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낭만의 정신을 기리는 마음
2008-09-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데이비드 마멧의 엉뚱하면서도 흥미로운 괴작 <레드벨트>

LA에 도장을 차려놓고 조용히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주짓수(브라질 유술) 사범 마이클 테리가 상업화된 이종격투기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레드벨트>는 1시간39분의 상영시간 중 거의 1시간10분을 소요한다. 주인공 테리는 그 경기에 나갈 계획이 애초에 없었으며 연습도 충실히 하지 않았고 승부욕에 붙타오른 적도 없다. 그런데도 마침내는 경기에 나가게 된다. 그저 자기에게 밀려오는 사건들에 쫓겨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았고 갑자기 참가를 결정한다. 사실은 1시간10분 동안 필사의 노력으로 거기에 가지 않기 위해 버텼던 것이다. 무도가 쇼로 변질되어 있는 그 링 안으로의 참가 혹은 불참의 의지. 이 차이가 <레드벨트>를 어떤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레드벨트>는 마이클 테리라는 순수한 무도인이 어찌하여 이종격투기라는 자본의 링에 오르는 걸 결국 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만든 데이비드 마멧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잊혀진 이름이다. <언터쳐블>의 각본가이고 <글렌게리 글렌로즈>의 원작자이며 <호미사이드>라는 품격있는 심리스릴러를 만든 감독이지만 2000년대 이후 그의 영화를 한국의 극장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다소 동떨어진 코미디영화 <스테이트 앤 메인>을 논외로 치더라도 그럴듯한 하이스트 무비인 <하이스트>와 범상치 않은 수사극 <스파르탄>은 소리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레드벨트>는 이렇게나 천대받을 영화가 아닌 것 같은데도 서울에서 단관 개봉했다.

물론 미국 연극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그의 고색창연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영화계에서 마멧이 진정한 작가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이미 판가름이 났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의 영화는 영화적이라는 문제가 닥칠 때마다 연극과 영화 그 사이에서 어딘가 모르게 우유부단하게 서성인다. <레드벨트>도 그 이상으로 많은 진척을 보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마멧의 영화는 괴상한 방식의 파토스에 싸여 있기 일쑤인데, 장르적 틀 안에 있으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낭만적 정신성을 순간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레드벨트>의 이 점이 흥미로우며 또한 지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낭만적 정신성을 좇을 때 <레드벨트>는 좀 괴상해지는데 도리어 그게 이 영화의 순수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레드벨트>가 그 무엇에 관한 영화가 ‘아닌지’를 말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적어도 <레드벨트>는 격투기를 소재로 한 스포츠영화가 아니다. 테리의 서사는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감동적이며 단계적인 파토스를 형성하지 못한다. 비록 클리셰지만 스포츠영화라면 이 과정은 꼭 필요하며 거부할 수 없는 쾌감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걸 만족시키기는커녕 경계한다. 몸싸움이 다채로운 액션 무비도 아니다. 격투장면은 통틀어 두세번 정도이고 그중에서도 자신과 겨룰 만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 싸우는 건 라스트신에서 딱 한번뿐이다. 테리는 싸움 앞에서 훈계를 하며 가상적으로만 싸우거나 방어로 일관한다. 때문에 이종격투기의 살벌한 교전에서 오는 원초적인 폭력의 쾌감과 이 영화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만약 이종격투기의 팬이 주짓수, 격투, 라는 말에 홀려 극장을 찾게 되면 당신의 기대에 이 영화는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게임 같은 스펙터클의 묘사를 즐기려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한편의 전쟁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하필이면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이라면, 그게 바로 이종격투기의 팬이 <레드벨트>를 마주하는 것과 비슷한 배반감일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결국 영웅이 되는 가난한 무도가

