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감독이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들고 처음 관객과 만난 건 지난해 부산영화제다. “첫날은 반응이 아주 좋았고 둘쨋날은 극명하게 반으로 갈렸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겠다. 시사회에서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봤다. 러닝타임의 3분의 1은 웃었고(이 영화는 올해 최고의 코미디 중 하나다), 3분의 1은 기분이 좋았고(1억원 예산으로 만든 독립영화라기에 이 영화의 촬영과 음악과 완성도는 아주 쫀득쫀득하다), 3분의 1은 복장이 터졌다. 왜? 주인공 차수연은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뮤지션 지망생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그걸 이루려는 의지도 없다. 청춘은 원래 이토록이나 무력한 것일까. 수연이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나른한 음악에 맞춰 홍대 거리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며 가슴이 갑갑하게 부르텄다. 그래서 물었다.
-이 여자, 스물여섯 백수다. 꿈은 있지만 의지도 없고 현실감각도 제로다. 답답하다.
=수연이라는 애는… 주변에 그런 애들이 더러 있었다. 내 자신에게서 그런 성향을 발견할 때도 있다. 사실 열심히 사는 것도 힘든 일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쟁이 가열된 사회에서 자란다. 그런데 경쟁에서 끝없이 지기만 했던 애들에게는 무기력한 삶이 학습되어 있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단어는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쥐를 미로에 가둬놓고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주면 더이상 미로를 빠져나가려는 노력을 안 한다더라. 마치 우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십대의 무기력함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선거 투표율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십대는 투표권이 있으니까 집단적으로 행동만 잘한다면 뭔가를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지금 30대 이상이 20대에 느꼈던 공허함이란, 이를테면 왕가위 영화에 나오는 알지 못할 젊음의 공허함,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지금 20대가 느끼는 무기력함은 좀더 실질적이고 생활적이다. 해봐야 결국 안 될 거라는 무력함. 어린 나이에 영화에 참여했던 스탭 하나도 최근에 어학연수를 떠나면서 그러더라.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이 영화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영화는 어떻게 시작했나. 스무살 시절부터 영화과에 들어가고 싶었던 건가.
=원래는 동아대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그런데 학교를 거의 안 가고 군대를 갔다와서 다시 수능을 봤다. 영화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고 대학원에서 이 작품을 하게 됐다. 당시 중대 시나리오 공모에서 당선돼 학교 지원을 받았고, 영화사 KM컬쳐에서도 지원을 조금 받아서 이 영화를 찍을 1억원의 제작비를 마련한 거다.
-차수연은 어떻게 캐스팅했나.
=이 표현은 절대 나쁜 표현이 아닌데…(웃음), 수연씨는 만난 자리에서 마음대로 행동했다. 보통 여배우들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다가 대본을 리딩할 때에야 역할에 맞게 변한다. 내가 영화사 대표들 만날 때는 평소보다 더 똘똘한 척하는 것처럼. (웃음) 수연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촬영하면서도 첫인상 그대로였나.
=그 이미지 그대로 끝까지 쭉 가더라. 만나기 전에 프로필을 봤을 땐 CF나 뮤직비디오에서 두각을 보였다고 하던데, 의외로 노메이크업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더라. 정말 도움을 크게 받았다.
-방준석 음악감독이 수연을 꼬이는 해외 유학파 뮤지션으로 나온다. 예상외로 비중도 크고 연기도 재밌다.
=신철 PD님 소개로 출연 제의를 했다. 방 감독님은 이런 젊은 영화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움을 주신 것 같다. 사실 현이라는 캐릭터가 그리 매력적인 남자는 아닌데. (웃음) 직업적으로 실제 모습과 겹쳐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캐릭터인데도 방 감독님은 걱정없이 연기해주셨다.
-방준석의 곡, 그리고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곡들이 중요한 테마로 사용된다. 주인공들도 뮤지션이 꿈이다. 음악영화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은가.
=만들면서는 음악영화라는 생각을 크게 한 적은 없다. 청춘영화다. 그런데 청춘들이 음악을 할 뿐이다. 다만 젊은 친구들의 막연한 꿈, 그리고 견고한 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음악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공동 결과물인 영화와는 달리 음악은 개인이 그 자리에서 홀로 창조해낼 수 있는 예술이다. 그래서 젊음과 더 닮아 있는 것 같다.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일정 정도 끌어가기도 하고, 대단히 영화와 잘 녹아든다.
=처음 그들의 음악을 들었을 때 영화와 딱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노래들이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조용조용 단출한 악기로 노래하는데도 감성을 만들어내는 지점들이 좋았다. 내 영화가 그들의 음악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연이 실제로 음악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런 음악을 하지 않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수연의 고민은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돈이 없으니 영국으로 유학을 갔을 리도 없고.
=잘 모르겠다.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으려나. 다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게 된 친구가 한명이라도 생겼다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 아닐까. 사람들이 그러더라. 성공하지 않는 젊음을 다루는 영화를 보니 오히려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주인공들이 성공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면 오히려 더 소외감을 느낀다고. 내 영화는 그렇지 않아서 위로가 된다고.
-차기작은 뭔가. 또 다른 청춘영화인가.
=거대 음모에 대한 장르영화. (웃음) 우리는 거대 음모의 존재에 대해 동의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선악의 기준이 모호한 캐릭터가 거대 음모 앞에서 무기력하게 부딪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것도 재미있겠지만 코미디는 어떤가.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몇몇 장면들은 올해 본 가장 웃기는 코미디 장면이었다.
=근데 내가 즐기는 유머는 대부분 내 처지를 비관하는 유머들이다. 실제로 삶이 힘든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유머로 만들어서 긍정적으로 되돌려낸다. 감추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니까. 장르적인 영화를 하더라도 유머를 가지고 가는 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