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뒤면 로봇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믿는 ‘과격한 미래주의자’ 한스 모라벡 교수(미국 카네기-멜론대 로봇공학연구소 소장)에게 한 과학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만든 로봇이 <A.I.>나 <바이센테니얼맨>에 나오는 로봇처럼 행동하는 날이 정말 올 거라고 믿습니까?” 그러자 한스 모라벡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연구실의 로봇은 조만간 <A.I.>의 데이빗이나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류를 능가할 겁니다. 하지만 제 로봇은 영화 속 로봇들처럼 인간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진 않을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을 가르치고 싶어할지는 모르겠네요.”
영화 속 로봇들이 하나같이 수동적이라며 투덜거리는 한스 모라벡 교수도 즐겁게 볼 만한 로봇영화 한 편이 나왔다. 디즈니-픽사에서 만든 <월·E>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지적으로 자극적이며, 과학적 상상력으로 충만한 영화다. 테크놀로지를 이토록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창조적 공간이기에, 픽사는 구글과 함께 늘 미국 공대생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 1위로 손꼽히는 모양이다.
<나는 전설이다>보다 더 외롭고 <매드맥스>보다 끔찍한 인류 멸망의 미래. 환경오염으로 인해 도시는 황폐화되고 인류는 더이상 지구에 살 수 없어 먼 우주로 떠나고, 지구 폐기물 분리수거 로봇 월·E만이 남아 쓰레기를 압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 황량한 지구에 정체불명의 우주선을 타고 지구식물탐사로봇 이브(Eve)가 내려와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쑥대밭으로 만들고, 월·E는 그 모습에 묘하게 이끌린다. 월·E가 우연히 발견한 풀 한 포기를 이브에게 보여주자 이브는 그것을 인간들이 살고 있는 거대우주선 ‘엑시엄’(Axiom)으로 가져가 절대자에게 인도한다. 이제는 더이상 ‘이브를 떠나보내고 지구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로맨티스트 로봇 월·E. 이브와 함께 엑시엄에서 전 우주적 스케일의 로봇러브 판타지가 이어진다.
로봇공학적으로 보자면 월·E는 매우 모순적인 존재다. 청소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불규칙한 지형에서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휠벨트가 장착돼 있고, 팔꿈치가 없어 팔놀림이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손가락도 세개뿐이어서 물건을 집기도 비효율적이다. 사운드 디자이너 벤 버트는 그에게 단순하면서도 친근한 기계음성을 부여해주었지만, 실제로 로봇공학자들이라면 청소로봇에게 (경고음 외엔) 특별히 소리를 발산하는 기능을 부여했을 것 같진 않다. 이 낡아빠지고 오래된 로봇이 지구에 홀로 남아 700년 동안 쓰레기를 압축하면서 ‘자기수리’(self-repair)를 반복하는데, 놀랍게도 운동장치(locomotion limb) 부품을 수리하지 않고, 메인 프로세서와 마더보드를 대체한다는 설정도 기발하다. 미국 제록스 연구소의 마크 임 같은 ‘로봇 자기수리’ 분야의 대가가 보기엔 매우 어설픈 설정이겠지만, 덕분에 월·E는 다른 청소로봇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이처럼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들과는 정반대 지점에 월·E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이 애니메이션이 건담류의 액션영화로 흐르지 않고 낭만적 사랑을 노래하는 로맨틱SF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로봇공학자들의 지상 최대의 당면 과제는 ‘두발로 걷고, 계단도 오르내리고 춤도 출 수 있는, 아시모 같은 돌쇠형 로봇들의 텅 빈 뇌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인데, 월·E에게 부여된 자기수리 능력과 700년이라는 시간은 이 모든 것을 가뿐히 극복한다.
무엇이 월·E를 월·E답게 만들었을까? 월·E가 700년 동안 자신의 칩을 바꿔가며 형성한 것은 인간의 기저핵(Basal Ganglia)에서 만들어내는 ‘선호와 욕구’ 기능이었다. 그는 ‘포크 겸용 숟가락’을 숟가락으로 분류해야 할지 포크로 분류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숟가락과 포크 사이에 놓아둘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만, 음악을 듣고 싶어하고, 이브의 손을 잡고 싶어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에선 융통성이 더 고등한 사고기능이지만, 로봇에게 욕구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지철학자들이 아직도 논쟁 중인 핫이슈다. ‘Put on your Sunday clothes’처럼 좋아하는 노래가 있고, 지포라이터와 루빅스 큐브처럼 ‘모으고 싶은 물건’들이 있는 로봇 월·E는 이미 ‘선호’를 가진 주체다. 그는 700년이라는 오랜 자기수리 기간 동안 로봇공학자들의 꿈인 ‘보상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선호하는 보상을 얻기 위해 특정행동 방식을 학습하는 알고리즘)을 스스로 체득해버린 로봇이 된 것이다.