비오는 어느 날 밤 테리와 그의 문하생인 가난한 경찰관 조가 수련을 마칠 때쯤 한 여자 변호사가 바깥에 세워든 테리의 차를 들이받았다며 도장으로 들어온다. 다가오는 조에게 과민반응을 보인 여자가 오발사고로 도장의 유리창을 깬다. 하지만 테리는 그 유리창을 끼워넣을 돈이 없다. 테리가 처형을 만나러 갔을 때 테리는 술집에서 유명배우 쳇이 시비에 휘말린 걸 도와주고는 그와 친구가 되는 한편 선물로 손목시계를 받는다. 하지만 그 시계는 장물로 밝혀진다. 테리는 일찌감치 그걸 생활이 어려운 조에게 보태쓰라고 선물했는데 시계를 전당포에 넘겼던 조는 장물임이 밝혀지면서 곤란에 처한다. 그리고 그는 자살한다. 그의 자살 직후 테리는 문득 경기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길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 잔가지를 치고 나면 테리가 싸움판에 뛰어든 수순은 대강 이렇다. 이때 마멧은 우선 테리의 오디세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여러 인물과의 관계를 폭넓게 맺어주는데, 전반적으로 본다면 진행속도와 작법에 있어 의도적인 헐렁함 안에 놓여 있다.

비교컨대 <하이스트>를 보면 마멧이 기술적으로 박진감 넘치는 플롯을 짜는 데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레드벨트>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마멧 영화 중에서도 너무 헐렁하고 느리다. 그러니까 테리가 링에 오르기까지 서사는 상승곡선을 그리는 대신 일부러 빙빙 돌고 있다. 영화가 그러니 좀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다. 인물은 장르적 요구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장르가 요구하는 궁극에 도달하기를 거스르며 주변의 인물과 이야기 사이에서 한참을 유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상한 폭발은 마침내 라스트신에서 일어난다. 테리는 처형이 프로모터로 있는 격투기 경기에 출전하기로 한 뒤, 이 경기가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개발한, 말하자면 ‘핸디캡 훈련법’이 도용되어 미리 승자와 패자를 조작하는 데 동원되고 있음을 눈치챈다. 이 방식은 시합 전 두 선수가 한개의 검은 구슬과 두개의 흰 구슬이 담긴 그릇에서 각각 하나씩 뽑되, 검은 구슬을 뽑는 쪽은 한쪽 팔을 묶거나 눈을 가린 핸디캡을 갖고 상대방과 싸워야 하는 규칙이다. 테리는 그걸 어려운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는 훈련과정으로 쓰지만 이 경기는 구슬의 색깔을 바꿔쳐 미리 승자와 패자를 가려놓고 시작하는 조작의 도구로 쓰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테리가 이따위 짓은 그만하겠다며 경기장을 벗어나려다가 진실을 밝히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들어오는데 그때 하필 그는 링 안에 들어가서 그걸 말하겠다고 하고 그러다 도중에 챔피언격인 선수와 맞붙어 싸우게 된다. 그러니까 라스트신이 이상한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사각의 링 안이 아니라 링으로 향하는 길목, 링 바깥에서 싸운다는 어정쩡한 설정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그렇게 싸운 뒤 승리한 테리가 링으로 다시 올라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더더욱 이상한 건 진실을 밝히겠다고 올라간 그 자리에서 테리는 그 말은 하지 않고 난데없이 그날 경기를 보러온 주짓수의 고수인 조앙 모로에게서 진정한 고수만이 받을 수 있다는 레드벨트를 수여받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목적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얼떨결에 테리는 영웅이 되었으며 영화는 여기서 끝나버린다.

이 라스트신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낭만적이다. 이 우스꽝스러움과 낭만성이야말로 <레드벨트>의 괴이함을 한순간에 자아낸다. 상대를 쓰러뜨린 다음 테리는 링 위에 올라갈 이유가 굳이 없다. 그냥 뒤돌아서 퇴장해도 이 영화는 말이 된다. 올라갔다면 이 쇼는 조작됐다고 밝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길목에서 싸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테리가 링에 올랐을 때 어느새 주짓수의 노고수가 따라 올라와 감동적인 표정으로 레드벨트를 건네준다는 것. 그때 테리는 진실을 밝히는 대신 자신의 영웅성을 성취한다. 테리가 레드벨트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올라 인정받는다는 뜻인데, 그럼 “핸디캡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 영화의 반복적인 테마를 따라 테리는 자기를 묶어두었던 제약에서 진정 벗어난 것인가.

