던 신성일, 곽진석씨 또한 스턴트맨 일을 접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액션배우다>를 보며 가장 우울했던 대목은 지중현 감독의 장례식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직업적 자책감마저 들게 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스턴트맨의 운명처럼, 장례식은 스턴트맨들만의 관심 속에서 소리소문도 없이 끝을 맺었다”는 내레이션은 마치 ‘만약 배우나 감독이 사망했으면 이랬겠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점이나 불과 3년 전 인터뷰 상대를 기억 못했던 사실은 그를 비롯한 스턴트맨을 배우나 감독처럼 빛이 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스턴트맨이라고 안 아프고, 배우라고 아프고 그렇지 않거든. 우리도 맞으면 아파. 표현하지 않는 거지”라는 <우리는 액션배우다> 속 권귀덕 무술감독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나는 ‘액션배우’인 그들을 고통도 감정도 없는 ‘영화적 도구’로만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관객이 헐렁해질 때쯤 <놈놈놈>을 다시 보며 지중현 감독의 흔적을 확인하고 추모하는 개인적 행사를 가져볼까 하는 것도 그런 죄송스러움 때문이다. 미지근한 팩소주라도 괜찮으시겠죠,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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