월·E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나는 전설이다>의 과학자 로버트 네빌처럼 지구에 외롭게 남겨진 한 로봇의 낭만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자연과 생명을 지구 위에 뿌리내리기 위한 ‘생명 잉태’에 관한 영화다. 지구식물 탐사로봇인 이브는 메인 프로세서에 ‘모성애’가 코딩된 로봇이다. 그는 생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생명의 씨’을 찾아 그것을 자신의 몸에 잉태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데 제 모든 것을 바치며, 무사히 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절대자에게 인도하도록 프로그램된 존재다. 그래서 이브의 외형은 생물학적 생산능력을 상징하는 자궁이나 달걀(egg, 난자)을 닮았다. 월·E는 머리에 쌍안경에 얹었을 뿐 톱니와 기어에 매일 기름칠을 해야 하는 ‘구식 로봇’이지만, 이브는 자기부상을 활용하는 ‘첨단로봇공학의 산물’이라는 설정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진화적으로 더 발달한 존재임을 은유한다. 생명의 터를 닦고 청소하는 ‘노동하는 로봇’ 월·E와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이브. 월·E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고, 이브는 월·E에게서 낭만적 사랑을 배우지만, 그것이 이브의 생명 잉태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진 않는다는 설정은 낭만적 사랑이 (생명 잉태에 반드시 선행되는 개념이 아니라) ‘근대적 산물’이며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진 켈리의 뮤지컬영화 <헬로, 돌리>로부터 사랑을 배우지만,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도, 인간에게 종속돼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쿨하다. 월·E는 지구쓰레기를 청소하라는 미션을 인간에게 부여받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찾아 이브가 탄 우주선에 매달려 엑시엄을 향해 떠날 정도로 독립적이다(월·E가 인간이 부여한 미션을 거부하고 우주선에 매달려 엑시엄으로 떠나는 순간, 엑시엄의 자동항법 로봇 ‘오토’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것 또한 예견된 것이었다).
자유의지를 가진 로봇, 프로그래밍된 인간
지나친 소비(Buy)와 비대해진(Large) 인간들의 삶이 무자비한 환경파괴를 촉진하고 결국 지구를 파멸로 이끈 픽사적인 미래가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인류 멸망의 원인을 환경오염에서 찾는 것은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월·E가 우주로 나갈 때 지구 주위의 데브리(우주쓰레기)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장면은 정말 최고다!).
픽사는 환경주의를 거창하게 옹호하지도 않고 지나친 소비주의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호화판 거대우주선 ‘엑시엄’에서 보여주는 700년 뒤 인간들의 후예는 영화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미래인류상을 보여준다. 콜롬비아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에 나올 법한 뚱뚱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엑시엄. 미국의 거실을 점령한 지 오래인 레이지보이(Lazyboy) 안락의자를 테크놀로지로 무장시킨 첨단 선베드에서 평생 버튼만 누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들의 삶은 거대한 크루즈 위의 부유(浮游)하는 삶이다. 그들의 삶 역시 월·E처럼 그곳에서 700년간 계속됐지만, 월·E가 욕망을 배워가는 동안 그들은 점점 욕망을 잃어가며 ‘프로그래밍’된 삶을 영유한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지극히 수동적인 노동없는 삶.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지해 ‘테크놀로지’라는 링거를 맞으며 거대 병동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충분히 병적이다.
아마도 이 기괴한 미래 인류는 애니메이션 제작진들이 NASA(미 항공우주국)의 우주공학자들과 오랜 논의 끝에 만들어낸 설정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NASA의 ‘우주 장기체류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과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우주비행사들이 오랜 무중력 환경과 운동부족 등으로 인해 뼈가 퇴화되고 지방이 체내에 지나치게 축적되어 몸무게가 늘어나고 풍선처럼 비대해지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700년 동안 우주 비행 크루즈에서 생활해온 인간들이 보테로의 그림처럼 변해가는 것은 (이미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우 그럴듯한 설정이다. 그들의 다리가 왜 짧아졌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대목은 월·E와 이브가 지구에서 생명체를 찾아내고 그것을 꽃 피우기 위해 인간들을 지구로 귀환시키는 과정이 ‘태초의 인류’를 닮았다는 데 있다. 로봇이 인간과 자연(생명)이 지구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플롯이지만, 앞으로 인간들이 지구 위에서 문명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월·E나 이브, 그리고 여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불량로봇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짐작은 또 다른 불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제 그들에겐 지나친 소비주의를 경계하고 환경오염을 줄이는 숙제 외에 ‘과연 인간은 로봇들과의 행복한 공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같은 메즐로식 화두를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끔찍한 종말론적인 설정에서 그토록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내며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사려깊게 평가하고 있는 이 영화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의 처음 30분이 1970년대풍 복고적인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데에는 미국적인 정서가 많이 깔린 것 같다. 700년 뒤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그들에게 ‘우주 시대’의 이미지는 여전히 케네디가 부여한 근대적 이미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우주 시대가 얼마나 낭만적인가를 향수하며 살고 있으니까. 영화 <월·E>는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담긴 우주 시대의 낭만을 인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로운 낡은 청소로봇 하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픽사답지 않게 계몽적인 이 영화에서 가장 계몽적인 장면은 사실 ‘청소로봇 월·E의 고된 하루일과’다. 700년을 하루같이, 오염된 도시 위에서 쓰레기 마천루를 쌓아올리고 있는 그의 성실함은 안타깝게도 인간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선호와 욕망’을 갖게 되면서 퇴행해버린 기능이며, 동시에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로봇을 탄생시키려는 욕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인간의 뇌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성실함과 창조적 욕망’. 영화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 지금 월·E에게서 가장 샘나는 대목이다.