테리의 핸디캡은 돈이다. 도장은 거의 빚더미에 올라 있다. 고지서는 날아들고 여변호사가 실수로 깬 창문 한장 갈아 끼우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아내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서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지만 그걸 갚으려고 몸으로 때우는 것은 테리다. 아내와 테리의 문제. 테리가 마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경찰 조는 자살했다. 그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테리는 그를 도와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죽인 꼴이 됐다. 조와 테리 사이의 문제.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영화배우 쳇을 테리가 구해주자 쳇은 감사의 표시로 시계를 선물하는데 그 시계는 장물로 밝혀지고 조를 죽음으로 내몬다. 쳇과 테리의 문제. 테리가 싸우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돈이며 사건은 늘 거기에서 발생하며 생활고가 가장 강한 적이다.

<레드벨트>의 긴장감은 실로 육체의 부딪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테리를 둘러싸고 과거와 현재에 늘 상존해 있는 자본의 위협에서 온다. 테리는 명상과 문답이라는 자신의 육체 고양의 스타일로 일관되게 이 시대를 버티려고 하지만 결국 돈의 소환에 의해 경기장으로 불려온 것이다. 그가 경기장에 간다는 것은 정신수양으로 다져진 그의 신의와 의협이 돈의 유능한 규칙 앞에 패배하는 것이다. 한 철저한 장인의 신의가 금전과 격투를 벌일 때 누가 이길 것인가. 이 영화가 애처로운 한 예술가의 고단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데에는 바로 그런 이유가 있다.

물론 그가 링에 올라 주짓수의 신 조앙 모로에게 레드벨트를 받는 건 누가 봐도 성급하고 엉뚱한 봉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이때 <레드벨트>라는 영화를 떠안은 주체와 장르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레드벨트를 받는 테리라는 주인공은 결국 육체를 쓴 허깨비다. 이 영화는 테리라는 주인공과 그의 육체의 승리가 주안점이 아니다. 이 영화는 신의와 무도라는 주인공이 돈이라는 주적에게 겪는 패배와 슬픔의 아이러니한 멜로드라마다. 그러니까 테리의 영웅서사가 아니라 무도정신이라는 개념이 인물화되어 겪는 패배의 멜로드라마라로 보아야 한다. 그걸 마멧은 외면적으로나마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육체적으로 영웅의 길을 인정받는 자의 이야기로 끝맺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 우스꽝스러움 옆에 낭만이 놓인다. 그런데 영화가 그 낭만에 감추고 인정하지 않은 진정한 승리자가 테리의 정신이 아니라 여전히 돈의 자금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테리는 자기의 핸디캡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지 못했으며 우리는 마멧의 낭만성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미국의 몇몇 평론가(피터 트래비스, 로저 에버트)가 테리를 마멧으로 놓고 이 영화를 그 즉시 마멧의 예능적 길에 대한 반면교사로 읽어내는 건 그럴 만한 유혹이 있지만 완전히 타당하지는 않다. 마멧이 이 영화로 자기에게 주어진 상업적 영화의 틀이라는 핸디캡을 이기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멧이 주력하는 건 이 안에서 낭만의 정신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고 그때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여지는 그 낭만이 동석하는 자리에 남은 모순된 흔적들이다.

레드벨트를 손에 쥐고 감격하는 테리의 갑작스러운 영웅적 봉합에서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이 상투적이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하지만 무수한 멜로드라마가 마침내 그토록 뻔한 결과에 의지적으로 투항한다 하더라도 늘 화두가 되어온 건 그 계몽적 결과에 이를 때까지 벌어진 무의지로서의 이상한 균열과 흔적들이다. 그것이 무료한 1시간10분과 괴상한 라스트신 30분을 보면서 흥미로워지는 점이다. 어느 가난한 무도인의 멜로드라마. <레드벨트>는 올 여름 가장 조용하게 찾아왔으나 예기치 않게 엉뚱한 면모를 갖추고 있어 흥미로운 괴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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